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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섬섬옥수 : 그 여학생의 섬섬옥수

.. 돈을 건네는 그 여학생의 섬섬옥수에 잠깐 마음이 흔들리기도 했지만, 나의 대답은 결국 이러했다. "저, 복사집 아저씨 아니라 학생인데요." ..  <표정훈-탐서주의자의 책>(마음산책,2004) 26쪽

"나의 대답(對答)은"은 "내 대답은"이나 "내 말은"으로 다듬고, '결국(結局)'은 '끝내'나 '바로'나 '똑부러지게'로 다듬습니다. 또는 이 글월을 "나는 끝내 이렇게 대답했다"나 "나는 바로 이와 같이 말했다"나 "나는 또렷하게 이처럼 이야기했다"나 "나는 힘을 주어 이렇게 말했다"나 "나는 차분히 이와 같이 이야기했다"로 손질해 보아도 괜찮습니다.

 ┌ 섬섬옥수(纖纖玉手) : 가냘프고 고운 여자의 손을 이르는 말
 │   - 손은 섬섬옥수는 아니었지만 / 섬섬옥수를 뿌리치고 돌아서 입산할 때
 │
 ├ 그 여학생의 섬섬옥수에
 │→ 그 여학생 고운 손에
 │→ 그 여학생 하얀 손에
 │→ 그 여학생 어여쁜 손에
 │→ 그 여학생 가냘픈 손에
 └ …

"젖은 손이 애처로워 ……" 하며 부르는 대중노래가 있습니다. 따로 한 낱말로 삼지 않으나 '젖은 손'이란 "집살림을 하면서 쉴 겨를이 없도록 물을 만져야 하는 손"을 가리킵니다. 이러한 말마디를 놓고 관용구라고 하는데, 한 낱말은 아니어도 국어사전에 따로 올려야 알맞습니다.

노래에 나오지 않더라도 '젖은 손'은 집일에 매인 여자들 삶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고운 손'이란 "사랑스럽고 따뜻한 여자 손"을 가리키는 자리에 으레 씁니다. 이 말마디 또한 따로 한 낱말로 삼지 않으나 거의 관용구처럼 쓰고 있습니다.

하나하나 생각해 본다면, '젖은 손'과 '고운 손' 말고도 "일을 많이 하느라 딱딱하고 투박해진 손"을 가리키는 '거친 손'이 있습니다. "몸이 여리거나 많이 힘든 삶"을 가리키는 '아픈 손'이 있습니다. '여린 손'이라 하면 몸이 아프다든지 마음이나 몸이 튼튼하지 못한 사람을 가리킵니다. '거센 손'이라 하면 온갖 가시밭길을 꿋꿋하게 헤쳐나갈 수 있는 튼튼한 사람을 나타냅니다. '굳은 손'이라 하면 믿음직하며 야무진 사람 매무새를 보여줍니다.

 ┌ 손은 섬섬옥수는 아니었지만
 │→ 손은 곱지 않았지만
 │→ 손은 가냘프며 곱지 않았지만
 ├ 섬섬옥수를 뿌리치고 돌아서 입산할 때
 │→ 고운 손을 뿌리치고 돌아서 산에 들어갈 때
 │→ 고운 손길을 뿌리치고 돌아서 산에 올라갈 때
 └ …

예부터 한문으로 살아온 분들로서는 이런저런 손이 아닌 '섬섬옥수'입니다. 어떤 소설쟁이는 아예 이 한문 투로 이름을 붙인 작품을 쓰기도 했지만, '섬섬'이든 '옥수'이든 우리 말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 삶에 바탕을 둔 살림말이라 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기득권을 움켜쥔 이들은 한문으로 살아왔기에 이분들로서는 한문으로 당신들 뜻과 마음을 나타낼 때라야 비로소 '살림말'이 될 테지요. 땅을 부치고 살던 여느 사람들한테는 뜬구름 같거나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일 '섬섬'이거나 '옥수'이지만, 책만 파면서 권력과 가까이 지내는 이들로서는 '섬섬'과 '옥수'야말로 애틋함과 따사로움이 담뿍 담긴 말이로구나 싶습니다.

