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ㄱ. 대(大)

.. 대大내스테로스 압바가 한 제자와 함께 사막을 걸어가다가 용을 만났다 ..  《유시 노무라/이미림 옮김-사막의 지혜》(분도출판사,1985) 55쪽

옛날에도 오늘날에도, 사람들은 저마다 다니는 학교 이름 앞에다가 '大'라는 말을 넣어 '大 아무개 고등학교'처럼 말하는 버릇이 남아 있습니다. 나 스스로 '작다(小)'는 뜻에서 '小 아무개 고등학교'처럼 말하는 사람은 보지 못합니다. 나 스스로 내가 다닌 학교를 남 앞에서 자랑하거나 내세우지 않고 다소곳하게 낮추려는 사람은 만나지 못합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우리는 늘 남보다 나를 낮추면서 남을 섬긴다고 하는데, 정작 학교이름이니 회사이름이니, 게다가 나라이름이니 하는 자리에는 어줍잖게 '大'를 붙이고 있습니다.

학교 이름 앞에 '大'를 붙인다고, 크지 않던 학교가 커지지 않습니다. 학교 이름 앞에 '小'를 붙인다 한들, 작지 않던 학교가 작아지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이렇게라도 해서 무언가 더 커 보이고 싶고, 조금이나마 어깨를 펴고 싶었을까요.

 ┌ 대(大) : '큰, 위대한, 훌륭한, 범위가 넓은'의 뜻을 더하는 접두사
 │   - 대가족 / 대기자 / 대보름 / 대선배 / 대성공
 │
 ├ 대大내스테로스 압바
 │→ 큰 내스테로스 압바
 │→ 훌륭한 내스테로스 압바
 │→ 높으신 내스테로스 압바
 └ …

식구가 많으면 '큰식구(←대식구)'입니다. 오랫동안 현장을 누비는 기자로 일했다면 '큰기자(←대기자)'입니다. 보름 가운데 크게 보이는 보름달이라 하면 으레 '대보름'이라 하지만, '큰보름'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여느 선배보다 나이나 경험이나 학번이 위라면 '큰선배(←대선배)'입니다. 뜻을 이루었는데 아주 크게 빛을 보았다면 '큰성공(←대성공)'입니다.

 ┌ 높은 어른
 ├ 큰 어른
 ├ 훌륭한 어른
 ├ 하늘 같은 어른
 └ …

나라에서 잡아 놓은 맞춤법을 살펴보면, 우리들은 한자 앞가지 '大'만 붙이면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토박이말 '큰-'을 앞가지로는 못 삼도록 못박혀 있는 우리네 맞춤법입니다.

이 보기글에서는 '大'는 털고, 그때그때 알맞게 '높다-크다-훌륭하다-대단하다-좋다-반갑다-사랑스럽다-믿음직하다' 같은 낱말을 넣으면서 생각을 풀어낼 수 있습니다. '하늘 같은'이나 '바다 같은'처럼 꾸밈말을 넣어 볼 수 있습니다.

말을 말답게 차리도록 마음을 써 주면 됩니다. 글을 글답게 가꾸도록 생각을 기울여 주면 됩니다.

ㄴ. 유복(裕福)

.. 1945년 10월 조만식 선생의 문하를 떠나 38선 남쪽으로 내려온 그는 유복(裕福)한 생활이 보장된 서울살이에 대한 유혹과 욕망을 벗고 ..  《민충환 엮음-한흑구 문학선집》(아시아,2009) 14쪽

"조만식 선생의 문하(門下)를 떠나"는 "조만식 선생 곁을 떠나"로 다듬고, '생활(生活)'은 '삶'이나 '살림'으로 다듬습니다. '보장(保障)된'은 '주어진'이나 '마련된'으로 손보며, "서울살이에 대(對)한 유혹(誘惑)과 욕망(欲望)을 벗고"는 "서울살이라는 달콤한 손길과 꿈을 벗고"로 손봅니다.

