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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형상 제주목사가 화공 김남길을 시켜 만든 <탐라순력도>(1703)는 당시 시대상을 볼 수 있는 귀한 자료다. 그 가운데 하나인 '병담범주'편에서는 용연에서 뱃놀이하는 모습과 더불어 해녀들이 물질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특히 해녀는 고무옷을 입는 오늘날과 달리 하얀 소중이를 입고 있어 신선하다. '백문이 불여일견'인 셈이다.

그런데 이 '병담범주' 그림에선 한 가지 이상한 점이 발견된다. 그림은 한라산에서부터 아래로 내려와 용연과 한두기(대독포), 용두암, 연대(수근연대) 따위의 지리정보를 담고 있는데, 문제는 용두암이 두 곳이라는 것이다. 그림을 들여다봐도 이 두 용두암은 생김새가 비슷한데 그 연유가 오래 전부터 궁금했다.

병담범주(부분) [탐라순력도]에 수록된 그림이다.오른쪽 두 바위에 모두 '용두'라 적혀 있다
병담범주(부분)[탐라순력도]에 수록된 그림이다.오른쪽 두 바위에 모두 '용두'라 적혀 있다 ⓒ 제주시

그래서 이 오랜 의문을 풀고자 몇몇 자료들을 찾아보았지만, 대부분 용두암이 두 개라는 사실을 언급하면서도 논외로 넘겨버리거나, 언급을 의도적으로 피한 듯한 경우도 있었고, 언급조차 안 된 경우도 많아 그저 소득없이 시간을 흘려보냈다. 그러다 최근에 여행 기사를 올리며 이 지역을 직접 거닐다보니 자꾸만 이 문제가 떠올라 은근히 오기가 생겨난 것이다. 이쯤 되니 미스터리를 좇는 탐험가같은 비장함마저 들었다. 왜 용두암이  두 개인 것일까? 먼저 몇 가지 가설을 만들어 질문해 보자.

용두암 높은 파도와 함께 봐야 제 맛이다.
용두암높은 파도와 함께 봐야 제 맛이다. ⓒ 이광진

[가설①] 진짜로 두 군데 용두암이라는 이름이 존재했는가?

용두암은 용머리, 용머루, 용마루 따위의 이름을 지닌다. 그 한자 표기가 용두암이 아니라 '용두'인 것은 '용머리'라 불렀기 때문이다. '용머리 바위'라고 부르려면 길어서 귀찮은 것이다. 이런 '용머리'는 한 군데 더 있다. 실제로 안덕면 사계리 근처에 '용머리'라 불리는 바위가 있으며, 구좌읍의 용두동은 그 지형 덕에 '용머리'라 불렀으며, 그 밖에도 크게 알려지지 않은 곳도 있을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원래 두 곳 모두 실재하는 바위였으나, 어떤 연유로 해서 한 쪽이 그 이름을 현재의 용두암에게 넘겨주어버렸을 수도 있다. 그 이유는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두 바위가 같은 이름을 쓰는 데서 오는 불편함, 또는 관광객을 끌기 위해 한쪽을 의도적으로 의미를 축소하였거나 개명했다거나 하는 따위의 것이 되겠다. 

어쨌든 이런 가설을 푸는 데는 옛 지명을 다룬 글들을 뒤지거나 인근의 어르신들을 만나 확인하는 것이 상책이다. 그런데 아직까지는 이렇다 할 소득이 없다. 

[가설②] 혹시 잘못 적은 것은 아닐까?

<탐라순력도>를 꼼꼼하게 살펴보면 그럴 가능성은 적어 보인다. 워낙에 당시 사실을 충실하게 묘사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 가지 단서를 말하자면, 이 <탐라순력도> 이전에 목사를 지냈던 이익태가 화공을 써서 만든 <탐라십경도>가 있었다.

이것은 오늘날 '영주10경', '영주12경'이니 말하는 형식의 절경 열 군데를 꼽아 그림으로 만들어 낸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그림이 <탐라순력도>에 적잖은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다. 역시 용연을 그린 취병담편을 보면 매우 유사하다는 느낌을 받는데, 표절인지 오마주인지는 논외로 한다.

취병담(부분) [탐라십경도]에 수록되었다.현재 일본 교토, 고려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다.
취병담(부분)[탐라십경도]에 수록되었다.현재 일본 교토, 고려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다. ⓒ 일본, 고려미술관

이 그림에도 예상대로 용두암, 곧 '용두'가 두 군데 표시되어있다. 다만 그림은 용두암과 비슷하지 않고 위로 삐죽삐죽 솟아난 모습이 중국의 그림을 보는 듯하다. 또한 이 두 '용머리'가 <탐라순력도>의 것과는 달리 겹쳐져 그려져 있다. 이는 상당히 가까운 곳에 놓였 거나, 그림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일부러 그리 배치했을 수 있다. 어쨌든 <탐라순력도>, 적어도 병담범주 그림의 '두 용두암'은 이 '취병담'그림에서 나왔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 두 가지 정도로 하고 사진기를 들고 현장 답사에 나섰다. 용두암 비슷한 녀석을 찾아보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림에서처럼 용두암이 있는 부근에서 서쪽으로 걸어갔다. 그림에서 끝지점에 있는 연대는 '수근연대'이고 오늘날에도 남아 있다. 그러니까 그곳에 못 미치는 지점까지만 답사를 하면 되는 것이다. 거리는 약 1km.

결론을 말하자면, 생각은 참 쉬웠다. 며칠동안 이어진 매서운 겨울 추위는 손발이 오그라들게 만들었고, 고물 사진기는 먹어놓은 전기를 순식간에 뱉어놓아 잠들어 버리기 일쑤였다. 어쨌든 이 코스를 여러 날에 걸쳐 왕복하기를 여러 번. 슬슬 감이 잡혔다.

