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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은 사실에 근거를 둔 창작에 가깝다. 삶의 현실과 신문이 그려낸 현실 사이에는 분명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문제는 우리가 알고 있는 현실이 대부분 언론에 의해 그려진 현실이라는 점이다."

 

- <신문 읽기의 혁명 1> 中  -


 

손석춘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 원장이 <신문 읽기의 혁명 2>를 내놓았다. 1997년에 출간한 <신문 읽기의 혁명> 이후 12년 만이다.


1권에서 '편집을 읽어야 기사가 보인다'고 설명했던 저자는 2권에서 '경제를 읽어야 정치가 보인다'고 강조한다. 저자는 서문에서 "1권을 쓸 때와 달리 정보기술 혁명이 독자들의 신문 읽기 환경을 근본적으로 바꾸면서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며 "문제의 핵심은 '정파적 신문 읽기'가 그 새로운 가능성을 시나브로 억압하는 데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한 단계 더 나아간 신문 읽기가 절실한 시대적 과제라는 판단으로 2권을 쓰기로 했다"며 "경제와 정치를 함께 읽어야 새로운 정치적 상상력과 정치경제의 새로운 지평이 열린다"고 말했다.  

 

왜 경제 읽기인가

 

경제는 민중들이 맞닥뜨려야 할 '먹고 사는' 문제와 직결된다. 정치권력자가 '먹고 사는' 문제만 해결해준다면 그의 도덕성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나 여전히 '먹고 사는'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부자 신문'은 여전히 나팔을 불고 있고, '가난한 독자'는 순진하기만 하다. 모든 사람이 평생 경제생활을 하면서도 자신의 경제생활과 정치현상을 전혀 별개의 문제로 생각하며 일상을 살아간다.

 

생활 속에서 인지하지 못하지만 우리 삶 전체를 규정하는 게 정치다. 이를테면 볼펜이나 화장품 값을 결정하는 데도 정치권이 참여한다. 볼펜의 값을 200원으로 정하는 데도 원가와 세금 등 정책이 무관하지 않다. 그런 정도로 정치는 우리 삶과 직결된다. 따라서 정치에 무관심해지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다. 아무런 감시나 비판 없이 우리 일상을 그들에게 맡겨서야 되겠는가? 


저자는 신문을 통해 경제를 바로 보기 위한 방법을 이 책에서 제시한다. 신문지면에서 경제기사가 차지하는 비중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변해왔는지를 되짚어보며, 이를 통해 현재 다수의 독자들이 '왜' 정치-사회면을 나누어보게 되었는지, 경제면 아래 숨은 광고면의 참모습을 '왜' 또렷하게 인식하지 못했는지 등을 풍부한 사례를 들어 해설한다.

 

경제면 넘어 경제 읽기


언론 보도의 제1원칙은 정확한 보도와 논평이다. 손석춘은 저널리즘이 "삶의 현실과 수용자 사이에 투명한 창문의 역할을 해야 한다"고 믿는다. 언론은 풍부한 현실을 가능한 있는 그대로 보여줘야 한다는 것이다. 미국의 보수적 칼럼니스트인 매기 갤러거(Maggie Gallagher)가 한 말은 그래서 인상적이다.


"나는 독자를 조종하려고 애쓰지 않는다. 세계를 내가 본 그대로 드러내고 독자에게 전달하려고 노력한다. 바로 그것이 언론인과 선동가의 차이다."


당신은 한국의 신문을 단순히 보수와 진보로 구분지어 인식하고 있지는 않은가? 그렇다면 정파적 신문 읽기 수준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이 필요한가? 저자는 신문을 그 품격 자체만으로 구분 지을 것을 당부하며 세 가지 기준을 제시한다. 바로 '진실' ․ '공정' ․ '사랑'이다.

 

저자는 구체적 사례를 통해 한국의 주요 독과점신문들이 겉으로는 공정(公正)을 외치며 "사회 소수계층의 의견을 대변하고 그들의 이익을 옹호해주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도, 속으로는 자신의 이해관계만을 위해 진실을 왜곡해왔음을 밝혀낸다.

 

 주권시대의 신문 읽기


한국 사회에서 신문은 스스로 권력화함으로써 여론이 크게 뒤틀렸다. 언론에게 위임한 표현의 자유는 민중을 예속하는 수단으로 전락했다. '신문 읽기의 혁명'이 끝나지 않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손석춘은 '주권시대의 신문 읽기'를 주장한다. 주권시대의 신문 읽기란 신문지면의 주권을 찾으려는 노력으로 나타난다. 네티즌들의 자발적 글쓰기와 광고주 불매운동 등이 그 사례다. 부패한 언론의 '의제 설정권'을 민중에게 가져오는 방법이 바로 주권시대의 신문 읽기라는 것이다.


"희망은 있다. 2008년 촛불항쟁 과정에서 신자유주의 논리를 '글로벌스탠더드'로 여론화하며 민주시민을 '친북좌파'로 몰아세운 신문들에 대해 주권을 찾으려는 움직임이 활발하게 벌어졌기 때문이다. 만일 그 역동적 움직임이 신문을 정파로 읽는 함정을 뛰어넘어, 경제와 정치 사이에 다리를 놓고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와 민중의 이해관계를 냉철히 짚어보는 '신문 깊이 읽기'와 이어진다면, 언론주권을 실현하는 길은 그만큼 더 빨라질 수 있다."

 

손석희 성신여대 교수는 "과거 언론이 '감시견'(watch dog)이었다면 지금은 기득권을 옹호하고 지키는 역할을 하는 '경비견'(guard dog)과 재벌(광고주)과 관련된 문제에서 침묵하는 '슬리핑 견'(sleeping dog)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진단한 바 있다. 슬리핑 견의 잠을 깨우기 위해서는 독자들의 올바른 신문 읽기가 필요하다.

 

신문 읽기의 혁명이 일어나 시대의 여론이 변화할 때, 마침내 저자가 갈망하는 '주권혁명'이 이뤄지지 않을까? 손석춘은 독자에게 능동적인 신문 읽기를 주문한다. 이 책을 통해 각기 세상을 보는 '창'을 점검해보는 것도 좋겠다. 언론이 바로 서지 않고는 역사가 바로 서지 않으며 사회가 맑고 깨끗해질 수 없다. 언론은 역사를 왜곡하고 물을 흐리는 선봉에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분명 손석춘이 기다리는 '아직 오지 않은' 저널리스트를 위해서도 훌륭한 지침서가 되리라 믿는다.

 

"수많은 '미네르바들' 속에서, 수많은 미네르바들의 연대를 통한 집단지성으로 새로운 사회를 열어가는 데 주권시대 신문 읽기의 고갱이가 있다. 자신의 경제생활을 단순히 '취업'이나 '호구지책'으로 여길 게 아니라 정치생활과 연결 짓는 다리로 신문을 읽으며 새로운 사회의 주체로 자기를 창조적으로 형성해갈 때, 그때 신문 '읽기의 혁명'은 곧 '혁명 읽기'다. 그때 신문 읽기는 예술이다."


신문 읽기의 혁명 2 - 경제를 읽어야 정치가 보인다

손석춘 지음, 개마고원(2009)


태그:#손석춘, #신문 읽기의 혁명, #개마고원, #새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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