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ㄱ. 극히 미량

 

.. 1ppt는 대기 1조 분자 가운데 1분자가 포함되어 있음을 의미하므로 프레온 가스는 대기 중에 극히 미량밖에 포함되어 있지 않은 셈이다 ..  《우자와 히로후미/김준호 옮김-지구온난화를 생각한다》(소화,1996) 28쪽

 

 '포함(包含)되어'는 '들어'로 다듬습니다. '의미(意味)하므로'는 '뜻하므로'나 '가리키므로'로 손봅니다. "대기 1조 분자 가운데"로 썼듯이 "대기 중(中)에"는 "대기 가운데"로 적거나 "대기에"로 적어야 알맞습니다.

 

 ┌ 극(極-)히 : 더할 수 없는 정도로

 │   - 극히 어려운 일 / 극히 당연한 일

 ├ 미량(微量) : 아주 적은 분량

 │   - 청산가리는 미량의 섭취로도 치명적일 수 있다

 │

 ├ 극히 미량밖에 포함되어 있지 않은 셈이다

 │→ 아주 조금밖에 없는 셈이다

 │→ 아주 조금만 있는 셈이다

 │→ 아주 조금만 있다 하겠다

 │→ 아주 조금만 있다

 │→ 아주 적을 뿐이다

 │→ 아주 적다

 └ …

 

 학문은 학문이고 과학은 과학입니다. 쉬운 학문이란 없고 쉽게 바라볼 과학은 없습니다. 그러나 학문하고 과학이 쉽지 않다 할 뿐이지, 학문을 다루는 말이나 과학을 밝히는 말이 어려울 까닭은 없습니다. 수학에 담긴 뜻이 깊어서 헤아리기 힘들 수 있으나, 수학을 풀어내는 말이나 글 하나하나는 어려울 까닭이 없습니다. 문학에 스민 넋과 생각을 못 읽어낼는지 모르나, 문학을 이루는 낱말과 말투 하나하나가 어려울 까닭이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있는 그대로 하면 넉넉할 말을 있는 그대로 말하지 못합니다. 꾸밈없이 나누면 될 글을 꾸밈없이 적바림하지 않습니다.

 

 "더할 수 없는 정도로"를 가리킨다는 '極히'인데, 말뜻을 곰곰이 돌아보면, 한 마디로 "더할 나위 없이"요 "더없이"입니다. 같은 뜻으로 "다시없이"가 있고 "둘도 없이"가 있습니다. 또한 "그지없이"와 "가없이"가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넉넉하고 알뜰히 쓸 말을 넉넉하게도 못 쓰고 알뜰하게도 못 씁니다. 올바르게 주고받을 말을 올바르게 주고받지 못하며, 살가이 나눌 글을 살가이 나누지 못합니다.

 

 ┌ 프레온 가스는 대기 중에 극히 미량밖에 포함되어 있지 않은 셈이다

 └ 프레온 가스는 대기에 얼마 없는 셈이다

 

 토박이말로 이야기를 하면 길이가 길어진다고 흔히들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참말 그럴까요? 또한, 좀 길어지는 말이란 '나쁘'거나 '알맞지 않'은 말이 될까요?

 

 때에 따라서는 토박이말로 이야기할 때 길어집니다. 곳에 따라서는 한자말을 붙여서 이야기할 때 길어집니다. 어느 글로 하든 늘 짧지만 않으며, 늘 길지도 않습니다. 길이를 따져야 하는 자리에서는 따져야겠으나, 우리가 따질 대목은 길고 짧음이 아니라 알맞게 말하느냐 아니냐입니다. 짧아서 더 좋은 말이 아니라 올바르게 해야 우리한테 반가운 말입니다.

 

 우리는 때에 맞는 말을 하고 곳에 맞게 글을 씁니다. 가장 잘 어울리는 낱말을 골라야 하고, 꼭 들어맞는 말투를 가려서 넣을 때 올바르고 아름답습니다. 이 보기글을 통째로 손질해서 다시 써 보겠습니다.

