메뉴 건너뛰기

close

 있어야 할 복분자는 죄다 죽어버리고 잡초만 무성하다
있어야 할 복분자는 죄다 죽어버리고 잡초만 무성하다 ⓒ 김수복

금년에는 복분자 가격이 꽤나 높아질 전망이다. 고창 최대의 산업이라 할 수 있는 복분자가 지난해 겨울 한파로 모두 죽었기 때문이다. 고창군 지역특화 산업팀 관계자에 따르면 995ha(헥타르)의 70.5%가 피해를 입은 것으로 집계되었다고 한다. 전북 농정 당국의 추계 역시 그와 비슷한데, 이 같은 현상은 고창뿐이 아니다. 인근 정읍이나 순창 지역도 별반 다르지 않다. 일부 백화점 관계자들은 벌써부터 개별 농가를 상대로 전매제안을 하고 있다는 얘기도 들린다.

복분자는 묘목을 심은 지 이 년째부터 수확이 가능한 덩굴성 식물이다. 뿌리를 땅속에 깊이 내리지 않고 전후좌우 수평으로 뻗는다. 때문에 짚을 두텁게 깔아서 뿌리를 보호해야 한다. 하지만 지난해 겨울 한파는 예년과 달랐다. 삽을 땅에 꽂을 수 없을 정도의 맹추위가 몇 차례 반복되면서 땅과 뿌리가 얼었다.

일부 소규모 재배지에서는 죽은 나무를 뽑아내고 새로운 묘목을 심기도 한다. 그러나  대규모 사업자들은 정이 뚝 떨어졌다고, 기상이변의 시대에 날씨를 어떻게 믿겠느냐며 작목 변경을 하고 나섰다. 일례로 고창에서 복분자 농사를 두 번째로 많이 짓는 것으로 알려진 임봉규씨는 9만 9000㎡ (삼만여 평)의 밭을 아예 갈아엎었다.

 소규모 재배자들은 이렇게 새 묘목을 심었지만, 규모가 큰 농가는 아예 갈아엎어 버렸다
소규모 재배자들은 이렇게 새 묘목을 심었지만, 규모가 큰 농가는 아예 갈아엎어 버렸다 ⓒ 김수복

복분자뿐 아니라 감자, 고구마도 피해

기상이변으로 피해를 본 것은 복분자뿐만이 아니다. 아직 통계를 낼 수는 없지만 땅 속의 감자는 씨알을 키우지 못했고, 부지런해서 일찍 고구마를 심은 사람들은 수확을 전혀 기대할 수가 없게 돼 버렸다. 고구마는 싹을 내고 줄기를 길러서 밭에 이식하는 식물인데 새로 싹을 내기까지 한 달여의 기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복숭아, 배, 딸기 등 4월에 꽃이 피는 모든 과일 또한 냉해를 입었다.

꽃이 피다가 얼어 버리기도 했지만, 벌이 없어서 수정이 안 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벌 또한 갑작스런 추위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죽었기 때문이다. 취재 중에 만난 한 사람은 "이런 지독한 비접촉성 흉기가 있을 줄 어찌 알았겠느냐"고 천안함 사건에 빗대어 표현하기도 했다.

"해마다 봄이면 벌똥이 차에 떨어져서 영 안 좋았는데 올해는 어쩐지 벌똥이 별로 안 보이더라고요."

벌도 떼죽음을 당했다는 소식을 전해준 성종호씨의 말이다. 벌들이 허공을 날아다니면서 내놓은 배설물이 차에 떨어져서 차를 더럽혔었는데 금년에는 그런 느낌을 받지 못했다는 거다. 벌은 본격적으로 꿀을 따야 하는 계절이 오기 전인 봄철에 한 번 체내의 노폐물을 방출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먼 데를 바라보는 것이 일이 되어버린 성남기씨
먼 데를 바라보는 것이 일이 되어버린 성남기씨 ⓒ 김수복

"벌농사 다 망해 버렸네요"

복분자와 벌 농사를 겸하는 까닭에 남다른 피해를 본 성남기씨 이야기를 듣고 그의 봉장을 찾아가 봤다. 찾아간 사람이 무안해서 말을 꺼내지 못할 정도로 황당하고 썰렁했다. 벌들이 웅웅거려야 할 봉장에 벌은 거의 보이지 않고 잡초만 무성했다. 맥이 빠져서 관리를 포기한 까닭이었다. 벌이 죽어나간 뒤의 빈 벌통만 창고에 가득 쌓여 있었다.

