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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승합차를 두고 산에 올랐다.
 승합차를 두고 산에 올랐다.
ⓒ 지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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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의 카탈루니아 지방. 높은 피레네 산맥과 풍족한 자연의 혜택을 입은 이곳은 스페인에서도 꽤 부자동네이다. 프랑스와 스페인의 경계 지점인지라 언어 또한 스페인어에 프랑스어를 살짝 섞어놓은 듯한 느낌이다.

 에르미타 드 라 마레 드 데우 드 레스 네우스(Ermita de la mare de Deu de les Neus).
 에르미타 드 라 마레 드 데우 드 레스 네우스(Ermita de la mare de Deu de les Neus).
ⓒ 지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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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불고불 멀고먼 피레네 산맥의 길들을 지나면 깊은 산 속에 한 에르미타가 있다. 에르미타 드 라 마레 드 데우 드 레스 네우스(Ermita de la mare de Deu de les Neus).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험악한 산길을 오르기에는 승합차가 많이 지친 듯했다.

 무거운 대형 삼발이를 맨 사진사 세바스티안.
 무거운 대형 삼발이를 맨 사진사 세바스티안.
ⓒ 지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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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가 에르미타 익스프레스의 마지막 겨울이 될 것 같아. 그동안 참 많은 일들을 나와 함께 했는데…. 사진을 찍고 내려오며 조용히 주차된 승합차를 바라보면 마치 튼실하고 충직한 짐승 한 마리가 나를 기다리는 듯했지. 멀리에서 혹 다른 노란색 승합차를 만나도 가슴이 따뜻해지곤 했어. 이놈을 보내고 나면 무척 아쉽고 허전한 느낌이 한동안 들 거야."

승합차의 운전대를 쓰다듬으며 세바스티안이 말했다.

차에서 내려 한 시간 남짓 장비를 들고 산을 올라야 했다. 이렇게 공을 들여 산길을 올라 다행히 아름다운 에르미타와 구름이 기다려준다면야 더 이상 바랄 나위가 없겠지만, 언제나 사진에 포착되는 이상적인 순간을 바라는 일은 미지수와도 같다.

그러나 이곳 에르미타 드 라 마레 드 데우 드 레스 네우스에 도착하자 오늘의 산 오름은 헛고생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얇은 돌을 층층이 정교하게도 쌓아 올린 아름다운 에르미타가 눈을 맞으며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귀여운 여인의 탑'에 얽힌 특별한 사랑의 전설

 눈 속에서 사진촬영.
 눈 속에서 사진촬영.
ⓒ 지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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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다른 에르미타들과는 달리 특별한 사랑의 전설이 있다. 아랍인들과 스페인 기독교인들 사이의 세력 싸움에서 기독교 세력이 점점 강해지자 아랍인들은 서서히 영토를 떠나기 시작했다.

이 마을에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영주와 그의 딸이 살고 있었다. 영주의 딸은 너무도 아름다워, 당시 표현에 따르면 사과 꽃을 바라보는 느낌이라 했다. 어느 날 산책 중 그녀는 이슬람 제국의 한 사라센과 마주치게 되었는데 그 둘은 즉시 사랑에 빠졌다.

이 사실을 안 영주는 사라센에게 소중한 딸을 줄 수 없다며 에르미타 옆 높은 탑 라 토레 드 라 미뇨나(La Torre de la Minyona, 귀여운 여인의 탑) 맨 꼭대기에 그의 딸을 가두었다.

매일 두 명의 하인만이 이곳을 방문할 수 있었는데, 그 두 하인은 맛있는 음식과 아름다운 보석, 화려한 드레스들을 들고 찾아왔다. 그러나 영주의 딸은 탑에 갇혀 아무것도 먹지도 아름다운 옷과 보석으로 치장하지도 않은 채 우울한 나날을 보냈다고 한다.

몇 달 후 어두운 겨울 밤, 사라센 무사는 탑 위를 맨손으로 올라 영주의 딸을 구출하고 말 위에 올라탄 후 달아나고야 말았다. 영주는 딸을 잃은 슬픔과 분노에 못 이겨 그가 가진 모든 마을의 땅과 성들을 팔았다.

그리고는 그 사라센을 찾아 죽이고 딸을 데리고 오겠노라는 말을 남긴 채 떠났다고 한다. 이후 아무도 영주를 본 사람은 없으며 사라센과 영주의 딸은 아랍 제국으로 귀향해 행복한 인생을 살았다고 한다.

전설은 인간이 가진 기본적인 욕망의 문을 두드리기에 전해진다

 사라센, 영주, 그리고 그의 딸이 등장하는 전설을 그린 그림.
 사라센, 영주, 그리고 그의 딸이 등장하는 전설을 그린 그림.
ⓒ 지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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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이야기들은 얼핏 단순한 것 같지만 인간이 가진 가장 기본적인 욕망의 문을 두드리기에 오랜 시간에 걸쳐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오곤 한다. 어쩌면 가장 단순한 마음으로 사는 것이 이 복잡한 세상을 헤쳐가는 지혜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지금은 에르미타만이 남아 있을 뿐, 영주의 딸이 갇혔던 탑은 허물어져 앙상한 잔재의 돌무덤으로 변모하였다.

 산을 내려오며 멀리 보이는 에르미타 익스프레스.
 산을 내려오며 멀리 보이는 에르미타 익스프레스.
ⓒ 지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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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그곳에 전해져 내려오는 사랑 이야기를 나누며 산에서 내려왔다. 저 아래, 에르미타 익스프레스 승합차가 눈에 들어왔다. 우리의 애마. 비록 이 꼬불거리는 험한 산길을 우리와 동행할 수는 없지만 멀리서 우리를 조용히 기다리고 있는 노란색 승합차를 보자 추웠던 마음이 녹아내리는 듯했다.

사라센과 영주의 딸도 이 험한 산길을 말로 달리며,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뜨거운 심장의 고동소리를 느꼈을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쓴 지은경 기자는 지난 2000~2005년 프랑스 파리 프리랜서 기자로 활동했으며, 최근 경상남도 외도 전시 기획을 마치고 유럽을 여행 중입니다. 현재 스페인에 머물고 있으며, 미술, 건축, 여행 등 유럽 문화와 관련된 기사를 쓸 계획입니다.



#에르미타#스페인#피레네 산맥#에르미타 드 라 마레 드 데우 드 레스 네우스#귀여운 여인의 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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