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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원룸의 침대

 

.. 우산 없이 출근했다가 비를 만나 흠뻑 젖은 생쥐 꼴로 귀가한 어느 겨울날, 나는 적막한 내 원룸의 침대에 누워 몸이 덥혀지길 기다리면서 마음속 가장 안쪽 방을 노크해 <소공녀>의 세라 크루를 불러냈다 .. <모든 기다림의 순간, 나는 책을 읽는다>(곽아람,아트북스,2009) 4쪽

 

'출근(出勤)했다가'는 그대로 두어도 되나 '일터에 갔다가'나 '일하러 나갔다가'로 손볼 수 있습니다. '귀가(歸家)한'은 '집으로 돌아온'이나 '돌아온'으로 손봅니다. '적막(寂寞)한'은 '조용한'이나 '쓸쓸한'이나 '썰렁한'으로 손질하고 '덥혀지길'은 '따뜻해지길'로 손질합니다. '노크(knock)해'는 '두드려'나 '찾아가'로 다듬고, "<소공녀>의 세라 크루"는 "<소공녀>에 나오는 세라 크루"로 다듬어 줍니다.

 

 ┌ 내 원룸의 침대에 누워

 │

 │→ 내 원룸 침대에 누워

 │→ 내 원룸에 있는 침대에 누워

 │→ 내 원룸에 덩그러니 놓인 침대에 누워

 └ …

 

우리는 우리 말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채 어린 나날을 보냅니다. 우리 세상 흐름을 돌아보면 어린이한테 옳고 바르게 말을 가르치는 얼거리가 없습니다. 되도록 일찍 한글을 떼도록 하고, 어린 나날부터 한자니 영어니 머리속에 집어넣으려고는 하지만, 참다운 말을 알맞고 슬기롭게 가르치는 얼거리란 보이지 않습니다. 집에서 어버이가 어린이한테 하는 품이나 학교에서 교사가 학생한테 보여주는 매무새가 다르지 않습니다. 이곳이든 저곳이든 이 나라 어린이는 이 나라 바르고 고운 말을 즐겁고 신나게 배울 수 없습니다. 우리 겨레 맑고 씩씩한 말을 기쁘고 보람차게 익힐 수 없습니다.

 

나이가 들어 푸름이가 되어도 말다운 말이란 무엇인지 돌아보지 못합니다. 푸름이 마음은 온통 대학입시에 쏠려야 합니다. 또는 못난 어른을 흉내내는 아랫도리 놀이나 담배피우기 놀이나 얄딱구리한 범죄에 눈을 뜹니다. 이 나라 어른이 푸름이한테 보여주는 삶이란 그리 아름답지 못합니다. 굳이 신문이나 방송을 들추지 않더라도 곱거나 슬기롭고나 살가운 삶자락은 퍽 드뭅니다.

 

어느덧 어른이 된 나이라 한다지만, 이제 어른이 되어서는 구태여 새로 무언가를 더 배우면서 내 모습을 가다듬거나 새롭게 일어서도록 다스리지 않습니다. 나이 스물다섯에 내 말투를 고친다든지 내 말씨를 추스른다든지 내 말밭을 일군다든지 하는 사람을 만나기란 참 힘듭니다. 나이 서른인 사람이나 나이 마흔인 사람이나 똑같습니다. 나이 쉰 예순 일흔에 당신들이 이제까지 잘못 알거나 엉터리로 써 온 말을 바로잡거나 털어내는 모습을 보기란 대단히 어렵습니다. 몇몇 분은 여든 나이에도 당신 삶을 옳고 바르게 꾸리려고 애씁니다. 그러나 몇몇 분만 이렇게 애씁니다. 이 나라에서 스스로 어르신이라고 일컫는 분들은 스스로 거듭나는 모습을 이 나라 젊은이와 푸름이와 어린이한테 보여주지 못합니다.

 

 ┌ 내 작은 방을 가득 채운 침대에 누워

 ├ 내 작은 집 한쪽에 붙은 침대에 누워

 ├ 내 보금자리 폭신한 침대에 누워

 ├ 내 단칸방 자그마한 침대에 누워

 └ …

 

글을 쓰는 사람들은 얼마나 어른다운지 궁금합니다. 우리 말로는 글쟁이나 글꾼이요 바깥말로는 '작가'나 '라이터'인 분들은 얼마나 사람다운지 궁금합니다. 문학이라는 글을 쓰든, 신문기자로서 글을 쓰든, 교수나 학자라는 얼굴로 글을 쓰든, 글을 붙잡는 어른들은 얼마나 어른다움을 글에 담아내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어른이라는 자리에 서면 아이를 가르치는 자리에만 설까요? 가르치는 사람은 새로 배울 일이란 없을까요? 어른 된 분들 가슴에는 무엇이 자리잡고 있는지요? 어른이라는 자리에서 아이를 앞에 두고 무슨 마음과 넋과 생각을 다스리고 있는지요?

