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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회루, 그보다 수정전

경복궁을 관람하다 보면 사람들의 발길과 시선이 가장 많이 머무는 두 곳을 발견하게 된다. 법전인 근정전(勤政殿) 영역과 경회루(慶會樓)가 그렇다. 웅장함과 아름다움을 자랑하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사람들은 경회루를 보고 난 뒤 그것으로 경복궁의 관람을 마감하거나 다른 곳으로 이동하기 일쑤다. 그 남쪽에 있는 수정전(修政殿)에는 눈길을 잘 주지 않는다. 그러나 역사의 숨결을 따라 우리 궁궐을 살펴보는 나 같은 사람의 눈에 이곳은 결코 지나칠 수 없다.

우선 건물 자체의 모습이 예사롭지 않다. 현판 이름에 '정'(政)과 '전'(殿)이 들어간다. 건물의 규모는 작으나 그 칸수는 앞면 열 칸, 옆면 네 칸, 무려 마흔 칸이다. 칸수로만 따지면 대전인 강녕전(康寧殿) 다음으로 많다. 거기에 월대(月臺)까지 갖추고 있다. 분명히 국왕이 머무른 곳이며, 그것도 정치적인 공간으로 쓰였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 건물만이 덩그러니 있었을 리 없다. 경복궁의 도면인 <북궐도형>(北闕圖形)을 보면 이를 확인할 수 있으며, 실제로 행각과 연결되었다는 흔적도 수정전에서 직접 찾을 수 있다.

수정전 현판 수정전의 현판이다. 수정전은 갑오경장 때 군국기무처의 청사로 쓰였다. 또한 이 자리에 바로 집현전이 있었다.
▲ 수정전 현판 수정전의 현판이다. 수정전은 갑오경장 때 군국기무처의 청사로 쓰였다. 또한 이 자리에 바로 집현전이 있었다.
ⓒ 강경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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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오경장 때 군국기무처의 청사로 쓰인 수정전

수정전이 지니는 더 큰 의미는 바로 그 쓰임새일 것이다. 이곳은 매우 중요한 역사적인 공간이었다. 수정전은 고종이 썼던 편전(便殿)이었다. 그런데 갑오경장(甲午更長, 갑오개혁) 때 그 중심 기관이었던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의 청사로 이 수정전이 쓰였던 것이다.

일본은 국왕을 무력화시키고 친일정권을 수립하여 국정 전반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바꿔놓아 장차 한반도 침략이라는 오랜 야욕을 실현시키려 하였다. 그리하여 군을 동원하여 1894년 7월 23일 경복궁에 쳐들어가 고종을 포로로 한 상황에서 일본이 요구하는 개혁안을 통과시켰다. 그런데 충격적인 것은 이 과정에서 이미 일본이 왕후(후에 명성황후로 추존)를 시해하려다가 실패했다는 것이다.

두 차례에 걸쳐 실시된 갑오경장은 그 개혁 자체의 의의는 부정할 수 없을지는 몰라도 결과적으로 일본의 내정 간섭의 공간을 확대시켜주는 결과를 낳았다. 국왕은 물론 국민으로부터도 환영받지 못한 개혁이었다. 이에 고종과 왕후는 일본을 밀어내고 러시아를 끌어들여 자주성을 찾고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에 입각한 개혁을 시도하고자 했다. 이는 결국 왕후 시해(을미사변)라는 비극적인 사건을 불러오게 된다.

집현전, 그리고 세종

수정전이 더욱 크게 다가오는 것은 바로 수정전이 자리한 이곳에 집현전(集賢殿)이 있었다는 것이 아닐까 싶다. 집현전. 세종과 그 치세를 이야기하면서 결코 지나칠 수 없는 이름이다. 세종대 꽃피웠던 찬란한 정치의 밑거름을 제공한 기관이 바로 집현전이었다.

