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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벽 한 시 반에 잠에서 깨었지만, 이때 일어나서 밀린 글을 쓰고 기저귀 빨래를 하면 한 번 잠들어야 하고, 그러다가는 아침에 못 일어날 듯해서 다시 잠듭니다.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서 아기 기저귀를 갈고 밀린 글을 씁니다. 그러나 글은 두 꼭지 겨우 다듬다가 그치고, 이따가 한글학회에 일을 나가서 해야 할 일을 붙잡습니다. 글을 쓸 만큼 마음이 느긋하거나 풀어지지 못했으며, 곧 집을 나서야 한다는 생각에 괜히 바쁩니다. 뭣도 하고 뭣도 챙기고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새벽 여섯 시 반쯤까지 학회 일을 보다가 퍼뜩 정신을 차립니다. '이런, 아까 머리를 감았어야 다 마르는데.' 오늘은 머리를 안 감기로 하고 빨래를 하자고 생각합니다. 어제 아기하고 옆지기가 씻고 남은 물로 기저귀 여덟 장을 빨고 한 장은 삶는 빨래를 담는 통으로 옮겨 놓습니다. 그제부터 담가 놓고 못 빨고 있던 포대기도 빱니다. 포대기는 물이 떨어지니 씻는방 빨래줄에 널어 놓습니다. 기지개를 켜며 마루로 나오니 아침 일곱 시 이십이 분입니다. 빨래하는 데에 오십 분쯤 걸렸습니다. '늦었구나.' 서두르다가 또 뭔가 놓치고 갈까 싶어 느긋하게 마음을 추스르며 가방을 꾸리고 옷을 갈아입습니다.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두 사람한테는 먼발치로 인사를 하고 집을 나섭니다. 말리려고 어젯밤에 펼쳐 놓은 우산을 접어서 문간에 들여놓습니다. 대동문구상가 앞까지 달려갑니다. 이곳부터는 걷습니다. 그냥 달려도 되지만, 고등학생 아이들이 어기적어기적 걸어서 올라가는 이 길을 거슬러 달리기보다는 여느 걸음으로 마주 걸으며 아이들 차림새를 눈여겨봅니다. 지난해에 일민미술관에서 '청소년'을 사진감으로 삼는 사진찍기 일을 맡은 뒤로 청소년 아이들하고 스칠 때에는 잠깐 스칠지라도 곰곰이 살피거나 눈여겨보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전철역으로 들어서니 오늘은 '차 없는 날 행사'를 한다며 전철삯을 안 받는답니다. 처음에는 표 끊는 데에 다 종이로 뒤집어씌워 놓았기에 망가져서 이러나 하고 놀랐는데, 무슨 알림판이라도 세워 놓든지 알려주는 일꾼(또는 공익)이라도 나와 있든지 해야지, 이렇게 하면 어떡합니까. 부랴부랴 전철 타는 곳으로 올라갑니다. 용산 가는 빠른전철이 문을 닫고 막 떠납니다. '이런, 된장. 표 끊는 자리에 저거 없었으면 곧바로 올라와서 탔을 텐데. 1500원 아껴 준다며 차를 놓치게 했네.'

 

 서울처럼 전철이 자주 있지 않은 인천이니, 앞으로 칠 분을 기다려야 합니다. 서울은 출퇴근 때에는 전철이 바로바로 있지만 인천은 안 그렇습니다. 그나마 출퇴근 때이니 칠 분만 기다리지, 출퇴근 때를 넘기면 십오 분을 기다려야 합니다. 씁쓸하게 서 있는데 김밥 파는 아주머니가 보입니다. '도시락도 못 싸고 나왔는데 김밥을 사라는 뜻인가?' 마음을 느긋하게 먹자고 다짐합니다.

 

 코앞에서 전철을 놓쳤으니, 칠 분 뒤에 들어오는 전철은 자리를 얻어서 앉습니다. '뭐, 이렇게 자리를 얻어도 나쁘지는 않군. 그러나 일터에는 조금 늦겠네.' 인천에서 서울 가는 지옥철은 다른 날과 다름없이 어마어마하게 손님들이 들어차고 저마다 밀리고 밀고 밟히고 밟으며 이런저런 끅끅 소리가 들립니다. 저는 자리에 앉았으나 사람들은 서로 밀고 밀리며 제 무릎 위까지 앞사람 몸뚱이가 포개질랑 말랑입니다. 서 있어도 책을 읽기 어렵지만 앉아 있어도 책을 읽기 어렵습니다. 그저 눈 딱 감고 잠들기만 해야 합니다.

 

 

 몸은 고단하고 잠은 모자랍니다. 그러나 겨우 몸을 살짝 비틀며 책장을 펼치고 한 줄이라도 더 읽으려고 악을 씁니다. 그야말로 악과 깡으로 '지옥철 책읽기'를 이어갑니다.

