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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아버지와 함께 열심히 일했다. 부자(父子)가 함께 노력한 결과, 사업 자금으로 대출 받았던 돈도 다 갚게 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결혼을 앞 둔 여자가 그를 찾아왔다. 여자의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 담겨 있었다. 조심스럽게 물어 보니 여자는 속사정을 털어 놓았다. 검사 신랑 측에서 너무도 많은 경제적 요구를, 그것도 노골적으로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여자에게 해 줄 말이 없었다. 생각 같아서는 그런 놈과 결혼하면 안 된다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그는 애써 말을 참았다. 자기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여자는 검사 신랑을 택할 것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여자는 며칠 후 또 그를 찾아와 하소연을 늘어놓았다. 그는 용기를 내서 말했다. 결혼을 취소하고 2,3년만 기다려 주면 여자를 행복하게 만들 자신이 있다고 그는 말했다. 여자는 눈물을 보이더니 말없이 돌아갔다.

그것뿐이었다. 그는 며칠 후 검찰청 수사관이라는 사람에게 전화를 받았다. 수사관은 뜬금없이 법을 지키며 사업을 하라고 말했다. 그리고 덧붙이기를, 여자를 괴롭히는 짓 따위는 하지 말라고 했다.

그는 불쾌하고 자존심이 상했다. 그는 너희가 상관할 일이 아니라고 말했다. 오히려 그는 오기가 발동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좀처럼 먼저 하지 않던 전화를 여자에게 해서 만났다. 여자는 여전히 어두운 표정이었다.

얼마 후 그와 그의 아버지는 검찰의 소환을 받았다. 그들은 무자료 거래 혐의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수사관은 부자(父子)를 한꺼번에 구속시키지는 않겠다고 말했다. 그들 부자는 감당하기 벅찬 추징금을 부과 받았다. 그는 아버지 대신 기소되어 1년의 실형을 살고 풀려났다. 사업은 거의 기울어져 있었다. 추징금이 아니더라도 나이 많은 아버지 혼자 하기에는 힘든 사업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여자가 또 그를 찾아왔다. 여자는 선글라스를 벗지도 않고 울면서 실토했다. 여자는 그들이 적발된 것은 자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자기가 혼수를 지나치게 요구하는 신랑에게 항의도 할 겸 자기에게도 사랑해 주는 남자가 있다는 말을 했다는 것이었다. 그 뒤로 그들이 수사를 받게 된 것이라고 했다.

그는 여자의 눈자위에서 선글라스로 가려진 퍼런 멍을 발견했다. 검사 남편은 술을 먹고 집에 오는 날이면 어김없이 다른 부부 얘기를 한다는 것이었다. 하나같이 아파트를 사 가지고 온 여자와 결혼한 동료의 이야기였다. 급기야 여자도 참을 수가 없어 남편에게 따졌다고 했다.

"자동차와 전세 자금을 댔으면 됐지, 더 이상 어떻게 하란 말에요?"

그날로부터 검사 남편의 폭력이 상습화되었다고 했다. 어떤 때에는 술병을 싱크대에 때려 깨 가지고 여자를 위협하기도 했다고 했다.

그는 여자의 남편을 찾아가 혼내주고 싶었다. 하지만 상대가 검사이기도 하려니와 무엇보다 자기가 끼어들 일이 아닌 것 같아 실행에 옮길 수 없었다.

어느 날 밤, 그는 다급한 목소리로 구조를 청하는 여자의 전화를 받았다. 그녀는 남편이 자기를 죽일지도 모른다고 말하더니 전화를 끊었다. 한 달 후 그는 여자가 식물인간이 되어 입원 중이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는 여자가 입원한 날이 다급히 구조 전화를 건 날임을 알 수 있었다.

그는 검사 남편을 한 번 만나보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검사가 근무하는 지청으로 찾아갔다. 검사 남편은 멀쩡히 직장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여자의 말대로 자기를 수사한 검사였다. 그는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느꼈다. 하지만 검사는 그를 알아보지도 못했다. 검사는 문을 들어서는 그에게 이맛살을 찌푸리며 대뜸 반말로 지껄였다.

"술 값 받으러 온 거냐?"

그는 눈에 보이는 것이 없어졌지만 겨우 정신을 수습하여 발길을 돌렸다. 그에게는 '악마'라는 단어가 머리를 맴돌았다. 그는 검사가 양재천에 야간 산책을 자주 나간다는 것을 알아냈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날 그는 검사를 징벌하기로 결심하고 실행에 옮긴 것이었다. 범행 후 얼마동안 그는 자기가 '사랑과 정의'를 위해 일했다는 자부심으로 행복감에 젖어 있었다고 진술했다.