 

말을 옳게 하고 글을 바르게 쓴다고 하여 아름다운 어른은 아닙니다. 말을 알맞게 하고 글을 곧게 쓴다고 해서 슬기로운 어른은 아닙니다. 그저, 바른 말글이란 사람된 밑바탕입니다. 그예, 옳은 말글이란 어른된 밑거름입니다. 바르고 옳은 말글로 당신들 뜻과 얼을 나누는 바탕을 튼튼하게 다지면서 바르고 옳게 살아가야 비로소 어른이라 할 만합니다. 번지르르한 말을 넘고 겉치레 가득한 글을 털어내어야 바야흐로 어른 소리를 들을 만합니다. 몸으로 보여주는 말이 되고 온마음을 바치는 글이 되어야 시나브로 어른 자리에 한 발을 디딘다 할 만합니다.

 

 ┌ 나의 원룸의 침대 (x)

 ├ 내 원룸의 침대 (x)

 └ 나의 원룸 침대 (x)

 

이 보기글을 가만히 돌아봅니다. 이 글을 쓴 분은 ㅈ일보 기자입니다. ㅈ일보는 한자를 몹시 사랑한다고 합니다만, 오늘날 ㅈ일보가 보여주는 글매무새를 돌아본다면, ㅈ일보에서 드러나는 한자는 0.01%밖에 안 된다고 느낍니다. 신문 이름이나 한자로 적지, 기사에서 한자를 드러내는 일은 없으며, 굳이 한자를 적는다 할 때에도 한글을 앞에 놓고 묶음표를 친 다음 한자를 넣습니다. 이렇게 묶음표를 치고 한자를 넣는 말마디를 살피면 그냥 '쉬운 우리 말'로 하면 그만일 텐데 하는 생각이 드는데, 이제는 예전처럼 한자 범벅인 기사가 아닙니다. 정작 ㅈ일보를 손가락질하는 신문에서 한자를 즐겨쓰고 있으며, 괜히 '어렵고 딱딱한 말'로 안 해도 되는 말을 어렵게 비꼽니다. 그러면서 '갖은 영어 말투와 번역 말투와 일제강점기 말투'를 고스란히 보여주기까지 합니다.

 

그러니까 ㅈ일보 기자가 쓴 글이라고 해서 더 엉터리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요즈음 기자들 글매무새는 엇비슷합니다. 뭐랄까, 이 보기글에서는 "나의 원룸의 침대"처럼 적지는 않았으니 매우 놀랍고 참으로 반갑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나의'가 아닌 '내'라고 적었거든요.

 

 ┌ 작은방 / 작은집

 └ 원룸 / 투룸

 

언제부터였는지 잘 떠오르지 않으나 1990년대 첫무렵부터가 아닌가 싶은데, "물은 셀프"라는 말마디와 함께 "원룸 고시원"이라는 말마디가 퍼졌습니다. 손수 물을 떠서 마시라고 한다면 "물은 손수 떠 드세요"라 하면 될 텐데 '셀프'가 갑작스레 쫙 퍼졌습니다. 대학교 앞이든 어디 앞이든 혼자 지내면 방 하나만 넉넉하니 예부터 하숙을 하든 자취를 하든 살림을 하든 '단칸방'을 얻어 왔습니다. 그런데 '단칸방'이라는 말이 부동산에서조차 싹 사라지며 난데없이 '원룸'이 되더니, 방 둘짜리 작은 집은 '투룸'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면 방 셋짜리 집은 '쓰리룸'일까요?

 

따지고 보면 나 스스로 이렇게 쓰고자 해서 쓰는 말은 아닙니다. 세상이 온통 영어나라이기에 '원룸'이든 '투룸'이든 씁니다. 세상이 온통 엉망진창투성이라서 '그녀'도 쓰고 '나의'도 씁니다.

 

토씨 '-의'를 알맞게 쓰는 글매무새를 어릴 때부터 어른이 될 때까지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을 뿐더러, 신문기자로 일한다고 해서 따로 깊이 배울 일이 없다고 느낍니다. 날마다 쏟아지는 책 가운데 토씨 '-의'를 알맞고 바르게 가다듬도록 이끄는 글쓰기 책이 있습니까. 스무 해 앞서 나온 <우리 글 바로쓰기>를 빼놓고 토씨 '-의'를 제대로 가누거나 추스르면서 이야기 실마리를 열어 가는 책이 있습니까.

 

듣느니 엉터리말이요 읽느니 멍청이글입니다. 둘러싸이느니 못난 말이요 에워싸이느니 짓궂은 글입니다. 글쟁이 혼자서 헤쳐 나가기 어려운 말굴레입니다. 글꾼 홀몸으로 부딪혀 딛고 서기 힘든 글수렁입니다. 딱히 무어라 따지기 까다롭습니다.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없을 뿐더러, 하나하나 꼬치꼬치 캐물을 수 없습니다. 다만, 기다리면서 믿어 봅니다. 우리 스스로 언젠가는 말굴레를 벗어던질 수 있기를 기다려 봅니다. 우리 힘으로 어느 때인가는 글수렁을 박차고 나올 수 있다고 믿어 봅니다.

덧붙이는 글 | - 글쓴이 누리집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cafe.naver.com/hbooks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 글쓴이가 쓴 ‘우리 말 이야기’ 책으로,
<생각하는 글쓰기>가 있고,
<우리 말과 헌책방>이라는 1인잡지가 있습니다.


태그:#-의, #토씨 ‘-의’, #우리말, #한글, #국어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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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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