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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00, 경기고등학교. 손00, 영동고등학교. 신00, 서울고등학교. 최00, 상문고등학교…."

1987년 2월, 중학교 졸업을 앞두고 진학할 고등학교가 정해졌다. 친구들은 선생님이 호명하는 고등학교에 따라 희비가 엇갈렸다. 많이 들어본 고등학교들? 그렇다. 고위공직자들이 청문회 때 통과의례(?)처럼 일삼았다시피 '위장전입' 등을 감수하고서라도 자녀들을 들여보내려던 서울 강남  8학군의 고등학교들이다.

서울의 고등학교 진학은 각 학군 내에 주거하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정해졌다. 자율배정으로 일명 '뺑뺑이'라 불린 추첨방식이었다. 그렇다면 나는 어느 고등학교…?

"최육상, 강남고등학교."

선생님의 입에서 듣도 보도 못한 "강남고등학교"가 불렸다. 의아했지만 그 땐 강남 지역에도 새로 생긴 학교가 몇몇 있었기에 나는 강남 어딘가에 있는 신생 고교려니 생각했다. 하지만 진학 배정서(뭔지 기억나지 않지만 학교이름이 적힌 무언가를 받았었다)를 받아본 순간, 나는 탄식했다.

"맙소사! '강남'인 줄 알았더니 '광남'이었네. 대체 어디에 있는 학교야?"

서울 고교선택제 현재 서울의 중3학생들은 자신이 원하는 일반고등학교를 선택해 지원하는 고교선택제를 해야 한다. 수많은 고등학교들 중에서 과연 어떤 기준으로 선택할 것인지 궁금하다.
서울 고교선택제현재 서울의 중3학생들은 자신이 원하는 일반고등학교를 선택해 지원하는 고교선택제를 해야 한다. 수많은 고등학교들 중에서 과연 어떤 기준으로 선택할 것인지 궁금하다. ⓒ 진학사

중학교에서 홀로 강남 아닌 광남으로 진학했던 기억

친구들과 달리 나의 고등학교는 강남을 벗어났다. 중학교 3학년 초 무렵, 살던 집이 강남구에서 강동구로 이사를 한 까닭이었다. 학군 내에 주거해야 한다는 상급학교 진학 조건을 하필이면 고등학교 배정을 1년 정도 앞두고 어긴 것이다.

집안 사정 때문에 이사하기는 했지만, 주소지까지 곧이곧대로 옮긴 것을 보면 우리 부모님의 교육열은 그리 과하진 않았던 것 같다. 당시에는 강남 8학군의 고등학교를 보내기 위한 치맛바람 등이 가히 미친 열풍과 다름없을 때였는데.

1년만 더 강남에 살았더라면…, 그 땐 강남 지역에서 고등학교를 다니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이름이 알려진 학교에서 공부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고등학교 입학 첫 날부터 아는 친구가 한 명도 없다는 당혹스러움이 더욱 컸다. 감수성이 예민하던 시기 낯선 학교에서, 친분을 과시하는 친구들을 본다는 건 부러움 그 자체였다.

아무튼 중3 시절 전학도 안 가고 1년 내내 강동구와 강남구를 오가며 매일 2시간씩 버스 타고 등하교를 한 나의 고생은 결국, 우리 중학교에서 홀로 '강남' 아닌 '광남'에 진학하는 것으로 끝났다.

총 4번에 걸쳐 원하는 학교를 선택할 수 있다는 고교선택제

고교 진학의 기억을 떠올린 건, 최근 서울 지역의 '고교선택제'를 접하고 나서다. 서울시교육청이 2010학년도부터 시행하는 고교선택제의 요지는 현재 중3 학생들에게 총 4번에 걸쳐 고등학교를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는 것이다.

고교선택제는, 외국어고·과학고·국제고 등 각 학교 별로 정해진 전형에 따라 학생들을 먼저 선발하는 '전기'를 마친 뒤, 일반고를 놓고 학생들을 선발하는 '후기' 전형으로 총 3단계에 걸쳐서 진행된다.

