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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27일(일) 새벽을 기점으로 빗줄기가 멈추면서 필리핀 곳곳의 수해현장의 복구가 시작되고 있다.
지난 27일(일) 새벽을 기점으로 빗줄기가 멈추면서 필리핀 곳곳의 수해현장의 복구가 시작되고 있다. ⓒ 고두환

필리핀 메트로 마닐라(Metro Manil)의 퀘존 시티(Quezon City)를 관통하는 도로 커먼웰쓰(Common Wealth)에서 산티간(Santigan) 안쪽으로 난 도로를 타고 들어가면 지프니 한 대가 다닐 정도의 좁은 도로가 높고 낮은 여러 동네를 연결하는 '실랑안(Silangan)' 마을이 나온다.

수도인 마닐라에 위치했지만, 외곽지역에 위치한 탓에 메트로 마닐라의 중심부나 외곽지역으로 가려는 사람들은 실랑안에서 산티간을 운행하는 지프니를 타고 나와야 한다. 9만여 명의 사람들이 모여사는 이 마을에는 26일(토), 하룻동안 필리핀을 강타한 태풍 '켓사나(Ketsana)'의 영향으로 70여 명의 주민들이 죽고, 1000여 가족이 집을 잃는 비극적인 사태를 겪었다.

 홍수로 인해 삶의 터전이 쑥대밭이 됐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은 미소를 머금고 현장을 정리하고 있다.
홍수로 인해 삶의 터전이 쑥대밭이 됐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은 미소를 머금고 현장을 정리하고 있다. ⓒ 고두환

절망적 순간에서도 미소를 잃지 않는 사람들

사실 태풍이나 호우가 실랑안을 덮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1999년, 2004년 역시 사람들의 뇌리에 기억될 만큼 무서운 홍수가 마을을 덮쳤지만 한 달의 강수량이 하루에 쏠려 내린 이번의 비와 성격이 달랐다.

실랑안의 중앙 도로를 관통하는 지역은 비교적 지대가 높거나 물이 쉽게 빠지는 구조지만, 곳곳으로 나 있는 샛길을 따라 저지대에 위치한 주거지역은 광범위한 침수구역에 들어갔다. 물에 잠긴 집 지붕에 올라가 핸드폰으로 그 상황을 촬영했던 마을 주민 몬칭씨는 "높은 지대로 탈출하지 못한 사람들은 지붕에 앉아서 비가 그치기만을 바라고 있었다"며 당시의 긴박한 상황을 전했다.

몬칭씨가 말하는 도중, 집안의 물을 퍼내고 가재도구를 손질하던 아이들은 해맑은 미소를 띠며 사진 한 장 찍어달라는 말을 건넸고, 슬리퍼도 신지 않은 채 진흙 투성이가 된 몸을 한 주민들이 내 옆을 지나가기 일쑤였다. 수마가 할퀸 상황에서 넋놓고 상황을 관망하거나 울음을 터뜨리는 사람이 없는 현장을 보고 억지로나마 미소를 머금을 수 있었던 건 불행 중 다행이었다.

 실랑안 마을의 상습 침수구역. 인근 주민의 말에 따르면 불법주거를 하고 있는 주민들에게 필리핀 정부는 이주를 권장했지만 경제적 사정 상 이들은 그럴 수 없었고, 오늘의 비극적인 홍수를 맡게 됐다.
실랑안 마을의 상습 침수구역. 인근 주민의 말에 따르면 불법주거를 하고 있는 주민들에게 필리핀 정부는 이주를 권장했지만 경제적 사정 상 이들은 그럴 수 없었고, 오늘의 비극적인 홍수를 맡게 됐다. ⓒ 고두환

구호품에 목마른 주민들의 필사적인 손짓

바랑가이 홀(Barangay Hall : 동사무소) 근처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장사진을 치고 있었다. 근처에 위치한 학교, 교회 등에서 임시로 대피한 수천 명의 사람들과 구호품을 애타게 기다리는 행렬은 사람 한 명이 비집고 들어갈 틈도 보이지 않았다.