야합형

조수경은 아브라함의 편지를 받았다. 편지는 지난번과는 달리 길게 작성되어 있었다. 그녀는 직감적으로 사건에 대한 정보가 들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런 그녀의 직감은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그녀는 가슴을 두근거리며 편지를 읽어 나갔다.

수경, 이제 사건에 대해 본격적인 얘기를 할 때가 된 것 같군. 연쇄살인범을 보는 학자들의 견해는 크게 둘로 나누어지지. 하나는'왜 연쇄살인범이 되는가?'에 관심을 갖는 경향이고 다른 하나는'무엇이 연쇄살인범을 만드는가?'를 더 중시하는 경향이지. 전자는 범인의 개인적 삶에 초점을 맞추는 관점이고 후자는 범인이 속한 사회적 환경을 더 주목하려는 태도일 거야.

그런데 연쇄살인이 아닌 연쇄 테러의 경우에는 후자에 주로 관심을 두지. 즉, 무엇이 연쇄테러를 만드는지가 단연 중요하단 말일세. 일련의 사건들, 이제는 주로 '햇볕연쇄살인사건'이라고 부르게 된 것들의 성격이 일반 연쇄살인이 아닌 테러 살인이라는 데에 우리는 의견의 일치를 보았어. 그렇다면 당연히 우리도 무엇이 테러를 낳게 하는가를 생각해야 하겠지. 수경이 한국의 근·현대사를 연구한 것은 바로 그 문제에 접근하기 위해서였을 거야.

연쇄살인은 경제 성장과 함께 나타난다는 주장이 있어. 그러므로 선진국으로 가는 과정에서 피할 수 없는 현상이라는 것이지. 과연 그럴까? 그렇다면 북유럽이나 중부 유럽의 선진국들에서는 왜 연쇄살인이 거의 발생하지 않을까? 이것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연쇄살인이 선진국병이라는 주장에 동의할 수가 없지.

연쇄살인은 경제 발전과 상관없이 사회의 경직성이 풀리는 시점에 많이 발생하지. 수경은 이미 1920년대에 17명을 살해한 한국인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지? 1920년대라면 식민지 통치 기간인데 그때 연쇄살인사건이 났다는 것이 얼른 납득되지 않을 거야.

그러나 조금만 깊이 생각해 보면 우리는 해답을 찾을 수가 있어. 일제의 무단통치가 끝나고 이른바 문화정치가 실시되어 한국 사회가 어느 정도 자유로워졌던 시기가 바로 1920년대였거든. 특히 이 시기에 일제에 의해 고의적으로 조장된 자유연애 풍조는 사회의 경직성을 풀리게 만드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지. 1990년대 이후 한국에 연쇄살인이 부쩍 많아진 이유도 같은 성격을 띤다고 보면 되겠어. 권위주의 시대가 청산되면서 속박과 규제가 느슨해진 것이지.

반면에 정치 테러는 역사적 격변기에 주로 발생하지. 수경은 해방 정국에 발생한 수많은 테러들을 이미 알고 있을 거야. 그리고 다시 반세기가 지났어. 50년 이상 옹벽을 쌓고 서로를 적대하던 남과 북이 대화와 화해를 지향하기 시작한 것이지. 이건 누가 뭐래도 역사적 격변이야.

나는 햇볕연쇄살인사건이 변화하는 남북 관계와 깊은 관련을 갖는다고 여기고 있어. 사건의 과정에 나타난 것들 중에서 여전히 풀리지 않고 있는 'B. K.' 라는 영문자의 의미를 밝히는 일도 이런 맥락에서 접근해야 될 거라는 생각이 드는군. 분명히 B. K.는 범인의 정체를 암시하는 기호일 거야. 그러므로 이 기호의 의미를 알아내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하지.

나는 앞 글자 B가 뭔지는 말할 수 없어도 뒷글자 K는 무엇을 의미하는지 조금만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다고 봐. 한국의 정치테러가 한국 역사의 격변과 관련되는 것이라면 K는 다름 아니라 한국을 지칭하는 Korea의 이니셜이 아닐까? 그렇게 본다면 이제 B의 의미를 밝히게 되면 최소한 범행의 의도와 범인의 특성을 알아 낼 수 있을 거야.

이제 앞에서 언급한 본격적인 이야기를 할 때가 되었네. 한국인들이 이제껏 없었던 이상한 살인사건들로 당황하기 훨씬 이전부터 범인은 치밀하고 체계적으로 범행을 준비해 왔을 거라는 생각도 해 보아야 할 거야. 나는 범인이 6월 15일로 예고한 범행에 성공할 거라고 예상하고 있어.


#연쇄살인#테러#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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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과 평론을 주로 쓰며 '인간'에 초점을 맞추는 글쓰기를 추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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