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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ㄱ. 책을 이야기하는 책이 되려면

 

 퍽 많은 사람들이 즐겨읽던 <장정일의 독서일기>라는 책을 읽은 지 몇 해 안 되었습니다. 장정일님을 좋아하고 싫어하고를 떠나, 문학책 읽기를 뚝 끊은 채 살아오고 있는 터라, 문학책 이야기만 줄줄 늘어놓는 느낌글은 그리 입맛을 당기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장정일님 이야기를 헌책방 일꾼한테서 들으며 '한번 읽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서울 회기동 헌책방에서 얼핏설핏 책손으로 서로 스쳐 지나가면서 '내가 문학책을 안 읽는다 해도 책을 말하는 책은 다 같은 마음으로 펼치기 마련'이라고 마음을 고쳐먹고 예전 책을 하나둘 찾아내어 읽고 있습니다.

 

 스스로 '출판평론가'라는 이름쪽을 내걸고 있는 표정훈님은 지난 2004년에 <탐서주의자의 책>(마음산책)을 써냈습니다. 이해 2004년에는 저도 <모든 책은 헌책이다>라는 책을 내놓았습니다. 제가 쓴 책이 더 잘났다고 여기지 않으나, <탐서주의자의 책>이나 표정훈님 예전 책들은 영 내키지 않습니다. 온갖 지식조각을 얼기설기 알뜰살뜰 엮은 글매무새가 놀랍다고 느낍니다만, 온갖 지식조각을 그러모은 당신 땀방울과 눈물방울은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식조각을 읽으려 한다면 백과사전을 보거나 인터넷을 누비면서 정보를 모으면 됩니다. 굳이 종이에 글자를 박은 책을 사서 읽어야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서점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고 나서도 구입하게 되는 책, 그런 책을 만드는 게 저자와 번역자와 출판사의 중요한 임무이자 목적이 아닐까?(217쪽)" 같은 이야기는 다름아닌 '출판평론가' 당신한테 돌려주어야 할 이야기가 아닌가 하고 생각합니다.

 

 이해 2004년에는 서경식님이 <소년의 눈물>(돌베개)이라는 책이야기를 내놓기도 합니다. 재일조선인으로 살아가는 아픔과 생채기에다가 당신이 어릴 적부터 가까이할 수밖에 없던 책이란 무엇인가를 굵직굵직 나이테를 남기듯 또박또박 적바림하는 책입니다. 그러나 저로서는 이 책 <소년의 눈물>을 읽으며 아무런 눈물을 흘리지 못했고, 어떠한 눈물도 느끼기 어려웠습니다. 같은 출판사에서 또다른 재일조선인이며 지식인인 강상중님 책인 <청춘을 읽는다>를 올 2009년에 새롭게 펴냈는데, 이 책을 읽을 때에도 같은 느낌입니다. "마쓰이 히데키 선수는 야구 배트를 한 번 휘두르는 것으로 100만 엔을 벌어들이지만, 나는 1년 동안 일해도 200만 엔밖에 벌지 못한다. 그래도 이곳에서 일하고 있으면 지역 사람들이 고맙다고 말해 준다. 나는 거기에서 삶의 보람을 느낀다.(231쪽)" 같은 대목은 훌륭하지만, 이런 몇 대목을 빼고는 딱히 가슴을 적시지 못한다고 느낍니다.

 

 책에는 지식을 담기도 하지만 지식만 그러모은다고 책이 되지 않습니다. 책이야기나 느낌글이란 지식을 다루기도 하지만 지식만 다룬다고 책이야기나 느낌글이 되지 않습니다. 책을 말하는 책이라면 책 하나에 얽힌 사람들 사랑과 믿음이 고이 배어야 합니다. 책을 이야기하려는 일꾼이라면 책과 사람이 맺은 삶을 풀어내야 합니다. 돈이 있어야 산다지만 돈은 삶이 아닙니다. 책은 마음을 살찌우는 밥이라지만 책만으로 우리 삶을 살찌울 수 없습니다. 뜨거운 눈물, 환한 웃음, 따스한 손길, 시원한 목소리를 골고루 나눌 때 바야흐로 참사람이요 참책이요 참삶입니다.