 

 역곡을 지나 구로를 거쳐 신도림에 닿으니 비로소 숨통을 틉니다. 어제는 신도림역에서 전철이 망가져 이십 분 가까이 오징어떡이 된 채로 멈추어 있어서 죽는 줄 알았는데, 오늘은 다른 말썽이 없습니다. 늘 이렇게 말썽이 없어야 하지만, 출퇴근길에 곧잘 전철이 망가져서 점검하고 고친다고 하기 때문에, 이렇게 다른 말썽이 없는 날은 한숨을 돌리며 '오늘은 잘 지나갔구나!' 하고 생각합니다.

 

.. 내 기억에 H를 처음 본 것은 그날이었으나 나중에 듣고 보니 그는 나를 입학식이 있기 전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때부터 봤다고 했다. 1박 2일로 진행된 오리엔테이션은 나에게 무척 지루한 것이었다. 모두들 술에 취해 못 일어나고 있는 이른 아침에 혼자 공터로 나가 그네를 탔는데, 그네 타는 나를 멀리서 지켜봤다고 했다 ..  (8쪽)

 

 지난주까지는 신길역에서 5호선으로 갈아타서 서대문역에서 내렸습니다. 어제부터는 용산역까지 가서 1호선으로 갈아타 시청역에서 내립니다. 아무래도 신길역 기나긴 길을 걷기보다는 용산역에서 구름다리 건너 시청역부터 걷는 길이 제 몸이나 마음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리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용산부터 시청까지는 거리는 짧은데 사람들 붐비기는 여의도를 지나는 5호선하고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도 '이만하면 어디냐?' 싶고, 제법 널널하기에 퍽 느긋하게 책을 펼칩니다. 지난 7월 29일에 처음 손에 쥔 《다시, 칸타빌레》라고 하는 책을 서울역을 지날 무렵 다 읽고 덮습니다. 야금야금 맛보듯 읽다가 갑작스레 서울로 일하러 나오면서 한동안 못 읽고 있었는데, 오늘 비로소 마무리를 짓습니다. '그래, 오늘도 한 권 아침에 다 읽었나? 아침저녁으로 고달프지만, 그런 가운데 아침저녁으로 책을 한 권씩 읽어치울(?) 수 있어서 기쁘지?'

 

 사람들이 붐벼 몸뚱이로는 기지개를 못 켜고 마음으로만 기지개를 켭니다. 시청역에서 내리니 다시금 숱한 사람들이 우루루 몰리고, 밖으로 나와도 사람물결은 출렁입니다. 조선일보사 앞을 지나고 면세점 옆으로 지나다가 안쪽으로 틉니다. 늘 그늘 자리로만 걸었는데, 오늘은 볕을 쬐는 뒷길로 걷습니다. 뒷길에는 사람이 뜸하고 조용합니다. '광화문 한복판에 이런 뒷길이 다 있네?' 그러나 담배 태우는 사람이 하나 지나가자 확 담배 냄새가 끼치며 재채기가 납니다. '제기랄 양복쟁이들! 담배 먹고 얼른 하늘나라로 떠나 주시지!' 다시 큰길로 나오니 건널목 불이 바뀌어 뜀박질로 건넙니다. 1층에 앉아 있는 지킴이 아저씨한테 인사를 하고 계단을 타고 5층으로 올라갑니다. 9시 3분. 3분 늦었습니다. 가방을 내리고 물병에 물을 뜨고 낯과 손을 씻은 다음 자리에 앉습니다. 오늘도 눈 아프고 머리 지끈거리는 일을 엽니다.

 

.. 그 너구리 인형은 먼지를 뒤집어쓴 채 아직도 나와 함께 있다. 그러나 지금은 너구리 인형에 대한 기억보다 그 인형을 사 줄 때 자랑스럽고 뿌듯해 하던 아빠가 더 생각난다. 아빠는 백화점에서 인형을 사 줄 수 있는 처지가 된 자신이 매우 자랑스러웠던 것 같다 ..  (49쪽)

 

 낮밥 먹을 무렵에 마음을 쉬고 몸을 다스립니다. 숨을 한번 크게 쉬고, 텅 빈 일터에서 신문도 슬쩍 들춥니다. 정운찬 님 소식을 신문사마다 어떻게 기사로 다루는지 넘겨보다가 아침에 챙겨 온 책을 살짝 펼쳐 봅니다. 이달까지는 마무리지어 넘겨야 하는 책 원고를 살핍니다. '나는 이렇게 일을 한다며 나와 있지만, 옆지기는 아기한테 꼭 붙들려 일이고 놀이고 뭐고 아무것도 못할 테니 얼마나 갑갑할까?' 작은 학회나 일터에서는 '아이 돌보는 방'을 따로 마련할 수 없다지만, 아이가 어버이 있는 일터에 함께 나와서 어울리거나 쉴 수 있도록 제도가 마련되어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떨치지 못합니다. 그리고, 어떤 어른이든, 집하고 식구가 가까운 곳에 있는 일터를 나가거나 일터에서 '일터와 가까운 데에 있는 집'을 얻어 주어야 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참, 꿈 같은 꿈이나 꾸고 있군.'

