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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경궁에서 종묘를 향하여 넘어가는 길에서부터 나는 애처롭다. 사람으로 보면 목 부분에 해당하는 이곳은 일제가 응봉자락을 따라 흐르는 산줄기의 지맥이 창덕궁과 창경궁을 거쳐 흘러 들어가는 맥을 끊기 위해 길을 내고 그 위에 작은 다리를 놓았다.

이 다리가 있어 종묘로 가는 편리함이 남아 있지만, 목이 잘린 사람의 모습을 생각하면 너무 처량하고 슬퍼지는 것이다. 해방이 되고 60년도 더 된 시점에서 이제 반쪽 복원을 한다고 하니 천만다행이기는 하다.
             
종묘 가는 길  창경궁에서 종묘로 건너가는 다리 위에서 본 아래의 도로
종묘 가는 길 창경궁에서 종묘로 건너가는 다리 위에서 본 아래의 도로 ⓒ 김수종

뒤편에서 종묘로 들어가는 길은 좌우측이 온통 참나무 숲이다. 곳곳에 도토리가 너무 많다. 다람쥐도 눈에 보이고, 낙엽을 밟으며 걸으면 정취가 남다르다.

"고궁에서 비를 맞으며 걷는 느낌을 맛보기 않고는 연애를 논하지 말라!"고 감히 말하고 싶어진다. 비를 맞으며 낙엽을 밟으면서 걸음을 재촉하면서 영녕전으로 향한다.
            
영녕전 종묘의 작은 사당인 영녕전
영녕전종묘의 작은 사당인 영녕전 ⓒ 김수종

세종대왕이 큰아버지인 정종의 신위를 모시며 정전의 신실이 부족하자 정전에 모시고 있던 신위를 다른 곳에 옮겨 모시기 위해 새로 지은 별묘이다. 그 뜻은 '왕가의 조상과 자손이 함께 길이 평안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영녕전의 신위는 정전에서 옮겨 왔다는 의미에서 조묘라고도 한다. 시설의 규모와 공간의 형식은 정전과 별반 차이가 없지만, 정전보다는 약간 작은 것이 친밀감이 있어 좋다.

정전과 마찬가지로 이중으로 된 월대 주변에 담장을 두르고 동남서 세 곳에 문을 두었다. 가운데 4칸은 태조의 4대 조상인 목조, 익조, 도조, 환조의 비를 모신 곳으로 다른 협실보다 지붕이 높은 것이 특징이다.

좌우의 협실 각각 6칸에는 정전에서 옮겨 왔거나 추존한 왕과 왕비의 신위를 모시고 있다. 정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녕전을 만든 이유는 천자의 나라 중국에서도 7신실만을 모시고 있는 관계로 조선에서 7신실을 넘는 종묘를 만들 수 없다고 하여 송나라의 예법을 따라 정전 옆에 새롭게 영녕전을 짓게 된 것이다.
        
영녕전  종묘의 영녕전
영녕전 종묘의 영녕전 ⓒ 김수종

영녕전을 둘러 본 다음 일행은 종묘 중앙에 자리 잡고 있는 정전으로 이동했다. 정전은 왕이 승하한 다음 궁궐에서 삼년상을 치른 다음, 신주를 옮겨와 모시는 종묘의 중심 사당이다.

정전에도 들어가는 문은 세 곳이 있다. 남문은 신문으로 혼백이 드나드는 문이다. 동문은 제관이 드나드는 문, 서문은 악공이나 춤을 추던 일무원, 종사원들이 드나들던 문이다.

정전에는 태조와 그의 조상인 4대왕과 공덕이 큰 왕과 왕비의 신위가 모셔져 있다. 조선 후기로 갈수록 신위의 숫자가 늘어나 옆으로 증축을 거듭했다. 정전은 국보 227호로 지정되어 있는 곳으로 육중한 지붕과 단순하고 고전적인 건축미로 찬사를 받고 있는 건물이다.
                      
종묘 종묘의 큰 사당인 정전
종묘종묘의 큰 사당인 정전 ⓒ 김수종

건물 앞에 있는 가로 109cm, 세로 69cm의 월대는 정전의 품위와 장중함을 더해주고 있으며 신실의 양쪽에는 창고와 부속실 등이 있다. 정전을 마주하는 정면에는 칠사당과 공신당이 자리 잡고 있다. 또한 칠사당 바깥에는 악공청이 있다.

