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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수경을 비롯한 남북 합동 수사진 4명은 평양에서 상해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평양에서 상해까지는 1시간 반이면 갈 수 있는 거리였다. 목적지인 영파는 항주 남단 150km에 위치한 도시지만 항주 행 비행기가 주 2회밖에는 운항하지 않았다. 조수경은 이틀을 기다릴 수 없다고 판단했다. 마침 상해에서 영파까지 쾌속선이 운행된다고 했다. 쾌속선으로 5시간 정도 소요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상해 행 비행기에 오른 것이었다.

"어떻게 입을 열게 한 겁니까?"
"빌라도처럼, 너는 죄가 없다고 말했어."
"빌라도라고요?"
"그리고, 네가 유대인의 왕 그리스도냐고 물었지."

"그랬더니 뭐라고 하던가요?"
"'네 말이 맞다.'고 했어. 그러고는 턱을 쳐들어 나를 이윽히 보더군. 마치'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들을 위해 울어라.'라고 말하고 싶어 하는 듯했어."
"...?"

비행기가 정상 고도에 진입했다는 안내 방송을 들으며 조수경은 가방에서 용지를 꺼내 김인철에게 주었다. 아브라함으로부터 온 메일을 프린트한 것이었다.

수경, 김인철이 일러 준 소련파 허가이는 공적인 인물이었어. 북한 정권의 정상급 요직에 있었으니까 드러내 놓고 테러를 자행할 수가 없었지. 요컨대 수경이 찾고자 했던 인물은 아니었던 것이지. 물론 허가이를 정점으로 하는 북한 내 외세 결탁 세력은 오늘날까지 남북 화해와 민족 통일을 방해하는 극좌 세력으로 엄존하고 있지.

하지만 수경의 관심은 사건의 범인에 있었지 정치적인 데에 있었던 것은 아니지. 그러므로 수경은 맹인 장군 염동진이 이끌었던 남한의 비밀 테러 조직 백의사 같은 집단을 북한에서 찾으려 했던 것이지. 수경의 후배 김인철은 더 이상 수경에게 북한 테러 집단의 정보를 갖다 주지 못한 것 같아. 그것은 남한 사람으로서 북한의 자료에 접근하는 데 제약이 있었기 때문이겠지.

나는 지금부터 수경이 얻고자 했던 북한 비밀 테러 집단에 관한 얘기를 들려주려고 해. 흔히 사람들은 테러라고 하면 좌익보다는 우익이 더 많이 즐기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아. 우익이나 좌익이나 테러에는 오십보백보이지.

나는 극우와 극좌의 본질은 같다고 봐. 그들은 탐욕을 이데올로기로 위장하는 무지한 인간들이지. 그리고 무지는 교활을 낳는다는 말이 있어. 그들은 정신적 가치보다는 권력이나 물질을 추구하며 성찰이나 후회를 좀처럼 하지 않는 사람들이야. 따라서 그들에게는 슬픔이 없어. 그들은 기만을 명예롭게 생각하지. 그들은 남을 선동하여 공포 분위기를 조장하고 궁극에는 전쟁을 통하여 사리사욕을 채우는 자들이야.

사실 극좌나 극우에게는 이데올로기라는 게 없어. 그들의 이데올로기라는 것은 상황에 따라 이기적으로 변화하니까. 레닌이나 트로츠키에게는 정제된 이념이 있었지만 과연 스탈린에게 이념이라는 것이 있었을까? 극좌와 극우는 본질이 같으니까 야합도 잘 하는 거야. 부도덕한 검사와 변호사가 담합을 잘하듯이.

그런데 우익의 테러는 어느 정도 드러나지만 좌익의 그것은 철저히 감춰지는 속성이 있어. 좌익의 테러가 더 음습하기 때문이지. 좌익의 테러에는 소리가 없어. 그들은 총이나 폭탄보다는 기구나 약품을 더 많이 쓰니까. 김인철이 자료를 찾기 어려웠던 이유도 거기에 있었을 거야.

