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ㄱ. 옛 소련

.. 그러나 1974년 10월, 나는 옛 소련을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 두 번째 사건은 구소련 당국을 굉장히 초조하게 했다 ..  <쓰지 유미/송태욱 옮김-번역과 번역가들>(열린책들,2005) 105쪽

"두 번째 사건(事件)"은 그대로 두어도 되고 "두 번째 일"로 손볼 수 있습니다. '당국(當局)'은 '정부'나 '정부 기관'으로 손질하면 한결 낫습니다. "굉장(宏壯)히 초조(焦燥)하게 했다"는 "몹시 애가 타게 했다"나 "무척 조마조마하게 했다"로 다듬습니다.

 ┌ 옛 소련 (o)
 └ 구소련 (x)

예부터 으레 '구소련'이라고들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아주 드물게 '옛 소련'이라고 이야기하면서 띄어서 적는 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거의 모든 사람들은 '구소련'이라 하면서 붙여서 적습니다.

생각해 보면 '구소련'만이 아닙니다. '고조선'이라는 이름부터 그렇습니다. '옛 조선'이라 하지 않습니다. '古'라는 한자를 앞에 붙인 '조선'이라는 나라이름을 씁니다. 우리 말 '옛'을 붙이면 나라이름 같지 않다고 느끼기 때문일까요. 하기는, '古'나 '舊'나 우리 말로는 '옛'입니다. 또는 '예전'이나 '옛날'입니다. '古'는 '오래된'이나 '묵은' 같은 느낌을 담는다 할 만하고, '舊'은 '낡은'이나 '케케묵은' 같은 느낌을 담는다 할 만하지만.

쓰임새가 헷갈릴까 걱정스럽다면, 우리 옛나라 이름을 밝히는 자리에서는 '옛조선'이나 '예조선'이라 하고, 소련 정부를 가리키는 자리에서는 '예전 소련'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름씨와 이름씨가 붙으니 '예조선'이 아니라 '옛조선'이 맞습니다만, 나라이름을 가리킬 때에는 'ㅅ'을 붙이지 않고 '예조선'이라 하면 헷갈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는 소련을 말할 때에도 마찬가지라, '예소련'이라 할 수 있어요.

그나저나 이 보기글을 들여다보니, 앞에는 '옛 소련'이라 하고, 뒤에서는 '구소련'이라 합니다. 쓰려면 앞이나 뒤나 똑같이 '옛 소련'이라 하든지 '구소련'이라 해야 옳지 않을까 싶습니다. 번역을 한다는 분이나 책을 낸다는 분이나 우리 말과 글을 좀더 깊이 헤아리면서 올바로 가누어야 하지 않을는지요.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 했으니 '구소련'보다야 '옛 소련'이 한결 낫습니다. 여기에서 한 번 더 마음을 기울여 나라이름을 붙일 때에 '예-'나 '옛-'을 붙이는 말틀을 헤아려 주면, 우리 말살림을 좀더 알차게 살찌울 수 있습니다.

ㄴ. 넓은마음

.. "카고메의 넓은 마음에 그저 고개가 숙여질 따름입니다." "저기, 지금 꼭 그런 말을 해야 되겠어?" "아, 네." "어, 무서워." "아, 그렇게 얼 것까진 없는데." ..  <타카하시 류미코/서현아 옮김-이누야샤 (25)>(학산문화사,2002) 183쪽

"그렇게 얼 것까진 없는데" 같은 말투는 그대로 두어도 나쁘지 않습니다. 다만, "그렇게 얼지 않아도 되는데"나 "그렇게까지 얼지 마"로 손보면 '것'을 살며시 털어낼 수 있습니다. 마음을 좀더 쏟을 수 있으면 좀더 알차게 말할 수 있고, 마음을 한 번 더 기울일 수 있으면 한 번 더 새롭거나 빛나는 글을 쓸 수 있습니다.

글재주가 없어서 글을 못 쓰지 않습니다. 말솜씨가 모자라서 말을 못 하지 않습니다. 글에 바치는 마음이 없거나 말에 들이는 마음이 얕기 때문에 글이나 말이나 엉성합니다. 참된 마음으로 글을 쓰면 어떠한 글이든 아름답습니다. 참된 마음으로 말을 나누면 어떠한 말이든 빛납니다. 속에 담으려고 하는 이야기가 얼마나 넉넉하고 착하고 따스한가에 따라 내 말과 글은 사뭇 달라집니다. 겉치레 말만 늘어놓을 수 있으나 속가꿈 말을 조용히 펼칠 수 있습니다. 번드레한 글만 끄적일 수 있는 한편 야무진 글을 적바림할 수 있어요.

사랑하는 사람한테 들이는 땀과 뜻과 넋처럼 글 한 줄과 말 한 마디에 내 온 땀과 뜻과 넋을 실을 노릇입니다.

