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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 물결로 삭막했던 광화문 거리가 새로운 광장이 만들어지면서 다소 부드러워졌다. 바람 앞 촛불 같던 나라를 위기(危機)에서 구해내신 충무공 이순신 장군 곁에 세계 최고의 발명품인 한글의 창안자이자 성군(聖君)인 세종대왕이 새로 자리를 잡으시니 의미 또한 큰 공간(空間)이다.

광화문 글판 광화문 글판에 눈이 내렸다. 시인은 머뭇거리지도, 서성대지도 말고 눈송이처럼 '너'에게 가라 한다.
▲ 광화문 글판 광화문 글판에 눈이 내렸다. 시인은 머뭇거리지도, 서성대지도 말고 눈송이처럼 '너'에게 가라 한다.
ⓒ 강상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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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오자 그 한 모서리 광화문 글판에 새로 흩날리는 시(詩) 한 대목이 마음 설레게 한다.

눈송이처럼 너에게 가고 싶다
머뭇거리지 말고
서성대지 말고

마음으로 읽어도 좋다, 문정희 시인의 '겨울사랑' 한 구절. 그런데 광화문 거리에 서서 눈으로 입으로 또박또박 읽어보라. 살며 잊고 있었던 내 마음 속 시인(詩人)을 만나게 될 줄은 미처 몰랐을 터. 눈은 힘이 세다. 순결(純潔)이며 사랑이다. 눈송이 천지(天地)를 만나는 여러분 시인 모두에게 축하를 드린다.

토막해설-눈 설(雪)
 눈이 내리면 세상이 평온하다고 해서 안태(安泰)를 보듬은 글자로 대접 받는다.
눈이 오면 포근한 느낌이 든다. 상서럽다고 한다. 상서러울 서(瑞)자를 붙여 서설(瑞雪)이라는 말을 쓰기도 한다.
설중(雪中)이라는 단어는 설중매(梅) 설중송백(松柏) 설중사우(四友) 등으로 겨울의 아담(雅淡)한 풍물과 정취를 기리는데 쓰이는 관형어다. 설화(雪花)라고 아예 꽃으로 비유하기도 한다.
무지개 홍(虹)자 만큼이나 고운 이미지로 사랑받는 글자다.  물론 '수증기가 얼어서 내리는 것'과 같은 무미건조한 설명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눈 설(雪)자는 갑골문에서 비 우(雨)자 아래 깃 우(羽)자를 붙인 모습으로 그려졌는데 어떤 글자에서는 사이사이에 휘날리는 눈송이를 그려 넣기도 했다. 아예 雨자 없이 눈송이가 깃털처럼 내리는 모습을 그린 것도 있다. 한자가 의미 이전에 아름다운 자연현상에 접한 옛 사람들의 기쁨을 그린 그림인 줄을 다시 알겠다.

눈 雪자의 고문 '손으로 만질 수 있는 비[雨]?' 상서럽다는 이미지를 갖는 눈의 옛글자.(진태하 교수 書)
▲ 눈 雪자의 고문 '손으로 만질 수 있는 비[雨]?' 상서럽다는 이미지를 갖는 눈의 옛글자.(진태하 교수 書)
ⓒ 진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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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雨)자는 눈 뿐 아니라 구름, 안개, 벼락, 번개, 우박 따위 기상(氣象)과 연관되는 거의 모든 글자의 간판으로 쓰인다.

숫자 0을 나타내는 영(零)이나 구할 수(需)와 같이 날씨와 상관없는 글자도 있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零은 원래 비가 내려 (아래로) 떨어진다는 뜻에서, 需는 수염 기른 무당(巫堂)의 모습[而]과 합쳐져 (기우제 따위로 비를) 기다려 구한다는 뜻으로 인신(引伸)된 글자다. 雨자를 대하면 일단 날씨를 연상해도 된다.

전문(篆文)의 설(雪)자는 '비'라는 뜻을 나타내는 형부(形符) 즉 뜻 요소 글자 우(雨)와 소리 요소 글자 즉 성부(聲符)인 혜(彗)가 만나 이룬 형성자(形聲字)라고 풀이한다. 혜(彗)는 청소할 때 쓰는 비, 또는 꼬리별(혜성)을 뜻하는 글자다. 내리면 비로 쓸어내야 한다는 점을 이른 것일까?

눈 내리는 상태의 그림을 글자로 도안(圖案)하면서 기왕 만들어진 무성할 봉(丰)자 모양과 소 축(丑)자 비슷한 모양을 빌려 붙였다는 풀이도 있다. 글자 모두가 그림에서 비롯된 상형자라는 것이다.

나중에 봉(丰)자가 거듭된 부분이 떨어져 나가 현재 쓰이는 해서체 글자가 됐다는 얘기다. 또는 해서체 글씨[雪]만을 풀어 '손으로 만질 수 있는 비[雨]'라고 풀기도 한다. 축(丑) 모양 글자를 손을 의미하는 우(又)자의 옛 글자로 본 것이다.

제설(諸說)이 분분(紛紛)한 것이 마치 눈이 분분(雰雰)하게 내리는 것 마냥 어지럽다. 그러나 무엇이 맞고, 무엇이 그른지를 따지는 것은 별로 큰 의미가 없어 보인다. 이 글자가 거쳐 온 기나 긴 세월의 두터운 더께를 실감하는 것으로 이런 분분한 '이론(理論)'들은 충분히 의미가 있겠다.

어른들 중에는 펄펄 눈 내리는 모양 보면서 혀를 차는 모습도 없지 않다. "저 눈이 올 때 이쁘게 내린 것 마냥 갈 때도 곱게만 간다면..."하기도 하고, 길 막힐 것을 저어하는 '실용주의'도 있을 것이다.

자연의 모습에 의미 없는 것이란 없다. 대자연이 연출하는 큰 쇼인 설경(雪景)을 보며 그런 생각을 먼저 떠올리는 분이라면, 눈 지그시 감고  '아이는 어른의 아버지'라고 했던 워즈워드의 시구(詩句)를 떠올릴 일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시민사회신문 예지서원 홈페이지(www.yejiseowon.com)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필자는 이 신문의 논설주간으로 한자교육원 예지서원의 원장 직을 겸임하고 있습니다.



#눈#눈송이#눈사람#첫눈#겨울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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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등에서 일했던 언론인으로 생명문화를 공부하고, 대학 등에서 언론과 어문 관련 강의를 합니다. 이런 과정에서 얻은 생각을 여러 분들과 나누기 위해 신문 등에 글을 씁니다. (사)우리글진흥원 원장 직책을 맡고 있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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