 

 ㄴ. 서울 이대 앞에 헌책방이 생긴 기적

 

 <예수전>을 쓴 김규항님은 천주교를 믿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책 <예수전>에는 '하느님'이라고만 적고, <200주년 신약성서>를 판본으로 삼습니다. 김규항님은 책 머리말에서 <200주년 신약성서>를 판본으로 삼은 까닭은 "이 성서에서만 예수가 반말을 하지 않기 때문(13쪽)"이라고 밝힙니다. 우리 나라에는 세계 그 어느 나라보다도 온갖 성경이 많이 나와 있는데, 이 성경은 '한국땅에 천주교가 들어온 지 이백 해를 기리는 해에 맞추어 새롭게 옮겨낸' 성경입니다. 그런데 천주교 쪽에서도 이 책은 거의 안 쓰고 안 읽습니다. '새로 옮긴' 성경이 있기 때문입니다. 늘 새로 옮긴 성경으로만 다루고 말하고 읽고 하지, '제대로 잘 옮긴' 성경이라 할지라도 오래된 책은 돌아보지 않습니다. 그래도, 제가 사는 동네에서 지난해까지 주임신부를 맡은 ㅂ신부님은 '다른 신부님들은 아무도 안 쓰는' 판본이었으나 바로 이 <200주년 신약성서>로 미사를 올리고 강론을 하고 성경을 읽고 나누었습니다.

 

 서울 마포구 염리동 큰길가에 아주 조그마한 헌책방이 하나 문을 열었습니다. 이제 꼭 두 달이 되었습니다. 간판에는 책방이름이 따로 적혀 있지 않으나 책방이름은 '유빈이네 책방'입니다. 좁은 자리에 마련한 헌책방인데 책꽂이를 '바퀴 달린 세 겹'으로 장만했습니다. 그야말로 마지막 빈틈까지 책꽂이이자 창고처럼 마련했다고 할까요. 이 놀라운 헌책방을 염리동 사람들은 얼마나 알고 있을까 궁금합니다. 누구보다 염리동에서 가장 가까운, 그러니까 이 헌책방 옆으로 고작 40미터쯤에 있는 전철역하고 가장 가까운 대학교인 이화여자대학교 학생들은 몇이나 이곳을 알고 있을는지 궁금합니다. 적어도 인문학을 하는 학생이거나 이 대학교 교수라 하는 분들은 이곳을 알아보고 찾아간 적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지지난 화요일, 몸살 기운이 가득하여 걷기도 어렵던 날 낮에 엉금엉금 기듯 '유빈이네 책방'을 찾아갑니다. 몸이 아프니 눈도 흐릿하여 책을 보기 어려웠지만, 서울 이화여대 앞쪽에 새로 생긴 놀라운 헌책방에 찾아가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 시간 반 남짓 찬찬히 둘러보며 이 책 저 책 구경합니다. 여러모로 쏠쏠하다 싶은 책과 함께 <강이, 나무가, 꽃이 돼 보라>(나무와숲, 2004)라는 책이 눈에 뜨입니다. 데이비드 스즈키와 오이와 게이보 두 사람이 쓴 책인데, 데이비드 스즈키는 캐나다사람이지만 핏줄기는 일본사람이고, 오이와 게이보는 일본사람이지만 핏줄기는 한국사람입니다. 그러나 이 둘은 '어느 나라 어느 겨레'붙이임을 떠나 옹근 마음결과 생각밭으로 당신들 삶을 꾸리며 이 땅과 사람을 사랑하고 믿습니다.

 

 "비인간적 인간들을 만들어 내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자연을 파괴하는 것이다 … 근대성이란 새것이 최고라고 믿는 것이다. 그 말은 곧 옛것은 좋지 않다는 뜻이 된다."(103, 109쪽)

 

 동네에 있는 초중고등학교와 대학교를 다니지 못하게 하며, 좋다는 학교 옆으로 집을 옮기는 오늘날 한국땅에서는 누구나 '사람 아닌 사람' 길을 걷습니다. '사람한테서 벗어난 사람' 자리에 뿌리를 내립니다. '사람을 잊는 사람'이 되고, '사람을 버리는 사람'으로 바뀝니다.

덧붙이는 글 | - 이 글은 <시민사회신문>에 함께 싣습니다.

-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hbooks.cyworld.com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태그:#책읽기, #책이 있는 삶, #책삶, #책이야기, #헌책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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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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