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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을 사회복지 사업에 바쳐왔던 기부왕(가명)씨. 그는 칠순이 되자 자신의 재산을 어떻게 뜻깊게 사용할 것인지를 곰곰이 고민해왔다. 그는 결심을 굳히고 가족들 몰래 전 재산을 한국대학교에 기부한다는 내용을 담은 유언장을 작성한 뒤 평소 거래하던 은행금고에 고이 보관해두었다.

몇 년 후 그는 100억 원대의 재산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유족들은 고인의 유산과 유품을 정리하다가 은행에 보관된 유언장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한국대학교는 고인의 뜻대로 전 재산을 기부해달라고 유족들을 설득했다. 하지만 유족들은 "유언장의 효력을 인정할 수 없다"며 거절했다.

결국 양쪽은 법정에까지 가게 되었다. 유언자의 의사가 중요하다고 본 학교 쪽과 유언은 형식을 갖추었을 때만 효력이 있다는 유족들, 당신은 어느 쪽이 옳다고 보는가. 결론은 잠시 미루고 법정을 들여다보자.

"고인의 의사가 중요" VS. "유언은 형식 갖춰야 효력"

상속인들은 이 유언장의 효력을 문제 삼았다.

"판사님, 유언장에는 고인의 도장이 빠져있습니다. 날인이 없는 유언은 자필로 썼더라도 효력이 없습니다. 따라서 유족들이 법에 따라 재산을 상속받는 것은 당연합니다. 미안한 일이지만 한국대학교에는 아무런 권리가 없습니다. 유산을 어떻게 뜻깊게 사용할지는 우리가 결정하겠습니다."

학교 쪽은 고인의 의사가 확인된 이상 고인의 유지를 받드는 것이 정도라고 맞섰다.

"평소 고인은 사회복지와 장학사업에 지대환 관심을 보였고 재산의 사회 환원을 중요하게 생각하셨습니다. 유언장까지 손수 작성해서 남겨놓으셨고요. 유족들도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런데 단지 이름 옆에 도장이 빠졌다고 해서 유언자의 뜻을 무시한다면 그건 정의에도 어긋납니다."

법원은 난감한 상황에 빠졌다. 유언의 효력을 문제삼는 유족들의 의견도 일리가 있고, 고인의 유지를 받들어야 한다는 학교 쪽의 주장도 무시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당사자들끼리 합의가 되지 않은 이상 법대로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법이 정한 요건 갖추지 못한 유언은 무효"

여기서 잠깐, 유언의 방식에 대해 알아보자. 유언은 유언자의 의사를 유족이나 제3자가 알아보기만 하면 될까. 그렇지 않다. 법은 유언에 대해 아주 엄격한 형식을 갖추라고 요구한다.

민법(제1065조-제1060조)은 법에서 정한 방식이 아니면 유언으로서 효력이 없다고 못 박고 있다. 이를 유언의 요식성이라고 한다.

유언의 방식은 자필증서, 녹음, 공정증서, 비밀증서와 구수증서에 의한 유언 등 5가지이다. 이 중 가장 많이 사용하는 방법은 본인이 직접 작성하는 자필증서와 공증사무실에서 공증을 받는 공정증서이다. 이것도 법에서 정한 구체적인 방식에 따라야만 인정된다. (자세한 내용은 상자기사 참조.)

법에 나오는 유언의 5가지 방식
법에서 인정하는 유언의 방식은 자필증서, 녹음, 공정증서, 비밀증서와 구수증서에 의한 유언 등 5가지밖에 없다. 

1. 자필증서에 의한 유언
직접 글로 써서 유언을 남기는 방식. 유언자가 그 전문(유언 내용)과 날짜, 주소, 성명을 자서(직접 작성)하고 날인하여야 한다. 이중에서 한가지라도 빠지면 무효이다. 자필이 아닌 컴퓨터․ 타자기를 이용하여 작성한 서류도 법적으론 효력이 없다. 자필증서 유언을 집행하려면 반드시 가정법원의 검인절차를 거쳐야 한다.   

2. 녹음에 의한 유언
녹음기기를 이용하는 방식. 유언자가 유언의 취지, 이름과 날짜를 구술(말로 설명)하고 이에 참여한 증인이 유언의 정확함과 그 성명을 구술하여야 한다.

3. 공정증서에 의한 유언
유언자가 증인 2인과 함께 공증인 앞에서 유언의 취지를 구수하고(말로 전하고) 공증인이 이를 정리하여 기록하는 방식. 유언자와 증인이 그 정확함을 승인한 후 각자 서명 또는 기명날인 하여야 한다.

4. 비밀증서에 의한 유언
유언이 있다는 사실을 알리되, 내용은 비밀로 할 때 쓰는 방식이다. 유언자가 필자의 성명을 기입한 증서를 봉인·날인하고 이를 2인 이상의 증인의 면전에 제출하여 자기의 유언서임을 표시한 후 그 봉서표면에 날짜를 적고 유언자와 증인이 각자 서명 또는 기명날인하여야 한다. 유언봉서는 그 표면에 기재된 날로부터 5일내에 공증인에게 확정일자인을 받아야 한다.

5. 구수증서에 의한 유언
질병 기타 급박한 사유로 인하여 위 4가지 방식에 따를 수 없는 경우에 증인이 유언자의 말을 받아 적는 방식이다. 유언자가 2명 이상의 증인이 보는 가운데 유언의 취지를 전하고 이를 받아 적은 후 유언자와 증인이 그 정확함을 확인한 후 각자 서명 또는 날인하여야 한다.