 ┌ 도량(度量)
 │  (1) 사물을 너그럽게 용납하여 처리할 수 있는 넓은 마음과 깊은 생각
 │   - 도량이 넓다 / 그 스님은 도량이 큰 분이니
 │  (2) 재거나 되거나 하여 사물의 양을 헤아림
 │  (3) 길이를 재는 자와 양을 재는 되
 │  (4) 길이와 부피
 ├ 아량(雅量) : 너그럽고 속이 깊은 마음씨
 │   - 아량을 베풀다 / 아량이 없다 / 넓은 아량으로 부하 직원의 잘못을 용서했다
 │
 ├ 카고메의 넓은 마음에
 │→ 마음이 넓은 카고메한테
 │→ 마음이 넓은 카고메 앞에서
 │→ 카고메 같은 넓은 마음에
 │→ 카고메 같은 넓은 마음 앞에서
 └ …

보기글을 살피면 '넓은 마음'을 이야기합니다. 만화에 나오는 입말로 보며 그냥 지나칠 수 있으나, 곰곰이 돌아본다면 '넓은 마음'이라는 글월은 우리들도 곧잘 꺼내곤 합니다. 국어사전에 따로 '넓은마음'이라는 낱말 하나 안 실려 있고 관용구로 '넓은 마음'이나 '깊은 마음'이나 '너른 마음'을 다루지 않을 뿐입니다. 글쟁이들이 글을 쓸 때에 '넓은마음'이든 '좁은마음'이든 한 낱말로 애써 쓰려고 하지 않을 뿐입니다.

 ┌ 큰마음
 └ 작은마음

'넓은마음'을 한 낱말로 삼기는 힘들지 않느냐고 생각한다면, '큰마음'이라 하면 됩니다. '큰일-큰돈-큰힘'처럼 '큰-'을 앞가지로 삼으면 됩니다. '큰-'이나 '작은-'을 앞가지로 삼는다면 '큰나라/작은나라'를 비롯해 '큰사람/작은사람'이나 '큰사랑/작은사랑'이라든지 '큰집/작은집'까지 골고루 지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굳이 '도량'이나 '아량'이라는 한자말만 써야 할 까닭이란 없습니다. 한자말 '도량'이란 다름아닌 "넓은 마음과 깊은 생각"을 뜻한다지요. 한자말 '아량'이란 그예 "깊은 마음씨"를 뜻한다 하고요. 그러면 처음부터 "넓은 마음"을 뜻하는 한자말 '도량'을 쓰기보다, 말 그대로 '넓은마음'이라 이야기하면 될 노릇입니다. "깊은 마음씨"를 나타내는 한자말 '아량'을 쓰지 말고 있는 그대로 '깊은마음'이라 이야기한다면 어린이부터 어르신까지 누구나 손쉽게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 도량이 넓다 → 마음이 넓다 / 마음밭이 넓다
 ├ 그 스님은 도량이 큰 분이니 → 그 스님은 마음밭이 큰 분이니
 └ 넓은 아량으로 → 넓은 마음으로

국어사전 보기글을 살펴봅니다. "도량이 넓다"라느니 "넓은 아량"이라느니 나옵니다. 사람들이 말풀이나 말뜻을 제대로 짚고 있다면 이런 엉터리말은 쓸 수 없을 테지만, 사람들은 말풀이나 말뜻을 제대로 짚고 있지 않습니다. 모르기는 몰라도 '도량'이나 '아량' 같은 낱말을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는 사람은 없으리라 봅니다. 국어사전에 실린 보기글을 읽을 사람 또한 드물지 않으랴 싶습니다.

"넓은 마음"을 뜻한다는 '도량'이라면, "도량이 넓다"처럼 적바림한 보기글은 "넓은 마음이 넓다"인 셈입니다. "넓은 아량"이나 "도량이 큰"이든 매한가지입니다. 엉터리 겹말을 쓰는 꼴입니다. 엉망진창 막말을 일삼는 모양입니다. 말을 말다이 다루지 못하고 글을 글다이 껴안지 못하는 매무새입니다.

우리들은 우리 이웃하고 어울리면서 우리 말을 우리 넋에 걸맞도록 가다듬지 못한다 하겠습니다. 삶을 가꾸지 못하고 넋을 가꾸지 못하며 말을 가꾸지 못하는 흐름이라고 하겠습니다. 아름다움을 비롯해 착함과 참됨을 잃거나 잊은 채 살아가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덧붙이는 글 | - 글쓴이 누리집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cafe.naver.com/hbooks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 글쓴이가 쓴 ‘우리 말 이야기’ 책으로,
<생각하는 글쓰기>(호미,2009)가 있고,
<우리 말과 헌책방>(그물코)이라는 1인잡지가 있습니다.



태그:#살려쓰기, #토박이말, #우리말, #한글, #국어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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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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