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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전깃줄을 타고 큼직한 잎사귀를 뽐내더니 어느새 노란꽃을 피우던 넝쿨풀을 올려다보면서 "이 가을에 호박꽃이 또 피나? 아니, 오이인가?" 하고 갸우뚱했습니다. 하루가 지나고 또 한 주가 지나고 하면서 꽃이 지고 열매가 맺힙니다. 열매는 가느다란 전깃줄에 주렁주렁 매달립니다. 열매를 보고서야, "오호라, 너는 수세미였구나! 제대로 몰라보아서 미안하다!" 하는 소리가 터져나옵니다. 이 골목에도 수세미, 저 골목에도 수세미, 전깃줄이 있고 나무전봇대가 있는 곳에 어김없이까지는 아니나 어여쁘고 곱게 꽃망울을 틔우기도 하고 열매를 맺기도 합니다.

골목집과 골목집을 잇는 전깃줄에 매달린 수세미.
 골목집과 골목집을 잇는 전깃줄에 매달린 수세미.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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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아오는 아침햇살을 등에 지며 사진으로 담기도 하고, 기웃기웃 지는 저녁햇살을 등에 지며 사진으로 담기도 합니다.

지난 한가위 때에는 잔뜩 밀린 일을 하느라 우리 부모님 댁에는 찾아가지 못하고 옆지기 부모님 댁에는 꼭 하루만 다녀왔습니다. 내내 집에서 홀로 일을 하다가 골치가 아프던 저녁나절, 사진기 하나 달랑 들고 골목마실을 했습니다. 저로서는 일곱 번째로 알게 된 나무전봇대가 있는 송현동 골목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궁금하기도 했고 저녁바람을 쐬고 싶었습니다.

요사이 '동인천 북광장 조성사업'이라는 이름으로, 중앙시장과 양키시장과 순대골목 모두 철거하는 일이 하나둘 이루어지고 있는데, 볼꼴사납게 헐린 건물 옆으로 아직 사람이 살고 있는 집이 버젓이 남아 있습니다. 나무전봇대는 퍽 우람한 모습을 뽐내면서 자리를 지키고 있는데, 다른 나무전봇대 하나는 밑둥이 잘린 채 우람한 녀석한테 기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전봇대 앞으로 아직 살아남아 있는 골목집 대문에는 "사람 살고 있씀니다"라는 손글씨가 적혀 있습니다. 손글씨 위에 주소 또한 손글씨로 적혀 있습니다. 이웃집들이 헐리면서 담벼락에 붙여놓고 있던 주소패가 모두 떨어져 나갔으니 이렇게라도 주소며 이름이며 적어 놓고 '사람 사는 둘레에서 들볶지 마시오!' 하고 마지막 몸부림을 칠 수밖에 없다고 느낍니다.

"사람 살고 있씀니다"
 "사람 살고 있씀니다"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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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진 살림살이와 부서진 시계 따위를 내려다봅니다. 허물린 집자리에는 어느새 새 풀이 돋아납니다. 그러니까, 집이 허물리고 난 다음 풀이 돋아날 만큼 퍽 시간이 흘렀다는 소리요, 철거를 하든 재개발을 하든 '도시정화'를 하든(인천시는 도심지 재개발을 하면서 '도시정화'라는 낱말을 쓰고 있습니다), '살기 팍팍하고 무서우면 얼른 보상금이나 이삿돈을 받고 떠나라'는 뜻이로구나 싶습니다.

허물린 집자리 돌덩어리 위로도 둥그렇게 뜬 달을 올려다보면서 생각합니다. 비손합니다. '부디, 이곳에서 떠난, 쫓겨난, 아직 살아가는 분들한테도 따순 사랑이 내려지기를.'

이튿날 저녁에도 저녁마실을 해 봅니다. 해가 살짝살짝 기울며 땅거미가 어슴푸레하게 깔리는 때에 사진기를 '흑백'으로 맞추고 저녁햇살 부드러운 느낌을 담아 보니 새삼스레 꽤 괜찮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예스러운 느낌을 보여주는 흑백사진이 아니라, 부드러운 저녁햇살을 담아내는 흑백사진입니다. 골목 담벼락에 전봇대와 전봇대 사이에 줄을 드리워 걸어 놓은 빨래가 싱그럽게 다 말라 가는구나 싶고, 살랑살랑 부는 바람에 살몃살몃 흔들리는 빨래 모습이 무척 멋스럽구나 싶습니다.

이렇게 우람하게 서 있는 나무전봇대는 이제 나라안에 거의 없다고, 아니 하나도 없다고 해도 틀리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런 전봇대 값어치를 느끼며, '지정문화재'이든 무어이든 삼을 수 있는 가슴이 있는 분은 참으로 없을까요.
 이렇게 우람하게 서 있는 나무전봇대는 이제 나라안에 거의 없다고, 아니 하나도 없다고 해도 틀리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런 전봇대 값어치를 느끼며, '지정문화재'이든 무어이든 삼을 수 있는 가슴이 있는 분은 참으로 없을까요.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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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길 한쪽에 놓인 걸상과 꽃그릇이 남다르게 느껴지고, 문패 하나, 누름단추 하나, 자전거 하나, 돌틈에 자라는 풀꽃 하나 새롭게 다가옵니다. 아침에 송월동3가 골목길을 누비면서 만난 가을 해바라기와 가을 분꽃이 떠오릅니다. 이 동네는 몇 해 지나면 지금과 같은 자취는 남김없이 사라지고 말 테지만, 그 뒤로도 살아남을 수 있든 그 뒤로는 감쪽같이 사라지든, 가난하고 수수하게 살아온 사람들 보금자리를 꾸밈없는 손길과 마음길로 조용하게 가꾸어 온 매무새는 언제까지나 내 마음 깊이 자리잡고 잊혀지지 않으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해바라기가 피고 분꽃이 피는 골목길. 어느 누구도 돈으로는 이런 골목이나 꽃밭을 일구지 못합니다.
 해바라기가 피고 분꽃이 피는 골목길. 어느 누구도 돈으로는 이런 골목이나 꽃밭을 일구지 못합니다.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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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서울에서 나무전봇대는 거의 없거나 하나도 없지 않을까 싶은데, 다른 큰도시나 시골은 어떠할는지 궁금합니다. 전봇대와 맞붙은 골목집이 이 전봇대와 전깃줄을 빌어 수세미를 키우는 모습은 언제까지 지켜볼 수 있을까요.
 이제는 서울에서 나무전봇대는 거의 없거나 하나도 없지 않을까 싶은데, 다른 큰도시나 시골은 어떠할는지 궁금합니다. 전봇대와 맞붙은 골목집이 이 전봇대와 전깃줄을 빌어 수세미를 키우는 모습은 언제까지 지켜볼 수 있을까요.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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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 담벼락에 걸린 빨래가 더없이 싱그럽다고 느낍니다.
 골목 담벼락에 걸린 빨래가 더없이 싱그럽다고 느낍니다.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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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종규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hbooks.cyworld.com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태그:#골목길, #인천골목길, #재개발, #나무전봇대, #수세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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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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