이중에서 자필증서와 공정증서가 가장 많이 쓰이며 무난하다. 자필증서는 5가지 유언 중 유일하게 증인이 필요없다. 작성이 간단한 대신 보관이 어렵고 위조될 가능성이 있다는 약점도 있다. 공정증서는 법률전문가인 공증인을 통하기 때문에 위조의 여지가 없는 대신 비용이 든다는 단점이 있다.

한편, 유언은 생전에 언제든지 철회할 수 있다. 고인이 유언을 여러 번 남겼을 때는 제일 마지막 유언을 유효한 것으로 본다.  

이렇게 유언에 엄격한 잣대를 대는 까닭은 무엇일까. 유언자의 진의를 명확히 하고 그로 인한 법적 분쟁과 혼란을 예방하기 위해서다(대법원 2008다 1712 판결 등).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의 의사를 무슨 수로 확인할 수 있겠는가. 따라서 불분명한 유언은 그 진의를 둘러싸고 의문과 다툼이 생기면 해결할 방법이 없다.

그래서 법원은 요건을 조금이라도 갖추지 못한 유언은 그것이 유언자의 진정한 의사에 합치하더라도 무효라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여기에는 세상을 떠나는 사람 역시 생애 마지막 결정을 쉽게 내리지 말고 신중하게 하라는 의미도 담겨 있다. 

유언, 유증, 사인증여는 무슨 뜻?
유언과 함께 쓰이는 용어로 유증과 사인증여가 있다. 이들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유언은 보통 죽기 전에 남기는 마지막 말 정도로 이해하지만 법률적으로는 사망과 동시에 일정한 효과(특히 재산상의 권리, 의무)를 발생시키는 의사표시를 말한다. 생전에 남긴 유언은 유언자가 사망한 때로부터 효력이 생긴다. 만 17세 이상이면 단독으로 유언을 할 수 있다. 유언자가 유언을 통해 자기 재산의 전부 또는 일부를 다른 사람에게 주는 행위를 유증이라고 한다. 

사인증여란 증여자가 생전에 특정인과 증여계약을 맺지만, 그 효력은 사망할 때 발생하는 행위이다. 유언이 상대방의 의사와 관계없이 효과가 생기는 것과 달리, 사인증여는 증여하는 사람과 받는 사람 사이에 계약이 이루어져야만 한다. 위의 사례에서 기부왕씨가 사후에 재산을 기부하기로 한국대학교와 미리 계약서를 작성했다면 사인증여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다시 기부왕씨의 유언 사건으로 돌아가보자. 기씨의 유언은 법으로 따지면 자필증서에 의한 유언에 해당한다. 기씨는 직접 모든 내용을 작성하여 유언의 요건을 충족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도장이 빠져 있었다. 자필증서는 유언자가 유언의 내용과 작성일, 주소, 성명을 직접 쓰고 도장까지 찍어야 완벽한 유언이 된다. 법원은 고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이 유언장이 법이 정하는 형식을 갖추지 못했다며 상속인의 손을 들어줬다.

학교 쪽은 유언으로서 효력이 없더라도 계약의 일종인 '사인증여'에 해당할 수 있다고 주장했지만 법원은 이마저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사건은 대법원까지 올라갔으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임종 앞둔 아버지의 유언도 법적으론 무효?

"장남 일식아, 내가 눈을 감더라도 어머니 잘 모셔야 한다. 너는 제사도 지내야 하니 이 집은 네 앞으로 등기해놓거라. 둘째 두식이는 이 통장을 받아라. 아비가 10년간 적금을 부었으니 이걸로 결혼 준비를 하거라. 막내 삼식이에게는 물려줄 재산이 없구나. 아직 나이가 어리니 형들 말 잘 듣길 바란다. 서운하더라도 아버지의 마지막 결정을 따라다오."

방송이나 영화에서 임종을 앞둔 아버지가 가족들을 모아놓고 유언을 남기는 장면을 보게 된다. 인간적으로 보면 고인의 유지를 받드는 것이 도리겠지만 냉정하게 보면 이런 유언은 법적으로는 효력이 없다. 법과 현실 사이의 괴리감이 분명히 있다. 만일 막내 삼식이가 아버지의 뜻을 따르지 않고 자신의 상속지분을 요구하며 상속재산분할 청구를 한다면 상황은 걷잡을 수 없게 된다.  

이왕 의미있는 유언을 남기려면 법이 정하는 절차를 따라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산 자들 사이에 또다른 다툼이 생길 수 있다. 죽은 사람은 말이 없기 때문이다. 

전 재산 기부하면 가족들은 어떻게 살라고?
남은 가족을 위한 법적 보호 장치, 유류분 제도
만일 기부왕 씨가 유언장에 도장을 찍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렇다면 유언으로서 효력을 발휘하여 재산이 한국대학교로 가게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전 재산이 다 가게 된다면 유족들 입장에서는 받아들일 수 있을까.

상속인들이 재산 형성에 기여하거나 협력한 경우가 많고, 남은 가족들의 생활도 중요하기 때문에 법에서도 일정 부분 상속받을 수 있는 여지를 두고 있다. 상속재산 중에서 일정한 부분까지는 법률상 보장하고 있는데 이를 유류분이라고 한다. 유류분은 남은 가족을 위한 보호장치로, 유언에 일종의 제한을 가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배우자나 자식들의 경우 법정상속분의 50%에 대해서는 권리를 갖는다. 예를 들어 아내와 자식 둘이 있는 고인이 전 재산 14억 원을 사회에 환원한다는 유언을 남겼다면 절반인 7억 원(아내는 3억 원, 자식들은 각 2억 원)에 대해 유류분을 청구할 수 있다. 

첨부파일
유언장.hwp

덧붙이는 글 | 다음 기사에서는 상속과 관련된 법률 상식을 짚어보겠습니다.



태그:#유언, #기부, #유류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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