"복분자가 다 죽어 버려서, 벌 농사라도 잘 돼야 할 텐데 어쩌려나 했는데 글쎄 무슨 놈의 추위가 꽃 피는 4월에..."

그는 말을 못 잇고 울먹거렸다. 벌통 280개가 23개로 줄었다고 했다. 90% 이상이 전멸한 셈이었다. 23개 남은 것도 벌은 몇 마리 들어 있지 않았다. 입구에서 보초를 서야 할 벌조차도 없는 실정이었다. 정상적이라면 지금쯤 벌통마다 입구에서 노는 벌들이 오륙십 마리는 되야하는데 지금은 겨우 열 마리 남짓이었다.

 벌통이 가득해야 할 봉장에 벌통은 드물고 잡초만 무성하다
벌통이 가득해야 할 봉장에 벌통은 드물고 잡초만 무성하다 ⓒ 김수복

4월은 양봉업자들에게 가장 민감한 시기다. 양봉업자들은 5월 초부터 개화가 시작되는 아카시아 꽃을 따라 대구를 시작해 충청도를 지나 경기도, 휴전선 인근까지 일주일여 간격으로 북상한다. 그 후 다시 강화도, 인천 등지로 내려오는 대장정에 나설 준비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아카시아가 끝나면 또 밤꿀을 따러 나선다.

양봉 준비는 3월 중순부터 시작된다. 설탕을 진하게 물에 풀어서 벌집에 넣어주는 사양작업을 4, 5일 간격으로 반복한다. 이때부터 여왕벌은 집중적으로 산란을 하고  일벌들은 끝없이 왕대를 만들어낸다.

왕대란 우리가 흔히 로열 젤리라고 하는 애벌레를 키우는 집이다. 인간은 이것을 따로 채취해서 약으로 쓰지만 일벌들의 입장에서는 보다 튼튼하고 생산력도 월등한 여왕을 새로 옹립하고자 하는 의도가 담겨 있다.

이전의 여왕보다 새로 만들어낸 여왕이 튼튼하다고 인식될 경우 일벌들은 떼거리로 달려들어 기존의 여왕을 죽여 버린다. 때문에 눈치 빠른 여왕은 추종자들을 데리고 탈출을 시도하는데, 이것이 이른바 분봉이다. 아무튼 여왕은 쫓겨나지 않기 위해서라도 끊임없이 알을 낳아야만 한다.

때문에 벌 한 통이 4월 말쯤 되면 두세 통으로 늘기도 한다. 성남기씨의 경우 280통이 예년과 같이 되었다면 지금쯤 최소한 500통은 돼 있어야 한다. 물론 그 많은 벌들이 가을까지 그대로 유지되는 것은 아니다. 5, 6월에 집중적으로 노동을 하는 기간 동안 벌의 수명은 이십여 일로 단축된다. 겨울에는 일을 안 하기 때문에 5개월이던 수명이 일하는 계절에는 그렇게 짧아지는 것이다.

 밖에 있어야 할 벌통이 창고에 쌓였다
밖에 있어야 할 벌통이 창고에 쌓였다 ⓒ 김수복

"사람도 헷갈리는데 벌들이 안 헷갈리겠어요" 

양봉업자들이 대장정을 나서기 직전에 하는 일이 이른바 밑밥꿀을 따는것. 벌들이 설탕을 먹고 그것을 꿀이라고 저장해 놓은 것을 제거하는 일이다. 이 밑밥꿀은 색깔이 탁하고, 그래서 아카시아꿀의 투명함을 훼손하기 때문에 반드시 제거해야 한다. 고창에서는 이 밑밥꿀만 사러 다니는 사람이 있는데, 복분자술을 담글 때 설탕 대신 넣으면 술 맛이 특출나기기 때문이다.

