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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 대영박물관의 카탈로그를 보았다. 바로 '조선장이(배 만드는 목수)의 모습'이었다. 장발의 남자로 진지한 표정은 아니다 ..  《이케자와 나쓰키/노재영 옮김-문명의 산책자》(산책자,2009) 77쪽

"대영박물관의 카탈로그(catalog)"는 "대영박물관 안내책자"나 "대영박물관이 만든 안내책자"나 "대영박물관에서 만든 안내책자"로 다듬습니다. "장발(長髮)의 남자"는 "머리가 긴 남자"나 "긴머리 사내"로 손보고, "진지(眞摯)한 표정(表情)은 아니다"는 "차분한 얼굴은 아니다"나 "차분해 보이지는 않는다"로 손봅니다.

 ┌ 조선(祖先) = 조상(祖上)
 ├ 조선(條線) : 금이나 선
 ├ 조선(造船) : 배를 설계하여 만듦
 ├ 조선(釣船) = 낚싯배
 ├ 조선(朝鮮)
 │  (1) [역사] = 고조선(古朝鮮)
 │  (2) [역사] 1392년 이성계가 고려를 무너뜨리고 세운 나라
 ├ 조선(漕船)
 │  (1) 물건을 실어 나르는 배
 │  (2) [역사] 조운(漕運)하는 데 쓰던 배
 ├ 조선(蜩蟬) : [북한어 '매미'의 북한어
 ├ 조선(槽船) : [북한어] '마상이'의 북한어
 ├ 조선(操船) : 배를 부림
 │
 ├ 조선장이의 모습
 │→ 배무이 모습
 │→ 배뭇는 사람 모습
 │→ 배무이꾼이 일하는 모습
 └ …

더없이 마땅한 소리입니다만, 우리 나라 옛사람들은 손수 배를 만들어 왔습니다. 손수 만든 배를 손수 물에 띄워 타고다녔습니다. 배 만드는 솜씨를 이웃나라에서 가르쳐 주었는지 안 가르쳐 주었는지 알 길이 없지만, 아무튼 우리 스스로 우리 배를 만들어 왔습니다.

일본이 일으킨 싸움에서 이순신이라는 장군이 거북 모양으로 배를 만든 이야기는 어린이도 다 알고 있을 만큼 널리 퍼져 있고, 끝없이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이 배를 두고 '거북배'라 일컫지 않습니다. 모두들 한결같이 '거북선'이라고만 말합니다. '거북'은 토박이말인데 어이하여 '배' 아닌 '船'을 뒷가지로 붙였을까요. 아니, 양반들이야 '거북선'이라고조차 말하지 않고 '귀선(龜船)'이라고 일컫었겠지요. 그네들은 한글로 '거북 어쩌고' 하고 적을 일이 없었을 테니까요.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우리 입과 귀와 손과 머리에 익은 '거북선'이라는 낱말은 언제 누가 맨 처음으로 썼을까 하고.

이 자료를 찾아볼 수 있을까요? 일제강점기 때 이순신 장군을 주인공으로 삼아 쓴 위인전에 이 낱말이 처음 나올까요? 우리 배 문화와 역사를 톺아보려고 하는 분들이 옛책을 살피며 오늘날 말로 옮기는 가운데 '귀선'보다는 '거북선'이 사람들이 알아듣기 좋으리라 생각하며 옮겨적었을까요. 아니면 옛책에도 '거북船'이라고 적혀 있었을까요.

 ┌ 거북배
 ├ 거북선
 └ 귀선

우리 나라에는 배를 만드는 커다란 공장이 여럿 있습니다. 배를 만드는 회사도 여럿 있습니다. 이런 공장과 회사는 이웃 북녘과 일본에도 있을 테며, 중국과 러시아와 미국에도 있겠지요.

북녘에서는 어떤 이름으로 배를 만드는 일을 가리키는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남녘에서는 '조선업(造船業)'이라 가리킵니다. 배를 만드는 곳은 '조선소(造船所)'라 가리킵니다.

다시금 생각해 보면, 배를 만드는 일이란 '배만들기'나 '배짓기'나 '배뭇기'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들은 배를 만드는 일을 있는 그대로 가리키지 않습니다. '造船'이란 다름아닌 '만들기(造) + 배(船)'이기에, '배만들기'일 뿐이지만, 이 한자말을 쓰는 사람이나 이 한자말을 듣는 사람들은 애써 '배만들기'를 말하지 않을 뿐더러, '배짓기'나 '배뭇기'를 떠올리지 않습니다. 배를 만드는 곳이라면 '배짓기터'나 '배뭇기터'쯤일 테지만, 이러한 말 또한 아무 곳에서도 쓰지 않습니다.