"공무원들은 어디에 있나요?"
"(저쪽을 가리키며) 몇 명은 저기에 있고, 다른 사람들도 다른 지역에 있긴 한데 사람이 부족해."
"어제 마을이 다 잠겼을 때 특별한 지침이나 공무원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나요?"
"뭐 워낙 비가 많이 와서 그 사람들도 피했겠지. 여하튼 못봤어."

무료급식이 바로 앞에서 끊긴 것을 보고 허탈해 하는 한 노인은 그렇게 내 질문을 받아주었다.

 ABS-CBN 재단에서 도착한 구호품이 동이 나자 아무거라도 더 달라며 사람들이 필사적으로 손짓하고 있다.
ABS-CBN 재단에서 도착한 구호품이 동이 나자 아무거라도 더 달라며 사람들이 필사적으로 손짓하고 있다. ⓒ 고두환


  한정된 구호품 탓에 질서를 잃은 수재민들에게 마구 던져지는 옷가지들.
한정된 구호품 탓에 질서를 잃은 수재민들에게 마구 던져지는 옷가지들. ⓒ 고두환

그나마 비가 그치고 현실 감각을 찾기 시작한 현장에서는 구호의 손길과 복구의 움직임들이 있었다. ABS-CBN 재단에선 옷가지 및 이불 등의 구호품 등이 내려지고, 적십자사에선 무료 진료를 돕고 있었다. 문제는 턱없이 부족한 구호품 탓에 구호품을 내리려면 사람들이 끊임없이 몰려든다는 사실이었다. 거기에 구호품을 더 내려놓을 것이 없는 트럭에 애타게 손짓하는 사람들을 위해 ABS-CBN 재단의 직원들은 주머니에 든 과자 몇 봉까지 수재민들에게 건네주고 있었다.

"당장 오늘밤에 먹을 것도, 덮을 이불도 없어요. 또 비가 오면 큰 일인데…."

실랑안 내 상습 침수지역에 살아가는 주민대표는 어두운 표정으로 안타까운 심정을 그렇게 전했다.

 지난 27일(토), 불 줄기를 피해 지붕에 올라가 홍수 현장을 핸드폰에 촬영한 모습. 지붕을 제외한 대부분 지역에 물로 잠겨 있었다.
지난 27일(토), 불 줄기를 피해 지붕에 올라가 홍수 현장을 핸드폰에 촬영한 모습. 지붕을 제외한 대부분 지역에 물로 잠겨 있었다. ⓒ 고두환

42년만의 최악의 홍수, 집계조차 되지 않는 사상자와 수해민들

27일(일) 저녁 7시 50분 현재, 필리핀 정부에서 집계하는 사망자 및 실종자는 106명, 공무원들 및 자원봉사자들로 이루어진 복구팀 5000여 명에 이를 정도이다.

특히 인명 피해 및 수해현장은 집계가 거듭될수록 증가하고 있는 가운데, 필리핀 언론 마닐라 타임즈(The Manila Times)는 국가재난비상국 의장인 길베르토 테오도로(Gilberto Teodoro) 국방부 장관은 "메트로 마닐라 및 20여 개주를 재난지역으로 선포한다"고 발표했다며 27일 인터넷 사이트를 통해 보도했다.

한편 아로요(Gloria Macapagal Arroyo)는 지난 27일 TV  긴급 담화문을 통해 수재지역의 구호품 및 도움의 손길을 국제사회에 요청하는 연설을 했다. 실랑안 및 중부 루손의 여러 수해 지역은 급히 공급된 구호품으로 28일 밤을 지냈으며, 월요일 아침부터 정부와 각 단체의 대대적인 구호활동과 구호품 전달 등이 이루어 질 것이라고 수재민들은 기대하고 있다.

덧붙이는 글 | 한국 NGO 아시안브릿지는 현재 실랑안 지역 수재민들을 돕고 있습니다. 도움을 주실 분들은 시티은행 302-03383-266-01 (예금주 : 아시아센터) 입금하신 후 m2gek3@hanmail.net(아시안브릿지 필리핀지부 김근교)으로 메일을 주시면 됩니다. 다른 형태의 도움 역시 위 메일을 이용하시길 바랍니다.



#필리핀 홍수#태풍 켓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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