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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티 스타일(goatee style)

.. 수염은 고티(염소) 스타일로 길렀다. 29세의 젊은 사진가인 프레드는 얼굴에 미소가 가득한 '해피한' 청년이었다. 현재 5년 연상의 여자친구와 살고 있는데, 곧 딸이 태어날 거라며 즐거워 했다 ..  <정은진-정은진의 희망분투기>(홍시,2010) 112쪽

"29세(歲)의 젊은 사진가"는 "스물아홉 살인 젊은 사진가"나 "나이 스물아홉인 젊은 사진가"로 다듬고, '미소(微笑)'는 '웃음'으로 다듬습니다. '해피(happy)한'은 '즐거운'으로 손보고, '청년(靑年)'은 '젊은이'로 손봅니다. "현재(現在) 5년(五年) 연상(年上)의 여자친구와 살고"는 "요즈음 다섯 살 손위 여자친구와 살고"로 손질하고, "태어날 거라며"는 "태어난다며"로 손질해 줍니다.

보기글을 곰곰이 살피면 글 끝에 '즐거워'라 적어 놓고 있는데, 글 가운데에는 '해피한'이라고 적으며 따옴표까지 치고 있습니다. 굳이 영어를 써야 할 까닭이 없는데다가 따옴표를 칠 일도 없는데 이렇게 글을 씁니다. 사진쟁이 프레드한테 영어로 '해피'라는 다른 이름이 있는지 모를 노릇이지만, 이 대목에서는 "웃음 가득한 '즐거운' 젊은이였다"라 하거나 "웃음 가득한 '밝은' 젊은이였다"라 적어야 올바릅니다.

꽤 흔히 쓰는 영어 '해피'라 할지라도 글을 쓰는 사람은 이런 영어를 함부로 써서는 안 됩니다. 예전에 한동안 '해피 라면'이 나온 적이 있기도 한데, 물건이름에든 책이름에든 건물이름에든 쉬운 영어일수록 되도록 더 안 쓰도록 마음을 기울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쉬운 영어라 할 때에는 이런 쉬운 영어하고 맞서는 쉬운 우리 말이 있거든요. '즐거운'이나 '기쁜' 같은 우리 말을 안 쓰고 '해피한'을 써야만 할까요. '밝은'이나 '신나는' 같은 우리 말로 우리 마음이나 느낌을 넉넉히 담아낼 수 있습니다.

생각을 담는 말임을 곱씹고, 생각을 나누는 말임을 되돌아보며, 생각을 북돋우는 말임을 톱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 goatee : 염소 수염
 │
 ├ 수염은 고티(염소) 스타일로 길렀다
 │→ 수염은 염소 수염처럼 길렀다
 │→ 염소 수염을 길렀다
 │→ 염소 같은 수염을 길렀다
 │→ 염소 수염처럼 수염을 길렀다
 │→ 염소 수염을 하고 있었다
 └ …

한겨레신문은 새로은 매체를 만들 때마다 이제는 아예 '영어를 대놓고' 쓰고 있습니다. 한겨레신문 스스로 비판하는 '세계화' 흐름에 발맞추는 이름입니다.
 한겨레신문은 새로은 매체를 만들 때마다 이제는 아예 '영어를 대놓고' 쓰고 있습니다. 한겨레신문 스스로 비판하는 '세계화' 흐름에 발맞추는 이름입니다.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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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2010년 5월 첫머리에 한겨레신문사에서 잡지를 하나 새로 내놓았습니다. '신개념 경제 매거진'이라는 작은이름을 달고, 잡지이름은 <Economy Insight>라 붙입니다.

1988년에 처음 태어난 신문이름에는 '한겨레'라는 우리 이름을 붙였으나, '씨네21'이나 '허스토리'에 이어 '이코노미 인사이트'까지 온통 외국말 사랑에 젖어든 이름을 붙이고 있습니다. 한겨레신문은 한글만 쓰기를 하겠다고 밝힌 신문이면서도 이런 잡지이름 붙이는 매무새를 보면 아예 알파벳으로 적바림하기까지 합니다.

제 누리편지로 온 잡지 창간 소식을 살피면 '미디어마케팅'을 하는 곳에서 잡지 받아보는 일을 맡고 있으며, 잡지를 받아보고 싶으면 '우측 신청 버튼 클릭'을 하라고 적어 놓습니다. 편지 아래쪽에는 수신거부를 알리는 글월이 적혀 있는데, 나라밖 사람한테 도움이 되고자 'Refuse'라고 따로 적어 놓습니다. 정작 편지는 한글로만 적어 놓고 있어, 나라밖 사람이 읽을 수 없는데 말이지요. 더욱이, 한겨레신문 다른 매체를 알리는 말마디로 'SITE INFO'라는 영어를 씁니다.

