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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숙에 대한 몇가지 인상

 한명숙 전 총리
한명숙 전 총리 ⓒ 남소연
1999년 세모였다. 지금으로부터 딱 10년 전이었다. 몹시 추운 날이었다. 맨살을 드러낸 나목의 잔가지 사이로 채찍처럼 삭풍이 휘감기며 음산한 소리를 냈다.

나는 여의도의 한 커피숍에서 한명숙을 만났다. 그녀는 참여연대 공동대표로 일하다가 미국에 가 체류중이었는데 때마침 김대중 대통령의 '젊은피 수혈론'에 강제로 이끌리다시피 귀국했다. 그리고 새천년민주당에 입당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그날 나눈 대화의 내용보다 아직까지 나의 뇌리에 깊이 남아있는 잔상은 한명숙이 입고 있었던 남루한 코트에 관한 슬픈 기억이다. 마침 동행했던 한 여성의원의 화려한 차림새와 대비되었던 탓이었을까? 송구한 비유이나 그날 한명숙이 입었던 낡은 감색 누비옷은 겨울에 군고구마 장수가 즐겨입는 저렴하고 보온성 좋은 품목이었다.

나는 이야기를 나누는 내내 그녀의 차림새를 눈여겨 보았다. 또랑한 목소리, 품격있는 자태가 아니라면 어느 누가 그녀를 후일의 첫 여성 국무총리로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난 그녀의 지나치다 싶을만큼 검소한 차림새가 솔직히 말해 민망하고 속상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그런 한명숙의 모습이 자꾸 떠오르면서 무척 슬퍼졌다. 민주화운동은 공동선을 추구하는 순결한 행위인데 왜 모두 그토록 가난해야만 할까?

그 얼마 후에 나는 일산의 나와 같은 동네에 살고 있는 그녀의 아파트에 들른 적이 있었다. 물론 전셋집이었다. 인조가죽 소파를 비롯한 식탁 등 가재도구들을 주욱 가리키며 그녀가 말했다.

"이거 모두 합해 1백만원 주었어."

그러면서 살림살이 장만에 통크게 인심 좀 썼다싶은 표정으로 여유롭게 웃었다.

2000년 4월 총선에서 국회의원이 된 직후에 다시 그녀의 집으로 갈 기회가 있었다. 그때 한명숙은 형제들이 있는 목동으로 이사가 있었는데 두말할 나위없이 그때도 전셋집이었다. 동행한 여성단체 임원과 나에게 주려고 그녀는 핸드백 안에서 주섬주섬 샌드위치 봉지를 꺼냈다. 약속장소였던 호텔커피숍에서 나온 것이었는데 먹지않고 그냥 두면 버릴 것 같아서 싸왔다는 거였다. 시간이 네다섯시경이어서 그런지 우리는 맛있게 먹었다.

한명숙은 그날 우리 둘에게 손수 저녁을 차려주었다. 된장찌개, 김치, 가재미 구운 것 딱 세 가지 반찬이었다. 그래도 참 맛있었다. 그집의 식기, 가스레인지 등 주방용품은 그저 더도덜도 아닌 이 땅 서민들의 가장 평범한 그 모습이었다.

얼마 후에 그녀는 첫 출범한 여성부의 장관이 되었다. 그 때 나는 비록 크리스챤은 아니지만 진정 '가장 뒤처진 자를 앞세우는' 성서적 기적이 이런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민주화가 선사한 꿈같은 일이었다.

민주화 운동과 관련해서도 여러 기억이 있지만 유독 나의 뇌리에 또렷이 박힌 한명숙은 이렇게 슬프리만큼 가난하고 검소한 모습이다. 물론 각종 모임의 사회를 보거나 일을 추진하는 그녀의 모습은 대체로 단호하고 민첩하다.

한명숙은 간혹 자신이 '통일 문제에서 쓰레기 문제까지' 참여하는 전천후 여성사업을 한다며 그 분주함과 번잡함을 토로하곤 했다. 이렇게 공익활동에만 전념했던 그녀는 불과 두어해 전에야 일산 변두리에 집을 장만했다고 들었다.