 ┌ 유복(裕福) : 살림이 넉넉하다
 │   -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다 / 유복한 생활을 누리다
 │
 ├ 유복(裕福)한 생활이 보장된
 │→ 넉넉한 삶이 주어져 있는
 │→ 넉넉하게 살아갈 수 있는
 │→ 돈 걱정 없이 살 수 있는
 │→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 …

글쓰기를 즐겨하는 예전 사람이나 요즈음 사람이나, '먹고살 만한 형편'을 가리키는 '넉넉한 살림'을 두고, 으레 '유복'이라는 한자말을 빌어서 나타내곤 합니다. 있는 그대로 '넉넉하다'거나 '푸지다'거나 '괜찮다'거나 '살 만하다'거나 '좋다' 같은 말마디로 살림살이를 나타내는 일은 퍽 드뭅니다.

마치, 오늘날 사람들이 돈을 '돈'이라 안 하고 '화폐'니 '머니'니 '재화'니 '재물'이니 '펀드'니 '캐피털'이니 하고 읊는 모습하고 같다고 할 만합니다. 집을 '집'이라 하지 않고 '주거 공간'이나 '생활 공간'이라 하는 모습하고 닮았다고 할 만합니다. 일하는 곳을 '일터'라 하기보다 '직장'과 '사업장'과 '사무소' 같은 말마디로 나타내는 모습하고 비슷하다고 할 만합니다.

 ┌ 유복한 가정에서
 │
 │→ 넉넉한 집안에서
 │→ 잘사는 집에서
 │→ 돈 많은 집에서
 │→ 넉넉히 먹고사는 집에서
 │→ 살림이 넉넉한 집에서
 └ …

꾸밈없는 삶에서 꾸밈없는 말이 나옵니다. 꾸밈없는 생각에서 꾸밈없는 글을 쓸 바탕을 마련합니다. 그러니까, 우리 스스로 꾸밈있는 삶이라면, 겉을 꾸미고 얼굴을 꾸미고 모양새를 꾸미는 삶이라 한다면, 우리네 말과 글도 잔뜩 겉발리거나 겉꾸미는 말과 글이 될밖에 없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내세우거나 뽐내려는 삶이라 한다면, 우리 말과 글 또한 내세우거나 뽐내는 말과 글에서 허덕이고 맙니다.

스스럼없이 나누는 삶에서 스스럼없이 나누는 말과 글이 비롯합니다. 즐거이 어깨동무하는 삶에서 즐거이 주고받는 말과 글이 샘솟습니다. 많이 어설프고 어줍잖더라도 아름다움을 찾아서 받아들이려는 매무새일 때에는 삶이며 생각이며 말글이며 차츰차츰 아름다워지기 마련입니다.

 ┌ 유복한 생활을 누리다
 │
 │→ 넉넉한 삶을 누리다
 │→ 걱정없는 삶을 누리다
 │→ 배부른 삶을 누리다
 └ …

때때로 '한글은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글'이라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어쩌면 우리 글은 온누리에서 가장 뛰어난 글일는지 모릅니다. 다만, 우리 스스로 이 뛰어나다는 글을 뛰어남이 이어가도록 가꾸거나 돌보는 일이란 거의 없지만.

그러나 저는 달리 생각합니다. 우리 글이 온누리에서 가장 뛰어나다 할 수 없는 가운데, 나라밖 다른 겨레 글 또한 가장 뛰어난 글은 아니라고. 온누리 뭇겨레 글은 저마다 쓰임새가 다르고 아름다움이 다르다고. 우리는 우리 터전에서 살아가는 동안 우리 글이 우리한테 가장 알맞을 뿐이며, 우리한테 가장 알맞는 틀거리를 기쁘게 받아들이고 돌보면서 살아가면 넉넉하다고.

덧붙이는 글 | 글쓴이 누리집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cafe.naver.com/hbooks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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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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