 ┌ 배만들기 / 배짓기 / 배뭇기
 └ 조선 / 조선업 / 조선소

지난 1999년에 보림이라는 출판사에서 《배무이》라는 그림책을 펴냈습니다. '전통과학시리즈' 가운데 하나로 나온 그림책으로, 배를 어떻게 만드는가를 하나하나 차근차근 보여줍니다. '조선'이라는 한자말이 아닌 '배무이'라는 토박이말을 썼습니다. 이에 앞서 '배무이'라는 이름을 턱 하니 내걸며 나온 책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제 얕은 깜냥으로 살펴보기로는 이 그림책이 꽃등이 아닌가 싶습니다. 아마, 그림책이 나오기 앞서도 배를 뭇던 이들은 '배무이'라는 말을 익히 쓰고 있었겠지요. 그저 널리널리 퍼지지 못한 낱말이요, '조선'이라는 산업에 밀려 거의 자취를 감추려 했던 모습이었으리라 느낍니다.

이는 국어사전에서 '조선'을 찾아보아도 알 수 있는데, 모두 아홉 가지 낱말이 '한자말 조선'으로 실려 있습니다만, 나라이름을 가리키는 '조선(朝鮮)'을 빼놓고는 우리가 쓸 만한 낱말이 하나도 없습니다. 금이면 '금'이라 하고 줄이면 '줄'이라 하면 되지, '조선(條線)'이라 할 까닭이 없습니다. 낚시를 하는 배라면 '낚싯배'일 뿐이지, '조선(釣船)'이 아닙니다. 짐을 실어 나르는 배라면 '짐배'입니다. '화물선(貨物船)'도 '조선(漕船)'도 아닙니다.

이밖에 '祖先'이나 '操船' 같은 한자말이 국어사전에 실리는데, 우리네 국어사전은 왜 이런 한자말을 실어야 할까요? 누가 이런 말을 쓴다고? '매미'와 '마상이'를 가리킨다는 '북녘 한자말'은 왜 실었을까요? 북녘도 한자말을 많이 쓰고 있다고 보여주고 싶어서? 남녘에서도 이 같은 한자말은 널리 받아들여서 써야 한다는 생각에서?

 ┌ 배뭇기 / 배무이
 ├ 배뭇기꾼 / 배무이꾼
 ├ 배뭇기터 / 배무이터
 └ …

이제 와서 '조선'이라는 한자말을 버리고 '배뭇기/배무이'로 돌아가자고 하기는 어렵다고 봅니다. 그러나 우리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우리 말을 되찾을 수 있습니다. 한국마사회가 하루아침에 'KRA'가 되고 농협이 'NH'가 되어도 잘만 바뀐 이름대로 쓰고 있는 우리들이거든요. 이렇게 이름 바꾸는 데에 수백 수천 억을 쓰고 있는 우리들이거든요.

오늘날 우리들은 '네이밍'을 한다면서 더없이 큰 돈을 들여 '한글 이름'을 버리고 '알파벳 이름'으로 갈아입습니다. 이처럼 갈아입은 옷을 벗는 데에도 제법 큰 돈이 들 수밖에 없다고 느끼는데,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거의 돈이 안 들면서도 우리 넋과 얼을 알뜰히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 넋과 얼을 알뜰히 찾으며 우리 삶을 알뜰히 찾고, 우리 삶을 알뜰히 찾는 가운데 우리 말과 글을 알뜰하게 추스를 수도 있겠지요.

'배뭇기/배무이'를 살려내고 북돋운 그림책 하나 있으니까요. '배뭇기/배무이'라는 낱말을 오늘날 아이들은 좋은 그림책 하나를 보면서 차츰차츰 익숙하게 받아들이며 가슴으로 새기고 있으니까요. 아직은 머나멀고 까마득할는지 모르나, 우리가 어느 만큼 애쓰느냐에 따라 우리 삶과 삶터와 삶자락은 새롭게 거듭날 수 있으니까요.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hbooks.cyworld.com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태그:#한자말, #한자, #우리말, #한글, #국어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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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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