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 삼각의 돛

 

.. 아래를 보니 삼각의 돛을 단 배가 보인다. 고대 이집트의 배는 사각의 돛을 사용했기 때문에 이건 나중에 들어온 아라비아 풍의 배처럼 보였다 ..  <이케자와 나쓰키/노재영 옮김-문명의 산책자>(산책자,2009) 52쪽

 

"고대(古代) 이집트의 배는"은 "옛날 이집트 배는"이나 "지난날 이집트 배는"으로 다듬고, '사용(使用)했기'는 '썼기'나 '달았기'로 다듬습니다. "아라비아 풍(風)의 배처음"은 "아라비아 배처럼"이나 "아라비아사람 배처럼"으로 손봅니다.

 

 ┌ 삼각(三角)

 │  (1) 세 개의 각

 │   - 송 기사는 삼각 사다리에서 내려왔다

 │  (2) 세 개의 각이 있는 모양

 │  (3) [수학] = 삼각형

 │

 ├ 삼각의 돛을 단 배

 │→ 세모난 돛을 단 배

 │→ 세모진 돛을 단 배

 │→ 세모꼴 돛을 단 배

 └ …

 

우리한테는 돛을 단 배는 말 그대로 '돛단배'입니다. 그러나 퍽 많은 이들은 '돛단배'라 말하지 않습니다. 이 우리 말을 한자로 옮겨 '범선(帆船)'이라 말합니다. 이런 말씀씀이처럼 모가 셋인 무엇을 가리킬 때 '세모'라 하지 않고 '삼각(三角)'이라 하는 분들이 제법 많습니다. '네모'라 하지 않으며 '사각(四角)'이라 하고 맙니다.

 

이리하여 세모난 속옷을 입으면서 "세모 팬티"라 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삼각 팬티"일 뿐입니다. "네모 팬티"라 하는 사람 또한 없습니다. "사각 팬티"일 뿐입니다.

 

가만히 헤아려 보면, 초등학교 교과서뿐 아니라 중고등학교 교과서와 우리 둘레에서 '세모'와 '네모'가 사라진 지 꽤 되었습니다. 아니, 사라졌다기보다 '교과서를 엮'거나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대학교나 대학원을 마친 지식 있는 분들' 손과 입으로 우리 말을 밀어냈다고 해야 올바릅니다. '삼각형'과 '사각형'을 사랑하는 가운데, '동그라미'마저 '원(圓)'한테 잡아먹히게 했고, '둥근뿔'이 아닌 '원뿔'이라는 말을 쓰게 하면서, 이 나라 사람들이 어릴 때부터 말다운 말을 옳고 바르게 하지 못하도록 가로막는다고 해야 맞습니다.

 

 ┌ 삼각의 문 → 세모난 문 / 세모진 문

 ├ 삼각의 미 → 세모꼴 아름다움

 ├ 삼각편대 → 세모편대

 ├ 삼각관계 → 세모사이 / 세모꼴 사이

 └ …

 

인터넷에서는 '삼각'이 어떻게 쓰이는가 찾아봅니다. 다른 어느 자리보다 '삼각관계'라는 말마디가 많이 보입니다. 군대에서 쓰는 '삼각편대'를 여느 사람들이 제법 쓰기도 합니다. 토씨 '-의'를 붙이는 "삼각의 미"나 "삼각의 문" 같은 말투를 어렵잖이 찾아봅니다.

 

좋아하는 사람이 셋이며 넷이며 얽히고 뒤엉킨 모습을 '삼각관계'가 아닌 '세모사이'처럼 적으면 느낌이 어떻게 될까 궁금합니다. '네모사이'나 '다섯모사이'처럼 적으며 엇갈리고 뒤섞인 모습을 가리킬 수는 없는지 궁금합니다. 이렇게 적으면 너무 낯설까요. 이와 같이 말하면서 우리 삶을 나타내기는 몹시 힘들까요. 이런저런 말투를 우리 깜냥껏 가다듬거나 보듬을 수는 없는 노릇인가요.