집현전은 세종 2년(1420) 설치되어 세조 2년에 혁파될 때까지 불과 37년 동안 존속하였다. 그럼에도 집현전이 한 일들이 너무나 많고 또 크기에 그 이름이 강하게 각인되지 않았는가 싶다.

집현전의 주요한 역할은 고제(古制)에 대한 해석과 다양한 정책 과제들에 대한 연구 및 편찬사업이었다. 아울러 국왕 교육인 경연(經筵), 왕세자 교육인 서연(書筵)을 담당하였음은 물론 사관(史官)의 역할까지도 부여받았다. 자연히 집현전에 소속되거나 거쳐 간 이들은 최고의 인재였음은 물론 그 정치적 입지 또한 단단할 수밖에 없었다.

세종은 집현전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수시로 방문하여 격려함은 물론 사가독서제(賜暇讀書制), 곧 휴가를 주어 독서와 학문 연구에 전념하게 하는 파격적인 제도도 실시하였다. 이처럼 집현전은 세종의 지대한 관심과 배려 속에 많은 책들과 보고서들을 편찬하여 15세기의 찬란한 민족문화를 꽃피우는 원동력이 되었다.

세종의 정치, '함께 하는 정치'의 모범

세종은 통치이념인 성리학을 바탕으로 한 왕도정치(王道政治)를 구현해나갔다. 세종은 당대의 수많은 정치가와 학자들과 함께 믿기 어려운 태평의 시대를 만들어냈다. 세종은 정말 뛰어난 정치가이자 당대의 대학자였다.

조선은 보기 드문 문치주의(文治主義) 국가였다. 국가의 최고 통치자인 국왕에게조차 강도 높은 인격 수양과 학문의 연마가 요구되었다. 따라서 학문적 능력과 자질이 뛰어난 국왕은 국정 전반을 주도하고 안정시킬 수 있었다. 세종, 성종, 영조, 정조가 뛰어난 국왕으로 평가받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특히 세종과 정조가 보여준 학문 연마를 위한 무서운 노력은 닮은꼴이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세종의 학문에 관한 일화는 실록이나 야사인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서 그 무수한 사례를 찾을 수 있다. 원래 한 번 본 책의 내용을 모두 기억할 정도로 탁월한 기억력을 자랑했던 세종은 그 책을 수백, 수천 번 읽었다. 그가 세자 시절 책을 너무 많이 읽어 태종이 내관을 시켜 책을 모두 수거하게 했는데, 그 가운데 떨어진 <구소수간>(歐蘇手簡)을 수없이 읽었다는 것은 너무도 유명한 일화이다(이상의 일화는 <연려실기술> 권 3 세종조고사본말 세종 참조). 타고난 재능에 엄청난 노력까지 하는 사람을 이길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가 양녕대군(讓寧大君)을 밀어내고 왕세자의 자리에 올라 군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정치적 야심도 그 무엇도 아니었다. 오직 이렇게 매사에 성실하고 겸손한 그 인간적인 면모 때문이었으며, 조선을 반석에 올리고자 했던 태종은 그러한 세종의 능력과 자질을 높이 샀던 것이다.

세종의 그러한 면모는 그가 군왕에 재위하여 승하하는 32년 동안 늘 변함이 없었다. 그는 '함께 하는 정치'가 무엇인가를 집현전에 대한 관심과 배려를 통해 제대로 보여주었다. 인재를 관리하는 능력 또한 탁월했다. 신분고하를 가리지 않고 인재를 등용하는 데 노력하였으며, 등용한 이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하여 그들이 최대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보장해주었다. 그 속에서 이름만 들어도 가슴 설레게 하는 위인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황희(黃喜), 맹사성(孟思誠), 신숙주(申叔舟), 성삼문(成三問), 박팽년(朴彭年), 정인지(鄭麟趾), 김종서(金宗瑞), 최윤덕(崔允德), 이종무(李從茂), 장영실(蔣英實) 등등. 참으로 우리 역사상 보기 드문 시대였다.