얼마 전 우리는 우크라이나 야당 대선 후보 빅토르 유시젠코의 얼굴을 신문이나 잡지에서 본 적이 있지. 유시젠코의 얼굴 피부가 어둡고 흉측하게 일그러져 있었어. 미남이었던 그가 프랑켄슈타인처럼 변형된 것은 독극물 테러 때문이었어. 그는 얼굴 변형이 나타나기 전 날, 우크라이나 보안국(SBU) 국장 이고르 스메쉬코와 저녁 식사를 함께 했지.

옛 소련에서는 정적 제거를 위한 테러로 독극물을 많이 사용했어. 그것은 소련 국가보안위원회(KGB)의 전공이었지. 비근한 예로 지난 2002년 대 러시아 테러가 자주 발생했던 체첸에서도 사우디아라비아 출생 군벌 카타브가 KGB의 후신인 러시아 연방비밀경찰(FSB)로부터 온 편지를 읽은 직후 사망한 일이 있었지. 그는 90년대 중반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맞섰던 사람이야. 그는 편지지에 발라져 있던 독극물 리신이 피부를 통해 침투하자마자 죽었어.

1978년 소련 출신으로 영국에 망명해 BBC 뉴스 해설가로 활동하던 게오르기 마르코프는 버스 정류장에서 한 행인의 우산 끝에 찰과상을 입었는데, 귀가 직후 고열과 구토 증세를 보이다가 사망했어. 물론 우산에 독이 발라져 있었던 것이지. 그들은 암살 대상의 자동차 손잡이에 치명적인 독극물 젤을 발라 놓는 방법도 많이 썼어.

러시아 작가 막심 고리기도 비밀경찰에게 독살 당했지. 2000년 9월 비밀 폭로를 전문으로 하는 온라인 매체 편집장 게오르기 곤가제는 키에프 외곽에서 시체로 발견되었어. 보리스 옐친 전 러시아 대통령도 1990년 길을 걷다가 괴한들에게 붙들려 모스크바 강물에 던져졌다가 운이 좋아 살아난 적이 있지.

최근의 것으로는 2005년 7월 KGB 간부의 비리를 조사하던 <노바다 가제타>의 부편집장 유리 슈첸코치킨이 갑작스러운 피부질환으로 사망했는데, 유족들은 다이옥신 중독에 의한 사망이라고 주장하고 있어.

이와 같이 비열하고 음험한 테러는 극좌 지도자라고 할 수 있는 스탈린이 유행시킨 것이지. 사실 남한 사람들은 사회주의자 또는 공산주의자라고 하면 다 같은 줄 아는 경향이 있어. 그래서 박헌영이나 김일성이나 허가이를 다르게 보지 않더군. 그것은 명백한 오해지.

남한으로 치면 박헌영은 김구, 김일성은 이승만, 허가이는 서재필 더하기 염동진 정도가 된다고나 할까? 소련의 레닌과 스탈린은 마치 운니지차(雲泥之差), 즉 구름과 진흙처럼 다른 사람이야. 레닌은 통찰력을 갖춘 이론가이고 10월혁명을 주도한 지도자지. 반면 스탈린은 레닌을 이용하여 득세한 테러리스트였어. 그에게 일관된 이론이란 전혀 없었지. 그는 언제나 다수, 강자의 편에 서서 정적들을 무자비하게 제거했어. 허가이는 이런 스탈린을 신봉한 북한 지도자였고 바로 이 허가이를 추종한 테러 세력이 오늘날 북한 강경파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지.

이제는 사건과 직접 관련될 수도 있는 이야기를 해야 할 차례군. 해방 정국의 북한에는 '진다이'란 자가 있었어. 진다이가 그의 본명인지 아니면 별명인지 확실하지 않아. 남한의 테러리스트 염동진은 맹인이었는데 북한의 진다이는 절름발이였어. 한국인들은 속어로 절름발이를'찐따'라고 하는데, 혹시 진다이라는 이름이 그 '찐따'를 활음(滑音)한 것인지 아닌지 나는 확실히 모르겠군.