어느 한 신문만 나무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쉬운' 영어를 곳곳에 버젓이 쓰고 있습니다. '새'나 '새로움'이라고는 적을 생각을 않고 늘 'NEW'라고만 쓰는 모습은 더없이 흔합니다.
 어느 한 신문만 나무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쉬운' 영어를 곳곳에 버젓이 쓰고 있습니다. '새'나 '새로움'이라고는 적을 생각을 않고 늘 'NEW'라고만 쓰는 모습은 더없이 흔합니다.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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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신문 한 가지만 탓할 수 없고, 잡지 하나만 나무랄 수 없습니다. 한겨레신문이 더 잘못하거나 엉터리이지도 않습니다. 오늘날 우리 나라 신문이나 잡지를 돌아보면 외국말을 버젓이 쓰는 매체가 얼마나 많습니까. 이름만 외국말일 뿐 아니라 글월로 적는 자리에까지 아예 알파벳을 쓰는 데는 오죽 많은지요.

말뜻을 생각한다면 '우먼센스'나 '레이디경향'은 참 볼꼴사납습니다. '여자 느낌'이요 '아가씨 경향'이란 소리인데, 우리 말로 잡지이름을 삼으면 얕잡히거나 어설프다고 여기는 마음일까요. '시사저널'이나 '시사in'은 잡지이름으로 보면 어느 쪽이 낫다 할 만한지 궁금합니다. 왜 우리는 '영화'라고는 말하지 못하고 'KINO'라든지 'FILM 2.0'이라고만 이름을 붙이는지 모르겠습니다. 1950∼60년대에 우리 나라에 '포토그라피'라는 사진잡지가 있었고, 2000년대 오늘날에는 'PHOTONET'이라는 사진잡지가 있습니다. 'ILUUST'는 그림을 이야기하는 잡지입니다. 그러고 보니, 한겨레신문에서 만화잡지를 만들면서 붙인 이름은 "신개념 만화잡지 '팝툰'"이었군요.

 ┌ 염소 수염 (o)
 ├ 고티 수염 (x)
 ├ 고티(염소) 스타일 (x)
 └ goatee style (x)

생각을 조금 더 이으면, 신문과 잡지뿐 아니라 방송 또한 우리 말을 아끼거나 사랑하지 않습니다. 한국방송이나 문화방송이나 교육방송이나 기독교방송이나 불교방송이라고들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케이비에스나 엠비시나 이비에스나 시비에스나 비비에스라 합니다. 글로 적을 때에는 그저 알파벳으로 KBS, MBC, EBS, CBS, BBS입니다. 한국에서뿐 아니라 한국 바깥으로 뻗어나가려는 얼을 담아 영어로 방송사 이름을 붙였다 할 텐데, 한국 바깥으로 뻗어나가는 자리에 쓰는 영어는 영어대로 쓰면서, 한국 안쪽에서 사람들하고 오순도순 나누려는 말마디는 오순도순 쓸 수 있도록 옳고 바르게 가다듬을 노릇이 아니랴 싶습니다. 바른 언론이 되고자 한다면 바른 넋을 품고 바른 취재를 하여 바른 기사를 써야 하는데, 바른 기사란 바른 삶을 바탕으로 바른 말로 펼쳐야 합니다. 바른 말이지 않고 바른 삶이지 않으며 바른 넋이지 않은 채 바른 기사를 쓸 수 있을는지요. 바른 글하고 동떨어지고 바른 생각하고 등돌리며 바른 사람하고 어깨동무하지 않으면서 바른 매체로 뿌리내릴 수 있을까요.

'산'을 이야기하는 잡지 이름은 'MOUNTAIN'인 우리 나라입니다.
 '산'을 이야기하는 잡지 이름은 'MOUNTAIN'인 우리 나라입니다.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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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을 다루거나 말하는 자리에 있는 분들부터 지식을 담은 말과 글을 얄딱구리하게 쓴다고 하겠습니다. 이 얄딱구리한 말매무새를 제대로 깨달으며 알맞고 싱그러이 추스르려는 분이 아주 드물다고 하겠습니다. 이리하여, 염소 수염을 이야기하는 자리에서 '염소 수염'이라고 말하지 못합니다. '염소 수염'을 뜻하는 영어 'goatee'인데 '고티 수염'이라고 말하는 기자들마저 있습니다.

신문이름과 잡지이름과 방송이름을 비롯해, 신문과 잡지와 방송에서 쓰고 있는 말마디 모두 아름답지 못한 셈입니다. 아름다운 말을 자꾸자꾸 내치고, 아름다운 마음을 자꾸만 잊으며, 아름다운 삶을 그예 사귀지 않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 - 글쓴이 누리집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cafe.naver.com/hbooks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 글쓴이가 쓴 ‘우리 말 이야기’ 책으로,
<생각하는 글쓰기>(호미,2009)가 있고,
<우리 말과 헌책방>(그물코)이라는 1인잡지가 있습니다.



태그:#영어, #외국어, #우리말, #한글, #국어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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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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