 ┌ 섬섬(纖纖) : 가냘프고 여리다
 └ 옥수(玉手) : (1) 임금의 손 (2) 여성의 아름답고 고운 손

우리가 차근차근 말밑을 헤아려 본다면 '섬섬옥수'란 '섬섬 + 옥수'임을 알 수 있습니다. 지난날 권력자하고 지식인들이 '섬섬하다'라는 말을 쓰고 '옥수'라는 말을 쓰다가 아주 자연스럽게 두 낱말을 엮어 '섬섬 + 옥수'처럼 썼을 뿐임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권력자와 지식인이 아니고 어느 누가 '섬섬하다' 같은 말을 쓸 일이 있겠습니까? 입으로도 이런 말은 하지 않고 손으로도 이런 글은 쓰지 않습니다.

권력자와 지식인이 아니고 어느 누가 임금님 손이나 여자 손을 바라보며 '옥수'같은 말을 꺼낼 일이 있겠습니까? 입으로도 이런 말은 내뱉지 않고 손으로도 이런 글은 적바림하지 않습니다.

갸날프고 여리다면 '가냘프고 여리다'고 하는 우리들입니다. 또는 '가냘프다'라고만 하거나 '여리다'라고만 합니다. 둘 가운데 하나만 써도 두 가지 느낌과 뜻을 함께 느낄 만합니다. 아름답고 고운 손이라 한다면 '아름답고 고운 손'이라고 하는 우리들입니다. 또는 '아름다운 손'이라고만 하거나 '고운 손'이라고만 합니다. 두 가지 가운데 하나만 써도 두 마음과 넋을 나란히 나눌 만합니다.

 ┌ 아리땁고 보드라운 손
 ├ 보드랍고 아리따운 손
 ├ 어여쁘고 부드러운 손
 ├ 부드럽고 어여쁜 손
 └ …

우리 꺔냥껏 쓰는 두 말마디를 엮어 '가냘픈 + 고운 + 손'으로 쓸 수 있으며, '여린 + 아름다운 + 손'으로 쓸 수 있어요. 우리는 두 마디로 이루어진 관용구 '고운 손'과 '여린 손'을 쓸 수 있는 한편, 세 마디로 이루어진 '가냘프고 고운 손'과 '여리고 아름다운 손'을 쓸 수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 말쓰임을 넓힐 노릇이고, 우리 손으로 우리 말밭을 일굴 노릇입니다. 우리 머리로 우리 말투를 살피며 말문화를 북돋우고, 우리 가슴으로 우리 말결을 가누어 말잔치를 이룰 노릇입니다.

한 가지 낱말책에는 우리 슬기로 이루는 낱말을 알차게 담고, 다른 낱말책에는 우리 깨달음으로 엮어낸 관용구를 힘차게 담으면 됩니다. 우리가 바깥에서 들여오는 말마디란, 하나같이 다른 나라 사람들이 제 나라 삶터에 걸맞게 새로 지은 말마디입니다. 그네들은 그네들 삶과 문화를 고이 돌아보면서 제 삶과 문화를 일으킬 말마디를 짓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 우리 삶과 문화를 고이 돌아보면서 우리 삶과 문화를 일으킬 말마디를 짓고 가다듬으며 다스려야 합니다.

덧붙이는 글 | - 글쓴이 누리집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cafe.naver.com/hbooks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 글쓴이가 쓴 ‘우리 말 이야기’ 책으로,
<생각하는 글쓰기>가 있고,
<우리 말과 헌책방>이라는 1인잡지가 있습니다.



태그:#고사성어, #상말, #우리말, #한글, #국어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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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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