그 숱한 일들 중에서 유독 위의 기억이 또렷한 것은 몸에 밴 듯한 그녀의 가난과 검소함이 왠지 나를 무척 쓸쓸하게 했기 때문일 것이다.

검찰의 추잡한 '인격살인'

국민을 대리해 국가권력을 집행하는 집단이 타락하면 어떻게 될까? 그 몸서리치는 모습을 우리는 지난 군사정권 시절에 무수히 보아왔다. 일례로 경찰이 참고인으로 데려간 박종철은 고문살해 당했다. 박종철 사건은 '역사는 우연을 통해 필연을 관철한다'는 걸 입증했다. 박종철 이전에도 수많은 박종철이 있었다. '의문사'로 불리는 무수한 청년들의 죽음이 있었던 것이다.

'사회의 목탁', '무관의 제왕'이어야 할 언론이 정권의 나팔수로 전락하면 어찌 될까? 역시 그 참상을 전두환 정권 때 신물나게 거듭거듭 목격해온 터이다.

법무부의 영어 표기를 보면, 정의를 구현하는 부서이다.

그런데 이 정의를 구현하는 부서에서 참으로 소름끼치는 일이 많이 일어났다. 그저 평화통일에 대한 내심의 소망을 가지고 있다 하여 이른바 '인혁당 사건' 연루자들은 온갖 흉악무도한 고문 수사를 받았고, 8명이 결국 처형되었다. 그래서 외국의 학자들은 이를 일찍부터 '사법살인'이라 명명했다. 이 뿐이랴. 비슷한 일이 참 많이도 줄을 이었다.

무고한 어부들이 하루 아침에 간첩으로 둔갑하고, '유신 왕조'에 반대하는 대학생들은 북한의 사주를 받은 집단으로 매도당했다. 진실은 지하갱도에 매몰되어 버리고 검은 석탄 녹은 시커멓고 찐득한 물이 콸콸거리며 세상을 적시게 되는 것이다.

한 세대 흐른 후에야 국가가 이를 밝혀낸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한 가지 위안이 있다면 '진실은 힘이 세다'는 교훈을 얻었다는 것이다. 이나마도 이 진실을 천신만고 끝에 밝혀 낸 것은 민주정부 10년이 존재했기에 가능했다. 그리고 이제 그런 일들은 희미한 추억으로 사라져 가는가 보다라고 생각했다. 마치 홀로코스트의 유적들처럼 빛바래가는 역사의 흔적인양 생각했다.

그런데 돌연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충격과 만났다.

15일 저녁 한명숙에 대한 정치공작분쇄를 위한 명동집회에 다녀왔다. 실로 20년 만에 청바지에 운동화 차림으로 반정부 집회에 참석한 것이다. 올 들어 가장 매서운 추위 속에서 오랜만에 '님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고 구호를 외쳤다. 그런데 어느 순간,  날카로운 전율이 온 몸을 찌르면서 흘렀다.

아, 너무나 똑같은 풍경이었다. 낡은 사진첩 속에 정물화처럼 고정되어있던 어떤 풍경이 뇌리를 덮쳤다. 너무 똑같았다.

그날은 1986년 7월 19일이었다. 당시의 야당인 민주당과 재야세력이 연대하여 '부천서 성고문사건 규탄대회'를 하던 바로 그 자리였다. 그 때 검찰은 엄연히 존재했던 진실을 권인숙이 꾸며낸 거짓말로 매도했다. 그러면서 민주화운동 세력을 '혁명을 위해 성적수치심까지 팔아먹는' 거짓말쟁이집단으로 선전했다. 물론 검찰의 이 뒤집혀버린 거짓말을 이른바 '언론'들은 토씨 하나 빠뜨리지 않고 앵무새처럼 받아 적었다.

그때 우리에겐 <한겨레>도 <오마이뉴스>도 없었다. 바로 엊그제 1990년 12월 12일에 43세로 요절한 조영래 변호사가 작성한 고발장이 유일한 수단이었다. 이는 삽시에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그것만으로 우리는 소수에게나마 진실을 알릴 수 있었다.