세종의 '함께 하는 정치'의 백미는 백성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위하는 정치였다. 백성들의 의견에 귀를 기울였으며, 나라와 백성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몸을 낮추고 머리를 숙이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공법(貢法)의 시행을 위해 17만 명에 달하는 백성들의 여론을 조사한 사실은 지금 생각해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여자 종이 출산 시기가 다가왔을 때 여자 종과 그 남편 모두에게 출산휴가를 주었다는 것은 지금도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일이다. 더구나 이것이 지금으로부터 600년 전에 일어났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이는 가히 파천황(破天荒)에 가까운 일이다.

백성들을 위한 정치의 절청은 역시 훈민정음(訓民正音)의 창제였다. 언어 가운데 유일하게 창제의 시기와 동기, 제자 원리를 알 수 있다는 훈민정음. 세종이 밝힌 창제의 동기에는 애민(愛民)과 위민(爲民), 편민(便民)과 교화(敎化)를 향한 세종의 고민과 의지가 고스란히 밝혀져 있다.

'함께 하는 정치'의 미래를 꿈꾸다

세종 때의 치세가 세종 자신의 인간적인 아픔, 고통 속에서도 그것을 나라와 백성을 위한 지극한 마음으로 승화시켜 정치를 해나간 세종의 면모에서 나온 것임을 기억한다면 그가 왜 뛰어난 정치가인가를 쉽게 알 수 있다. 그러한 정치가로서의 세종을 보며 600년이 지난 우리는 과연 '함께 하는 정치'를 제대로 하고 있는가를 돌이켜보게 된다.

'함께 하는 정치'란 무엇인가? 함께 한다는 것은 서로 열려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서로 보조를 맞춰 간다는 것이다. 열려 있다는 것, 그리고 보조를 맞춰 간다는 것은 갈등을 줄이고 화합하여 함께 나간다는 것일 게다. 그러나 지금의 정치의 모습은 과연 그러한가? 서로가 완전히 막혀 있다. 갈등의 골은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깊어졌다. 함께 보조를 맞추고 있는가? 어느 한쪽의 일방과 독선, 독단은 가히 걱정스럽다.

정치판, 아니 사회 전체로 눈을 돌려보면 어떠할까? 국회의 모습은 가히 한편의 코미디를 보는 듯하다. 공직자들의 도덕적 해이는 가히 위험수준이다. 우리의 일상 속에서도 어느덧 원칙과 정직을 지키는 것이 새삼스러운 화제로 떠오르고 사기와 거짓과 부정이 당연한 것처럼 여겨지고 있다.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절망할 필요는 없다. 거짓은 사라지고 참된 것은 남는 법이다. 다만 시간이 걸릴 뿐이다. (오주석, <그림 속에 노닐다>, 솔, 2008, 5쪽 간행사 가운데) 역사는 정의와 원칙을 배반한 적이 없다. 비록 우리가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민주화와 경제 성장을 이뤄냈듯, 앞으로도 얼마만큼의 시간이 걸릴지 알 수 없으나 우리의 정치는 반드시 '함께 하는 정치'의 아름다운 모습으로 되돌아갈 것이라 믿는다. 역사에 대한 지극한 외경심을 가지게 된다면. 우리 모두의 노력이 필요할 때다.

♧ 참 고 문 헌 ♧

<국역 연려실기술> 1, 민족문화추진회, 1968.
박현모, <세종의 수성 리더십>, 삼성경제연구소, 2005.
신병주, <하룻밤에 읽는 조선사>, 랜덤하우스 중앙, 2003.
정옥자, <조선후기 역사의 이해>, 일지사, 1993.
한영우, <다시 찾는 우리역사> (전면개정판), 경세원, 2003.
홍순민, <우리 궁궐 이야기>, 청년사, 1999.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지난 2009년 11월 5일~6일 다시 궁궐을 답사하면서 여기에 여러 참고문헌을 바탕으로 제 생각을 담아 새로 쓴 글입니다.



#수정전#집현전#세종#군국기무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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