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춘이 지났으니 봄도 머지않았다.
제 아무리 동장군이 여전히 폭정을
펼친다손 쳐도 그 놈의 위세는 이미 꺾인 지 오래다.
계절의 순환 순리는 인생의 생로병사처럼 그 누구도 거스를 순 없는 때문이다,
오늘 아침엔 하루가 다르게 시어가는 김장김치를
해결할 목적으로, 또한 고기를 도통 안 먹었더니
기운도 없는 듯 하여 돼지고기 김치찌개를 만들어 먹기로 했다.
재래시장에 가서 쫄떼기로 돼지고기 반 근과 두부도 한 모를 샀다.
배추 신김치를 먼저 물을 약간 넣고 팔팔 끓인 뒤에
숨이 죽은 다음엔 물과 돼지고기를 넣어 더 끓였다.
이어 찧은 마늘과 대파 송송 썬 것, 그리고
고춧가루와 조미료에 더하여 두부도 넣었다.
돼지고기 특유의 냄새를 잡을 요량으론 후춧가루도 조금 뿌렸다.
당면으로 마무리를 했더라면 그야말로 화룡점정이었겠으나
불행하게도 당면은 어딜 갔는지 당최 안 보여 열외시켰다.
이렇게 만든 '쫄떼기살 김치찌개'를 먹자니
밥 한 그릇이 금세 비워지는 또 하나의 밥도둑이었다.
설날이 불과 일주일 앞으로 성큼 다가왔다.
매년 맞는 설날이긴 하되 설날이 되면 주머니가
헛헛한 나같은 서민은 되레 설날이 무섭다는 느낌으로 섬뜩하다.
설날은 추석과는 또 달라서 아이들에게 세뱃돈이라는 가외의 돈이 나가기 때문이다.
아무튼 아까 아침에 모처럼 돼지고기를 반 근을 사서
오자니 그 시절 어떤 '눈물의 돼지고기 반 근'이 떠올랐다.
아마 그 때도 지금처럼 설날을 얼마 안 남겨 둔 즈음이었을 것이다.
아버지께서 푸줏간에 가 돼지고기 반 근을 사오라고 하셨다.
아버지께선 돼지고기 불고기를 만들어 소주랑 드시길 즐기셨다.
그래서 나도 한 점 얻어먹을 요량으로
룰루랄라~ 동네의 푸줏간으로 가서 고기를 사 왔다.
아버지께서 요리를 시작하실 무렵 동네친구
녀석이 하나 찾아와 제기차기를 하자고 꼬드겼다.
"나가서 놀다 금방 올 게유."
"그래라."
하지만 제기차기에 이어 구슬 따먹기 놀이 삼매경에까지
빠지는 바람에 그만 땅거미가 질 무렵에야 집에 돌아올 수 있었다.
모처럼 맛 보신 돼지고기 때문이었으리라.
빈 소줏병 서너 개 너머로 아버지께선 이미 만취하시어
드르렁 코를 골며 주무시고 계셨기에 얼른 부엌으로 들어가 봤다.
그러나...!
아버지께선 '의리 없이' 그 맛난 돼지고기 불고기를
술과 함께 야금야금 다 드시곤 빈 냄비만 남겨 놓으셨다.
그래서 야속하고 서운하여 눈물이 났다.
그 때는 정말이지 돼지고기 반 근도 큰맘을
먹어야만 비로소 사 먹을 수 있던 시절이었다.
설날이 다가오니 다시금 선친의 모습이 그리워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