 

.. 천천히 걸으며 물이 내는 소리를 듣는다. 나뭇가지나 이파리들이 내는 소리를 듣는다. 내 걸음이 내는 소리를 듣는다 … 비닐하우스에 비 떨어지는 소리가 그렇게 좋았다. 어떤 음악도 필요없었다. 노동이 주는 침묵과 비가 주는 음악으로 충만한 하루였다 … 좋은 곳에서 좋은 사람들과 좋은 노래를 들으니 내가 절로 좋은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을 것 같은 용기도 생겼다 ..  (97, 166, 170쪽)

 

 아침에 다 읽은 《다시, 칸타빌레》를 다시 들춥니다. 글쓴이 동무가 제주섬에서 귤농사를 짓고 있는데, 제주섬 동무네 어머님이 글쓴이한테 복을 빌어 주며 "조만간 큰돈이 들어올 것"이라고 이야기해 주었다며, 글쓴이는 "혹시 지금 쓰고 있는 이 책이 아주 잘 팔리는 건 아닐까 자판을 두드리는 손가락에 힘이 들어간다(171쪽)"고 이야기합니다. 그렇지만 안타깝게도, 《다시, 칸타빌레》는 영 안 팔리는 줄 알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글쓴이 스스로도 생각했겠지만, 곧바로 이렇게 말을 돌립니다. "나는 초 사진을 보고 마음이 든든했다. 큰돈이 들어온다는 말 때문이 아니라 누군가 나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는 것 때문에, 누군가 나를 생각해 준다는 것 때문에 넓고 평평한 곳에 편안하게 앉아 있는 기분을 느꼈다(171쪽)."

 

 연극을 하며 틈틈이 글을 쓰는 윤진성 님은 이 책 《다시, 칸타빌레》에서 연극과 같지만 연극하고 다른 당신 삶이 어떠했는가를 조곤조곤 풀어 놓았습니다. 웃음도 풀어 놓고 눈물도 풀어 놓았습니다. 기쁨도 풀어 놓고 슬픔도 풀어 놓았습니다. 무엇보다도 당신이 품은 꿈을 풀어 놓았고, 당신이 접은 꿈을 풀어 놓았습니다. 그러면서 당신이 새로 품거나 끝까지 껴안을 꿈을 들려줍니다.

 

.. "머뭇거린다면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이 아닐 수도 있어요. 한 번 더 생각해 보시라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 "윤진성이라는 사람이 타인들에게 어떻게 보이느냐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아요. 윤진성이 맡은 배역이 관객들에게 어떻게 보이느냐를 신경 쓰죠." ..  (192∼193쪽)

 

 《다시, 칸타빌레》는 '책이야기만 하는 잡지' 〈텍스트〉를 펴내는 '텍스트' 출판사에서 "우리 시대 젊은 만인보"라는 이름을 붙이며 펴낸 일곱째 책입니다. 이 책에 앞서 《신호등 건너기 게임》(신민영), 《그늘 속을 걷다》(김담), 《키보드워리어 전투일지 2000-2009》(한윤형), 《멜로드라마 파이터》(김남훈), 《출발, 3%》(김종철), 《붕어빵과 개구멍》(서영교)까지 여섯 권이 나왔습니다. 다음달쯤 '기선, 배만호, 김민하, 황승미' 네 분 이야기가 잇달아 나오지 않으랴 싶습니다.

 

 오늘날을 살아가는 젊은 사람들(스물∼마흔 사이) 삶과 생각과 말을 돌아보는 책묶음으로, 앞으로 100권이나 200권, 또는 300권이나 400권까지 이러한 이야기가 우리 앞에 선보이지 않으랴 싶습니다. 오늘날을 살아가는 '더 젊거나 어린' 사람들한테, '젊은 또는 늙어 가는 사람'으로서 '남들과 똑같이 안 살'고 '내 깜냥껏 내 길을 내 마음'에 따라 걸어가는 사람들 목소리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껍데기 노란 자그마한 책입니다. 원고지로 치면 700쪽쯤? 책 쪽수는 200쪽 남짓? 책값은 9000원 안팎(아직까지는 9000원이지만 종이값이 오르면 오를 수 있겠지요)?

 

 우리 세상에 크게 이름이 나 있지 않은 수수한 사람들 이야기책이라, 한비야 님 책처럼 잘 팔릴 리 없고, 공지영 님 책처럼 수많은 기자들이 소개해 줄 리 없으며, 전여옥 님 책처럼 숱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릴 리 없습니다. 다만, 때때로 술동무가 되어 주는 이야기벗이 되어 주는 책이며, 길에서 뜻하지 않게 만나 반가운 옛동무 같은 책이요, 나 스스로 조용히 좋아하면서 품에 꼬옥 안을 수 있는 책입니다.

 

 책은 꼭 많은 사람이 사서 읽어 주어야 하지 않습니다.

 

 

 ┌ 《다시 칸타빌레》(윤진성 씀,텍스트 펴냄/2009)

 └ 책값 : 9000원

덧붙이는 글 | - 이 글은 인터넷신문 <사람일보>(www.saramilbo.com)에 함께 띄웁니다.

-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hbooks.cyworld.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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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칸타빌레

윤진성 지음, 텍스트(2009)


태그:#책읽기, #자서전, #문학책, #우시만보, #전철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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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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