"그런데 벌들이 어떻게 죽은 거죠? 통 안에서 죽나요?"
"통 안에서 죽는 경우는 거의 없어요. 4, 5월에도 밤에는 보온을 해주니까 죽을 일이 없어요."
"아니 그러면, 어디에서, 어떻게?"
"너무 부지런해서, 너무 부지런하니까 죽는 거예요. 벌들은 자신의 신상과 관련한 미래를 생각하는 머리가 없어요. 날씨 따뜻하면 무조건 집에서 나가고, 꽃이 피어 있으면 죽을 둥 살 둥 모르고 달려가서 꿀을 물어오는 게 벌이거든요. 아 그런디 지난 3,4월 날씨가 오죽 사람을 헷갈리게 했나요. 사람도 헷갈리는데 벌들이 안 헷갈리고 뭐, 어쩌겠어요."

그러니까 이런 이야기였다. 벌들은 부지런해서 잠시도 집 안에 있으려 하지 않는다. 가능한 한 밖으로 나가려고 늘 바깥 동정을 살핀다. 살피다가 햇살이 따뜻하다 싶으면 이때다 하고 밖으로 나온다. 나와서는 아직 꽃도 피지 않은 계절인데 꽃을 찾는다고 천지사방을 헤매고 다닌다.

그런데 지난 4월의 날씨가 너무도 이상했다. 갑자기 초여름 기온으로 상승하는가 하면 낮에도 갑자기 영하로 떨어지고, 우박이 쏟아지고, 눈이 내리는 이변이 몇 차례나 반복되었다.

집을 나간 벌들은 돌아올 수가 없었다. 한여름에도 찬바람이 불며 폭우가 쏟아질 때는 밖에서 얼어죽는 게 벌이었다. 봄에는 물을 마시러 저수지에 갔다가 상류 쪽의 찬물에는 견디지 못하고 그대로 죽기도 한다.

 그나마 몇 개 안 남은 벌통마저도 벌의 개체수는 숫자를 헤아릴 수 있을 정도로 형편없다
그나마 몇 개 안 남은 벌통마저도 벌의 개체수는 숫자를 헤아릴 수 있을 정도로 형편없다 ⓒ 김수복

냉해는 정책당국의 무대응이 낳은 인재일 수도

양봉협회 관계자의 말에 따르면 벌의 냉해 피해는 전국적인 현상이라고 한다. '내 집' 벌이 죽어서 다른 집 벌을 사고자 해도 살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가 추산하는 평균 피해 규모는 70% 이상이라고.

사실 벌의 냉해는 자연재해라기보다 정책당국의 무대응이 낳은 결과라고 볼 수도 있다. 전국농민회총연맹은 지난해 겨울 기상이변 현상을 근거로 냉해에 관한 대책마련을 촉구하기도 했었다. 또 아이슬란드 화산 폭발 직후 과학자들은 냉해를 이미 경고했었다. 그러나 정부에서 나온 대책은 전무했다. 피해가 발생한 뒤에야 보상안을 마련하는 정도였다.

보상이래 봐야 얼마 되지도 않겠지만, 그것조차도 결국 국민의 세금을 쓰는 것이다. 정부 자신이 노동을 해서 발생한 수입을 내주는 것이 아니다. 국가의 역할이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다. 사후약방문이 국가의 존재 이유는 아닐 터이다.


#냉해#복분자#꿀벌#기상이변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사는 것이 일이고 공부인, 공부가 일이고 사는 것이 되는,이 황홀한 경지는 누가 내게 선물하는 정원이 아니라 내 스스로 만들어나가는 우주의 일부분이다.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