타락한 검찰이 아니었더라면 그 '짐승의 시간'을 자행한 범죄자 문귀동이 적반하장으로 권인숙을 무고와 명예훼손으로 맞고소할 수 있었을까? 나는 그때 검찰이 진실을 '알고도 외면'했다고 본다. 그때 권 양이 말한 모든 것은 있었던 일 그대로이며 한치의 거짓 없는 진실이었다. 천인공로할 추악한 성고문 만행의 진상은 이후에 조영래의 예언대로 드러났다. '그 관련자들이 남김없이 의법처단되기 전까지 이 나라의 모든 국민과 산천초목까지 결코 잠잠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날 오뉴월 불볕 더위 아래 경찰과 시민들사이에는 치열한 공방이 거듭되었고 명동 일대는 최루탄 안개에 휩싸였다. 바로 전쟁터였다.

이럼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검찰은 문귀동에 대해 불기소 결정을 내렸다. 보다보다 못해 오죽하면 보수적인 '대한변협'이 나섰겠는가. 변협은 '검찰의 기소독점주의 남용을 견제하고 수사권력에 의한 고질적 인권침해를 근절하기 위해' 변호사 166인으로 재정신청 대리인단을 구성해 법원에 재정신청을 냈다.

이를 심리한 당시 서울고법은 10월 31일 신속히 '이유없다'며 기각했다. 이 기각결정문은 후일 두고두고 조롱거리가 될 것이다. 문귀동의 성고문 사실을 그대로 적시하고 이를 대부분 인정하면서도 이를 목격한 증인이 없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검찰의 문귀동 불기소는 정당하다는 것이었다. 세상에나! 동서고금 어디에 증인을 옆에 두고 저지르는 고문 범죄가 있다던가!

이 사건의 진실이 백일 하에 낱낱이 밝혀지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조영래의 절규대로 '진실을 왜곡하고 은폐하려 들었던 모든 어리석고 비겁한 책동은 남김없이 타파'되었다. 왜냐하면 87년 6월민주항쟁이 있었기 때문이다. 문귀동은 89년 6월 사건발생 3년만에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

이는 22살 여성이 폭력적 정치권력의 전체계와 정면으로 대결해 결국 승리한 사건이다. 이 과정에서 부도덕한 권력의 속살은 남김없이 그 치부를 드러내었다. 권력의 수족으로 전락한 검찰과 경찰, 이들을 조종하는 정체불명의 공안회의, 당근에 순치된 언론, 불의한 권력 앞에 한없이 나약한 사법부 등등.

23년 지난 오늘에 묻노니, 그때 이 치욕의 당사자들 중에 스스로 반성한 이가 과연 있느뇨? 그러나 이 모든 불의가 법치의 이름으로 횡행할 수 있었던 토양은 바로 다름아닌 '관제언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오늘 검찰은 다시 그때처럼 공공연하게 '인격살인'을 저지르고 있다. 세월이 흘러 이번에는 전직 국무총리가 그 대상이다. 전직 대통령을 죽음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그 경로와 매우 비슷하다. 보통의 사건에서도 피의사실 사전 공표는 엄연한 위법이다.

나는 한명숙 전 총리가 진실을 말하고 있다고 믿는다. 이것은 오래된 믿음이다. 또한 시민사회 원로 여러분들의 믿음이기도 하다. 할 수만 있다면 그녀의 전재산 상황을 알리고 싶다. 총리를 지낸 그녀의 집과 그 살림살이를 공개하고 싶다.