먼저 용두암이 자리한 곳은 상당히 높은 절벽지대이다. 이 높은 자리에서 서쪽으로 빠져나오면 제주도 최초의 해안도로인 '용담해안도로'가 이어진다. 이 도로를 접하고 있는 'OO아파트'의 바로 앞 해안 언덕에는 '말머리 소금빌레'란 푯말이 서 있다. 이곳에 관한 이야기는 다음에 풀어내기로 하고, 일단은 '말머리'라는 이름에 주목하게 된다.

생각해보면, '용머리'나 '말머리'나 그 생김새가 동떨어져 있지 않다. 오늘날 '용두암'이라고 부르는 저 '용머리'를 보고 난 한 관광객이 '에휴, 용머리가 아니라 말머리'라고 푸념한 것을 들은 기억도 있는 나는 쾌재를 불렀다. 오호라, '말머리'가 있으면, '용머리'라고 잘못 적어 놓았을 수도 있는 것이다. 아니면, '말머리'를 의도적으로 '용머리'로 격상시켜 적었을 가능성도 있다.

말머리 소금빌레 표석 높은 언덕 위에 자리하는데, 사진의 왼쪽에 [소금빌레]가 있다.
말머리 소금빌레 표석높은 언덕 위에 자리하는데, 사진의 왼쪽에 [소금빌레]가 있다. ⓒ 이광진

이 '말머리 소금빌레'와 아주 가까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게 되므로 바로 이 언덕이 '말머리'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나 정확성을 기하기 위해 자료를 더 찾아보았다. 그런데 입수한 조그만 자료 지도엔 '말머리'가 좀 더 멀리 자리잡고 있었다. 그 곁 오른쪽엔 '말머리물(용천수)'이 있다.

마음 먹고 도서관에 앉아 용담동에서 낸 <용담동지>(2001)를 보니 위치가 글로 적혀 있다. '용마부락(용마마을) 북쪽 바닷가에 있었던 말머리 형상의 괴석'이라고 나온다. 생각과는 달리 여기 소금빌레보다 한참 더 내려간 서쪽에 있다는 것이다. 또한 1980년 중반에 해안도로를 내면서 파괴되었다는 사실도 알 수 있었다.

돌아와서 <탐라순력도>의 그림을 보았더니 위치가 얼추 맞아떨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파괴되었다'는 글이 자꾸 눈에 밟힌다. 80년대 중반의 일이라면, 벌써 25년도 더 된 일이 아니던가. 게다가 당시에 이를 목격한 인물도 드물 것이고, 목격했다 해도 찾아내는 것도 어려운 노릇이다. 누군가가 사진으로라도 남겼으면 좋으련만, 이마저도 내 눈에 드는 게 쉽지 않은 일이다. 어쨌든 몇날을 현장에 나가 촬영하는 작업을 진행하면서 날이 추워 보이는 사람도 드물 뿐더러, 지나는 어르신을 만나면 묻기를 여러 차례하였지만 소득이 없었다.

그러다, 오늘에야 결정적 제보를 한 어르신 세 분 덕에 '말머리'의 위치를 거의(?) 알게 되었다. 지표가 되는 '말머리물'은 파괴되었지만 진입 계단과 일부 시설 잔해가 남아 있었고 위치도 확실했다.

말머리물 언덕에서 내려다 본 사진.시멘트로 시설한 잔해가 보인다. 사진 밖 오른쪽에도 내려가는 계단의 잔해가 있다.
말머리물언덕에서 내려다 본 사진.시멘트로 시설한 잔해가 보인다. 사진 밖 오른쪽에도 내려가는 계단의 잔해가 있다. ⓒ 이광진

그 왼쪽(서쪽)에 길게 뻗으면서 높이도 꽤 되는 것이 말머리인 것이었다. 물론 아직도 100% 확신은 서지 않는다. 왜냐하면, 말 그대로 '파괴되어' 말머리를 전혀 닮지 않았기 때문이다. 현재 도로가 놓인 자리에 말머리 형상이 용두암처럼 우뚝 솟아 있었을 것으로 상상할 수 있을 뿐이다.

말머리 추정 1 도로에 말머리 모양이 솟아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말머리 추정 1도로에 말머리 모양이 솟아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 이광진

말머리2 윗사진과 연결해서 보면 된다.
말머리2윗사진과 연결해서 보면 된다. ⓒ 이광진

말머리 3 바다에 닿은 부분이다. 윗 사진과 연결된 사진.
말머리 3바다에 닿은 부분이다. 윗 사진과 연결된 사진. ⓒ 이광진

이제 나름대로 결론을 맺어 볼 때이다. 물론 잠정적인 것이긴 하지만 말이다. <탐라순력도>에 나온 두 개의 용두암 가운데 하나는 '말머리'를 오해한 것으로 풀이된다. 이러한 오해는 '탐라10경도'의 그림을 참조하는 과정에서 두 개의 용두암이 표시된 것을 보고 나서 생겨났을 것이다. 용두암이 두 개라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다가 당시에 있던 '말머리'를 떠올려 바른 위치에 그려 놓고, 다만 전작의 예를 따라 '용두'라 칭하였을 것이다. 다만 <탐라십경도>의 두 용두암 가운데 뒤의 것이 오늘날 용두암이고, 앞의 것은 용두암보다 동쪽에 있는 기암을 그린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기암 용두암의 동쪽 바다에 뻗어 있다. 이 곳 언덕도 조망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 놓았다.
기암용두암의 동쪽 바다에 뻗어 있다. 이 곳 언덕도 조망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 놓았다. ⓒ 이광진


#제주도#용두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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