아무튼 진다이는 극좌주의자였고 스탈린과 허가이를 숭상했으며 수많은 민족적 사회주의자를 살해한 사람이야. 그가 많이 취한 테러 방법은 독살이었고 다음으로는 니케핑이었지. 수경은 F.B.I.에서 교육 받을 때 니케핑(kneecaping)이라는 말을 들어 보았을 거야. 사람을 죽이지 않고 무릎이나 발목에 치명상을 입혀 불구로 만들어 버리는 방법이지.

이것은 극우주의자 무솔리니의 하수인들이 써먹던 방법을 배워다 쓴 것이지. 극좌와 극우는 서로 통한다는 내 가설을 입증하는 작은 사례라고 할 수 있어. 1970년대 이태리의 극좌 테러 집단 붉은여단(Red Brigade)에서도 이 방법을 많이 사용했어. 북한의 진다이는 자신이 어려서부터 가졌던 절름발이 콤플렉스를 그런 방식으로 보상 받으려 한 것이라는 해석도 있지.

이제 정리할까 해. 남한과 북한이 서로에 대해 가졌던 적대감과 공포심은 바로 맹인 염동진과 절름발이 진다이로 대표되는 극우·극좌주의자들이 만든 것이라고 봐. 이 둘은 각각 미국과 소련을 업고 발호했지. 만약 이런 자들이 없었더라면, 또는 그들에게 동의하는 우매한 군중이 없었더라면, 조국의 분단과 상잔 그리고 반세기를 넘는 대치 상황도 빚어지지 않았을 거야.

수경, 영어에 'should have p.p.'란 게 있잖아. 과거에 대한 유감을 표명할 때 사용하는 구문이지. 정말 염동진이나 진다이 같은 극우, 극좌는 과거에 없었어야 했어. 있었더라도 일찍이 제거되어야 했어. 그런데 그들이 제거되기는커녕 모처럼 남북이 화해하고 공존하려는 시점에까지 위력을 떨치고 있으니 그들을 잡아 죽이겠다는 것이 범인의 표면적 의도가 아닐까?

문제는 범인이 합리적이라는 데에 있지. 범인은 일련의 사건들이 낼 역효과까지를 모를 리가 없는 자라고 봐야지. 분명한 것은 남한의 살인범은 염동진 부류일 것이고 북한의 살인범은 진다이 부류일 거야. 그들이 야합한 거지. 그들은 언제나 역풍을 계산할 줄 아는 집단이었어. 그들의 의도대로 남한과 북한에서는 각각 북풍과 남풍이 불었어.

그런데 만약, 만약에 말이야. 그들이 체포되고 만행의 주모자가 바로 그들이었다는 것이 드러난다면 어떻게 될까? 그 가공할 살인 만행들이 반통일 세력의 자작극이었음이 백일하에 드러난다면 어떻게 될까? 그때 바람은 또 반대로 불겠지? 극좌· 극우주의자들이 설 땅을 잃을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우리 조국은 아주 평화로워질 거야.

수경의 어깨가 무거웠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지. 이 모든 것을 오랜 세월 동안 음모하고 기획한 옥상옥(屋上屋)의 범인은 존재할 수 없는 걸까? 국민을 기만하는 일이 극우와 극좌만의 전유물일까? 반세기 넘게 극우와 극좌에게 죽임 당한 유령들은 끝내 아무 일도 하지 않으리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나는 범행이 거듭될수록 자꾸만 이런 불길한 의문들이 꼬리를 물고 지펴지는 것을 막을 수 없었어. 아아, 가슴이 미어지는군. 오늘은 이만 줄일까 해.


태그:#극우, #극좌, #허가이, #진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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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과 평론을 주로 쓰며 '인간'에 초점을 맞추는 글쓰기를 추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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