1단계, 서울 전역에서 2곳의 학교를 선택하면 추첨을 통해 학교 정원의 20%를 선발. 단, 서울 중부 학군은 60%를 선발.
2단계, 거주지 학군에서 2곳의 학교를 선택하면 추첨을 통해 40%를 선발.
3단계, 거주지와 인접 학군을 합친 통합학군에서 추첨을 통해 40%를 강제 배정.

고교선택제와 관련해 중3 학생들을 대상으로 모의배정을 했던 결과를 서울시교육청이 지난 11월 3일 발표한 것을 보면 81.5%가 자신이 희망하는 고교에 배정됐다고 나타났다. 즉, 18.5%는 자신이 원하지 않는 학교로 강제 배정됐다는 것이다.

고교선택제는 오는 12월 15일~17일 원서접수를 시작으로 내년 2월 최종합격자 발표까지 단계별로 진행된다. 잘 선택하고 운까지 따라줄 경우 강북에 살면서 강남에 있는 고등학교에 진학하는 것이나 그 반대의 경우도 가능하다. 그런 점에서 고등학교를 선택해서 갈 수 있다는 것은 학생들과 학부모들에게 많은 기회를 제공하는 것처럼 보인다.

"위장전입 안하고 정당하게 강남 가려는 윗분들의 의도인가"

그러나 과연 그럴까. 누리꾼들의 의견을 들어보자.

"고교선택제 왜 하는지 모르겠어요. 제가 사는 곳은 강남인데 그냥 예전처럼 하면 좋은 학교에 얼마든지 갈 수 있는데."(네이버, 마가렛)

"이 제도 이해안가요. 너무 복잡함 ㅋㅋ 위장전입 안하고 정당하게 강남가려는 윗분들의 의도인가."(다음, 흠냐)

고교선택제 홍보 서울 도봉구에 위치한 한 고등학교가 지하철 1호선에 내건 학교 광고. 고교선택제에 따라 각 고교들은 생존을 위한 몸살을 앓고 있다. 휴대전화 카메라로 찍어 잘 보이진 않지만, 가운데 표에는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로 시작되는 대학별 합격자 수가 그대로 드러나 있다. 이 광고는 도봉구청이 관내 고등학교들을 홍보하느라 제작, 지원했다고 한다.
고교선택제 홍보서울 도봉구에 위치한 한 고등학교가 지하철 1호선에 내건 학교 광고. 고교선택제에 따라 각 고교들은 생존을 위한 몸살을 앓고 있다. 휴대전화 카메라로 찍어 잘 보이진 않지만, 가운데 표에는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로 시작되는 대학별 합격자 수가 그대로 드러나 있다. 이 광고는 도봉구청이 관내 고등학교들을 홍보하느라 제작, 지원했다고 한다. ⓒ 최육상

앞서 친구들과 나의 고등학교를 실명을 들어 장황하게 이야기했던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다. 평준화 지역인 서울에서는 일반고의 경우 사는 곳을 바탕으로 고교 배정이 이뤄지는 게 마땅하다는 생각 때문이다. 즉, 고등학교를 선택하기는 하는데 집에서 가까운 곳으로 선택하는 것이 자연스러워야 한다는 생각이다.

지금처럼 학교끼리 무한 경쟁을 시키는 것은 학교의 주인인 학생들을 더욱 힘들게 만드는 것이다. 고교선택제를 대비한다며 지하철에 고등학교 광고물이 걸리질 않나, 학교 출신 유명인을 동원해 홍보영상물을 만들질 않나, 각종 홍보물 제작에 강당인지 체육관인지 후다닥 만들질 않나… 지금 고등학교는 고교선택제로 몸살을 앓고 있다.