한명숙은 검소하고 청렴하며 정직한 사람이다. 검찰은 왜 하필이면 그녀를 택했을까? 앞으로 이 사태가 어찌 전개될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그러나 오직 한가지는 확실하다.
진실은 힘이 세다. 지하동굴에 깊이 파묻어도 스스로의 생명력으로 자란다. 어느날 햇볕이 들면 기적처럼 지상으로 솟구쳐 오른다. 이는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민주주의, 자칫 깨지기 쉬운 유리그릇

 15일 저녁 서울 명동 유네스코회관앞에서 열린 '한명숙 전 총리에 대한 정치공작분쇄 및 검찰개혁 범민주세력 규탄대회'에서 정세균 민주당 대표, 이해찬 전 총리, 유시민·김근태·이재정 전 장관을 비롯해서 전현직 의원과 시민단체 회원들이 '조선일보 아웃' '공작정치 아웃' '정치검찰 아웃' 구호가 적힌 손피켓을 흔들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15일 저녁 서울 명동 유네스코회관앞에서 열린 '한명숙 전 총리에 대한 정치공작분쇄 및 검찰개혁 범민주세력 규탄대회'에서 정세균 민주당 대표, 이해찬 전 총리, 유시민·김근태·이재정 전 장관을 비롯해서 전현직 의원과 시민단체 회원들이 '조선일보 아웃' '공작정치 아웃' '정치검찰 아웃' 구호가 적힌 손피켓을 흔들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 권우성

명동 집회를 마치고 귀가하는 길은 몹시 추웠다. 23년 그해 여름에 최루탄 때문에 물집이 땀띠처럼 솟던 팔에 오늘은 날선 추위로 인해 오소소하게 소름이 돋았다.

민주주의가 피흘리던 그 자리는 상전벽해처럼 변했다. 정치권력 또한 그때처럼 흉악무도하지는 않다. 어쨌든 합법적으로 국민이 선택한 정부이기에 무턱대고 부정하기도 어렵다. 다만 국민은 5년간에 한해서 권력을 위임했을 뿐이다.

지난 민주정부 10년 동안에 우리는 착각했는지 모른다. 이제, 그 누구도 군사정권과 같은 시절의 일은 되풀이 되지 않을 것이라 막연히 확신했다. 그러나 그것은 안이한 착각이었음을 뼈아프게 각성한다.

23년 그때 성고문 사건을 다루던 검찰의 습벽은 변하지 않았다. 공동체의 미래를 번민하면서 자기희생을 감내한 대학생을 향해 퍼붓던 융단 폭격은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었다. 지금와서 돌아보면 국제사회에 문명국가로서 차마 보여주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한명숙의 진실 역시 언젠가 드러날 것이다. 정연주 KBS 전 사장의 진실이 무죄로 드러나는데는 불과 1년이 걸리지 않았다.

민주주의는 문명을 창조한 인류가 고안해 낸 제도 가운데 가장 합리적이고 이상적인 것이다. 개인의 자유와 권리와 존엄을 구현하는 데 가장 최상의 제도이다. 그러나 이 아름다운 제도는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값을 치러야 구성원 모두가 그 혜택을 누릴 수 있다.

민주주의는 자칫하면 깨지기 쉬운 유리그릇과 같다. 그것이 지속되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을 요구한다. '시민'이 늘 깨어나 있어야 하고, 검찰과 사법부가 정치권력으로부터 분립해 인권의 최후 파수꾼 역할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언론이 '사회의 목탁' '무관의 제왕'으로 기능해야 한다. 이 중에 어느 한가지라도 부족하면 휘청거리면서 쓰러진다. 순식간에 유리그릇처럼 바스라질 수 있다.

지구상의 어느 민주국가에서 전직 대통령을 죽음으로 내모는 곳이 있단 말인가. 이는 필요충분조건에 결함이 생기는 잠깐 사이에 발생한 일이다.

나는 오늘 23년 전 민주주의가 피흘리며 쓰러진 그 명동에서 '희미한 옛살인의 그림자'를 어렴풋이 다시 보았다. 김광규 시인의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처럼 그것은 어둡고 쓸쓸하게 다가왔다.

민주주의에 한해서만은 정치와 관련없는 '그 무엇'은 없다. 지금 우리들에게 다시 필요한 것은 23년 전 그날과 같은 '의로운 분노'이다. '중년의 건강' '월급과 물가' '바뀐 주소'만큼만 민주주의를 챙긴다면 검찰이 언젠가는 '인격살인'을 저지르는 것이 아니라 국민 개개인의 인권을 지키는 보루 역할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기 위해 필요한 분노는 '거룩한 분노'이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유시춘은 전 국가인권위 상임위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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