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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가을 어느날이다.

 

20년째 살고 있는 신당동 집 정류장에서 내리려는데 생소한 안내방송이 나왔다.

 

"이번 정류장은 신당동 박정희 대통령 가옥입니다. 내리실 분은..."

 

내 집에 가려는데 어떤 대통령 집이라고 한다. 버스 정류장 이름까지 이렇게 해야 하나 생각을 하는데 다음 정류장 안내 방송이 더욱 가관이었다.

 

"다음 정류장은 중앙시장 박정희 대통령 가옥입니다."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박정희 전 대통령은 육군 소장 시절부터 신당동 일대의 땅을 다 차지하는 초호화주택에서 살았다고 착각할 지도 모를 일이다.

 

신당동-중앙시장을 지나는 버스들은 2008년 가을 이후 지금도 이렇게 안내 방송을 하고 있다.

 

알고 보니 이 때부터 신당동 버스 정류장 이름이 '박정희 대통령 가옥'으로 바뀌었던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 뿐만 아니다. 가회동에는 윤보선 대통령 가옥, 서교동에는 최규하 대통령 가옥이란 정류장도 생겼다고 한다.

 

누구 발상인지, 절대로 버스를 타고 다닌 적이 없는 인간의 머리에서 나왔을 것으로 확신한다. 또 다시 버스를 시민의 발이 아닌, 거리의 장식품으로 여긴 행정을 실감한다.

 

신당동이나 서교동은 전 대통령들의 연고지도 아니다. 그들이 고향을 떠나 서울로 왔을 때 대통령이 되기 전 일시적으로 살았던 동네에 불과하다.

 

이런 정책이 지속되면 몇 십 년 후 서울시내 정류장은 전부 작고한 전임 대통령 이름으로 도배가 돼 있을 것이다.

 

이 글의 제목은 비록 '김대중-노무현 정류장도 만들라'고 했지만, 진심으로 내가 주장하는 바는 그 반대다. '김대중-노무현 정류장도 만들지 말거니와 지난해부터 뚱딴지처럼 바꿔 놓은 정류장 이름들도 빨리 서민과 친숙한 이름으로 돌려 놓으라'는 거다.

 

'신당동 박정희 대통령 가옥'이라 이름붙인 정류장의 경우, 바로 앞에 신한은행이 있고 5미터 거리에는 홈플러스가 있다. 버스 정류장 이름에 단골로 등장하는 도시 이정표같은 기관들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정류장은 신당동의 최고 자랑 떡볶기 타운 바로 앞에 있는 곳이다. 당연히 정류장 이름은 '신당동 떡볶기 타운 앞'이 돼야 마땅할 것이다.

 

혹시, 이름을 바꾼 당사자들은 떡볶기 타운이 길 건너편이라 이름을 달리 했다고 우길지도 모른다. 실제로 길 건너편 정류장의 이름은 '떡볶기 타운'으로 돼 있다.

 

그런데 바로 이 점이 버스를 생전 타고 다녀보지 않은 사람이나 할 수 있는 행정이란 것이다.

 

버스 타는 사람들은 택시 승객과 다르다. 그들은 목적지가 길 건너편이라 해서 버스 노선을 달리 선택하지 않는다. 특히 떡볶기 타운처럼 주말마다 수많은 차량을 불러들일 정도로 널리 알려진 장소라면 길 건너고 안 건너고를 가릴 일이 아니다.

 

느닷없는 정류장의 대통령 타령은 1983년 버스 노선을 홀수와 짝수로 바꿔 놓은 것 이래로 가장 한심한 버스 정책이다. (그 시절 고3이었던 나는 등교할 때 파란색 빨간색 정류장의 중간 지점에 서 있다가 버스가 올 때마다 가슴이 터지도록 달렸었다.)

 

서민들의 말단 수송 수단인 버스는 정류장 이름에서부터 실질적인 장소 정보를 제공해야 한다.

 

유명인사들이 전국에 골고루 흩어져 사는 외국에서는 대통령과 같은 중요 인물이 살았던 역사를 정류장 이름에 적어 넣을 정도로 기념하는 일도 있을 법 하다.

 

하지만 웬만한 유명 인사는 죄다 서울로 몰려와서 사는 한국의 현실에서 무조건 대통령이 살았던 동네라고 떡볶기, 신한은행, 홈플러스, 가구상가 이런 서민 실생활의 정보를 다 밀어내고 이름을 만드는 것은 수준 미달의 코미디에 불과하다. 30년 후 대통령 이름으로 도배가 된 서울 버스 노선도를 상상해 보라.

 

가 본 적은 없지만 신당동의 박정희 대통령 가옥은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가 어린 시절 살았던 집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스꽝스런 짓을 한 버스 행정가들에게 질문이 있다.

 

혹시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가 대통령이 된다면 그 때는 '신당동 박정희 대통령 가옥' 정류장 이름을 어떻게 할 것인가.


#버스정류장#대통령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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