서쪽에 있는 칠사당은 토속 신앙과 유교를 합쳐 놓은 사당이다. 왕가와 궁궐의 모든 일과 만백성의 생활에 아무 탈이 없도록 사계절의 운행과 관계하는 신들에게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칠사당의 담장 넘어 악공청은 종묘제례를 준비하던 악공들이 악기를 준비하고 기다리며 연습을 하던 곳이다.

동쪽의 공신당은 정전에 모신 역대 왕들의 공신들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당초 5칸 규모의 작은 사당이었지만, 날이 갈수록 공신의 숫자가 늘어 이곳도 83위를 모신 16칸의 규모가 되었다.

조선 왕조에서 왕이었지만 쫓겨난 연산, 광해군의 신위가 종묘에 없고, 왕을 낳은 왕의 어머니 가운데도 영조의 어머니인 숙빈 최씨의 경우, 왕비가 아니었다는 이유로 경복궁 옆에 위치한 숙빈묘라고 하는 사당에 모셔져 있다.

정전을 둘러 본 일행은 재궁으로 갔다. 재궁은 왕이 머물면서 세자와 함께 제사 준비를 하던 곳으로 왕가의 재실이라고 할 수 있다. 마당을 중심으로 왕이 머물던 어재실과 동쪽에 위치한 세자재실, 서쪽에 위치한 어목욕청이 있다.

왕과 세자가 재궁 정문으로 들어와 목욕재계를 한 다음, 의관을 정제하고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한 후, 서협문으로 나와 정전과 영녕전의 동문으로 들어가 제례를 올렸다. 재미있게도 신실의 수가 늘어날 때 마다 재궁은 동쪽으로 옮겨 다시 지어졌다고 한다.
               
종묘 종묘의 재실은 재궁, 왕실의 재실이다. 왕이 쓰던 어재실이다.
종묘종묘의 재실은 재궁, 왕실의 재실이다. 왕이 쓰던 어재실이다. ⓒ 김수종

재궁 뒤편에는 제례에 쓸 음식을 준비하던 전사청이 있다. 평소에는 제사에 쓰는 집기를 보관하며, 종묘를 지키던 관원들이 기거하던 수복방과 제사에 쓰는 우물인 제정, 제사에 쓸 음식을 미리 검사하던 찬막단과 성생위가 나란히 붙어 있다. 

마지막으로 종묘의 입구에는 향대청이 있다. 향청은 제사 전날 왕이 종묘제례에 사용하기 위해 친히 내린 축문, 향문, 폐백, 제사 예물을 보관하는 곳이며, 집사청은 제사에 나갈 집사자들이 대기하면서 재계를 하는 곳이다.

향대청 우측에는 공민왕 신당이 있다. 고려의 공민왕와 그의 왕비인 노국공주의 영정을 모신 사당으로 정식 이름은 '고려공민왕영정봉안지당'이다. 조선 왕조의 사당에 고려 왕의 신위를 모신 것이 특이하다. 역성혁명의 정통성을 부여하기 위한 의도로 짐작이 된다.

조선 왕조의 사당인 종묘는 세계 어느 나라의 사당이나 묘소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단순함과 확장을 거듭하면서도 완결된 완성미를 보여주는 걸작이다.

별다른 꾸밈은 없지만 대범한 조형미와 수림 속에 유현한 성역공간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또한 창의성이 돋보이는 공간이기도 하다.

비가 와서 종묘는 대충 둘러보고 말았다. 다음에 기회가 주어진다면 입구의 향대청 일대와 재궁, 전사청 주변을 자세히 살펴보고 싶다. 일행은 비가 오는 날씨라 모두 칼국수가 먹고 싶다고 하여 인근 돈의동의 유명한 멸치칼국수로 점심을 하고 해산했다.

역사, 문화와 함께 하는 서울 걷기 모임
네이버 카페  http://cafe.naver.com/daipapa
11월 22일(일) 오전 9시 30분, 정동 및 사직공원 도보 여행
(집결지 덕수궁 대한문 앞)


#종묘#창경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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榴林 김수종입니다. 사람 이야기를 주로 쓰고 있으며, 간혹 독후감(서평), 여행기도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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