지금이야 추억이 됐지만, 현재 서울 광진구에 위치한 광남고를 다니던 나는 공사 소음과 씨름하며 공부해야 했다. 입학할 때의 4층짜리 일자형 건물이 졸업할 땐 디귿자형 건물로 확장됐으니 말 다했다. 체육시간마다 운동장에 널린 돌들을 줍던 건 또 어떻고…. 또한 2회 입학생이던 나는 학연을 꼽을 때 제일 먼저 내세우는 고등학교 선배들도 몇 명 없다.

따지고 보면 모든 교육 환경과 여건이 친구들이 다닌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강남의 학교들과는 비교조차 안 되는 열악한 학교였다. 당시에는 이런 교육 환경이 몹시 싫었던 것도 사실이다. 전통은 어쩔 수 없었다하더라도 특히 교정과 휴식 공간이 드넓은 친구들의 학교는 정말 부러웠었다.

고교별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합격자 수 노출... 서열화 전쟁 시작

모교는 어느덧 20회 이상의 졸업생들을 배출했다. 이젠 나름의 역사를 지닌 고등학교로 변모했고, 많은 졸업생들이 생긴 만큼 학교의 평판도 좋아졌다는 소식도 들린다.

그러나 당시에 지금과 같은 고교선택제가 시행됐었다면 나의 모교는 어쩔 수 없이 강제 배정된 학생들로 가득 차 있었을 것이다. 또한 학생들 말로 하면 '저 학교는 똥통 학교다'는 비아냥거림을 들었을 것도 분명하다. 한창 예민한 시기에 원치 않는 고교 배정 때문에 학생들은 큰 상처를 입은 채 학교를 다녀야 했을 지도 모른다.

서울 고교선택제 서울의 수많은 고등학교들의 정보는 몇 번의 클릭으로 알 수 있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고교별 서울대 입학자 수를 필두로 연세대, 고려대 합격자 수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는 것이다. 과연 중3 학생들은 고교 선택의 기준을 어디에 두고 있을까. 한 사설입시학원이 제공하는 고등학교별 정보.
서울 고교선택제서울의 수많은 고등학교들의 정보는 몇 번의 클릭으로 알 수 있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고교별 서울대 입학자 수를 필두로 연세대, 고려대 합격자 수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는 것이다. 과연 중3 학생들은 고교 선택의 기준을 어디에 두고 있을까. 한 사설입시학원이 제공하는 고등학교별 정보. ⓒ 진학사

현재 고교선택제 모의배정 결과는 명문대 진학률이 높다는 등의 이유로 '인기 고등학교' 순서대로 세울 수 있다는 걱정을 하게 만든다. 자신이 다니는 고등학교의 지원경쟁률을 친구의 학교와 비교해볼지도 모른다. 만에 하나 경기고 20대 1, 광남고 0.8대 1 같은 결과라도 공개된다면 어느 학교 학생들이 상처를 입겠는가.

입시 경쟁에 놓인 우리나라의 교육현실에서는 고등학교 선택의 자유라는 건 곧 학교 간의 차별과 학생 간의 차별을 의미한다. 그 차별은 학교의 서열화를 더욱 눈에 도드라지게 할 것이고.

그런데 이미 고등학교의 서열화 전쟁은 시작됐다. 사설 입시학원이 제공하는 홈페이지에 접속하는 순간 서울 지역 모든 일반고의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입학자 수는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그 외 참고할 만한 학교의 정보라곤 재학생 수와 연혁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SKY는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를 가리키며 대학 서열화의 최고정점에 자리하는 단어가 됐다. 그런데 이제는 대학 서열화를 넘어 서울 지역의 고등학교 서열을 이르는 단어도 될 듯싶다. 서울고, 경기고, 영동고… 이런 식으로 말이다.

부디 꿈 많은 16살 청춘들에게 고교선택제라는 선택 아닌 선택을 강요하며 서울의 고등학교를 한 줄로 세우는 쓸 데 없는 능력을 갖게 하지 말기를 바란다.


#고교선택제#서울시 고등학교#고등학교 진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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