 

김밥은 둥글게 말아서 먹습니다. 김밥을 놓고 '둥근김밥'이라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둥근김밥'과 '세모김밥'으로 나눌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우리가 하는 빨래를 놓고 '손빨래'라는 이름이 새로 붙고 '기계빨래(세탁기 빨래)'를 서로 나눌 수 있듯, 우리가 쓰는 글씨를 '손글씨'라고 따로 나누듯, '둥근김밥'을 말하고 '네모김밥'도 말할 수 있다고 느낍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편의점에서 사먹는 세모난 김밥한테는 '세모김밥'이라는 이름이 붙지 않습니다. '삼각김밥'이라는 이름이 붙습니다. 이렇게 김밥을 만든 일본에서 맨 처음에 '삼각-'을 붙였기 때문일까요?

 

요즈음도 파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라이스버거'라는 햄빵이 있습니다. 이 '라이스버거'는 밀로 빚은 빵이 아닌 쌀로 빚어서 사이에 햄을 넣었다고 해서 '라이스버거'인데, 이 녀석을 꽃등으로 만든 일본에서 '라이스버거'란 이름을 붙였고, 이를 고스란히 따온 우리 나라 사람들 또한 '라이스버거'라고 이름을 달았습니다. '쌀버거'니 '밥버거'니 하고 이름을 달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틀림없이 밥을 먹고 쌀을 먹지만, 밥도 쌀도 아닌 영어 '라이스(rice)'를 붙이고 말았어요.

 

 ┌ 세모김밥 / 밥버거, 쌀버거(밥빵, 쌀빵) (o)

 └ 삼각김밥 / 라이스버거 (x)

 

버뮤다 앞바다를 놓고 "버뮤다 삼각지대"라고 이야기합니다. 언제 누가 왜 이렇게 이름을 붙였는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다만, 우리들은 '삼각지대'라는 말마디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세모꼴 땅"이나 "세모땅"이라 하지 않고, "세모난 터"나 "세모자리"처럼 말할 생각조차 않습니다.

 

아무래도 이제 와서 '세모터'니 '세모자리'니 '세모땅'이니 하고 새이름을 붙이기는 어려우리라 봅니다. 그러나 우리는 왜 우리 깜냥껏 우리 말을 북돋우거나 보살피면서 우리 이름을 붙이려는 데에는 조금도 마음을 기울여 보지 않고 있을까요. 처음부터 낯익거나 알맞다고 느낄 낱말만 있겠습니까. 한 번 쓰고 두 번 쓰는 가운데 익숙하게 받아들이면서 스스럼없이 여기지, 대뜸 낯익을 수 없습니다. 한 번 먹고 두 번 먹는 동안 저절로 받아들이며 반가이 맞이하지, 난데없이 반가울 수 없습니다.

 

쓰려고 해야 알맞게 쓰는 말입니다. 쓰려고 애써야 올바르게 쓰는 말입니다. 쓰려고 마음을 바치고 힘을 들여야 아름답게 거듭나는 말입니다. 토박이말이든 한자말이든 영어이든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스스로 쓰려고 하는 말이 널리 퍼지고, 우리 스스로 더 좋아하며 더 기쁘게 맞아들이는 말이 우리 삶터를 가득 채웁니다. 우리가 바라는 대로 차츰차츰 이루어지며 달라지는 삶이요 생각이며 말입니다.

덧붙이는 글 | - 글쓴이 누리집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cafe.naver.com/hbooks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 글쓴이가 쓴 ‘우리 말 이야기’ 책으로,
<생각하는 글쓰기>가 있고,
<우리 말과 헌책방>이라는 1인잡지가 있습니다.


태그:#-의, #토씨 ‘-의’, #우리말, #한글, #국어순화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