 

→ 1ppt는 대기 1조 분가 가운데 1분자가 있음을 가리키므로, 프레온 가스는 거의 없는 셈이다

 

 군더더기로 붙인 말이 있지 않은가를 헤아려 봅니다. 쓸데없이 넣은 대목이 있지 않았는지 살펴봅니다. 읽는 사람을 좀더 생각하고, 들을 사람을 한 번 더 돌아봅니다. 배운 사람 틀에 따라서 읊는 말이 아닌, 배운 사람 테두리에서 적어내려가는 글이 아닌, 아직 잘 모르는 사람하고 스스럼없이 어깨동무할 수 있는 말과 글을 차근차근 톺아봅니다.

 

 

ㄴ. 생존 불가능

 

.. 인공수정으로 태어난 사자와 호랑이의 잡종은 밀림의 왕자도 맹수의 제왕도 아니다. 사람이 보살피지 않으면 생존이 불가능한 그저 한 마리 살아 있는 전시물 ..  《박병상-이것은 사라질 생명의 목록이 아니다》(알마,2007) 58쪽

 

 "인공수정(人工受精)으로 태어난"이라면 "따로 씨받이를 한"으로 다듬어도 될까 모르겠습니다. "씨만 따로 넣어"라든지 "시맺이를 따로 해서"라 해 보면 어떠할까 모르겠습니다. 그대로 두어야 한다면 그대로 둘 노릇이지만, 우리 깜냥껏 털어내거나 걸러내어 새롭게 쓸 말은 없는지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한자말로 '잡종(雜種)'이라고 적을 때가 우리 말 '튀기'로 적을 때보다 품위가 있을까 궁금합니다. 아무래도 오늘날 우리 삶터에서는 '튀기'라는 낱말을 쓰기는 어려우리라 봅니다. 다만, '섞인짐승'이나 '섞인목숨'처럼 풀어내면 어떠할까 싶습니다.

 

 "밀림(密林)의 왕자"라고 흔히 말하지만 "숲에서 왕자"나 "숲 왕자"로 다듬고, "맹수(猛獸)의 제왕" 또한 "들짐승 가운데 임금"으로 다듬을 수 있습니다.

 

 ┌ 생존(生存) : 살아 있음

 │   -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환경 오염

 ├ 불가능(不可能) : 가능하지 않음

 │   - 우리에게 불가능은 있을 수 없다

 │

 ├ 생존이 불가능한

 │→ 살 수 없는

 │→ 살아가지 못하는

 │→ 살아남을 수 없는

 │→ 죽고 마는

 │→ 죽어 버리는

 │→ 죽을 수밖에 없는

 └ …

 

 '불가능'이라는 한자말은 앞쪽에 한자말이 있을 때 잘 어울립니다. '살다'나 '죽다'를 넣으면 "살기가 불가능한"이나 "죽기가 불가능한" 꼴이 되는데, 이렇게 말하는 분이 있기는 합니다만 어쩐지 어색합니다. '생존'이라는 한자말을 쓰더라도 "생존할 수 있는"이나 "생존할 수 없는"처럼 적을 수 있는데, 조금 더 마음을 기울인다면 '살다-죽다-살아남다-사라지다' 같은 낱말을 넣을 때가 한결 알맞으며, 손쉽고 깨끗한 말투를 펼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처럼 적을 때 잘 어울린다고 느끼는 분이 많을 텐데, 가만히 살펴보면 우리들은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이라는 한문 말투 하나와 "사람이 살기 어렵도록 하는"이나 "사람이 살 수 없도록 하는"이라는 우리 말투 두 가지가 퍼져 있는 셈입니다. 우리는 '두 가지 말'을 쓰는 겨레라고 할까요. 겉으로 보이는 한국말과 속내로 한국말인 두 가지 말을.

 

 ┌ 우리에게 불가능은 있을 수 없다 (x)

 │

 ├ 우리한테 할 수 없는 일은 있을 수 없다 (o)

 └ 우리한테 할 수 없는 일이란 없다 (o)

 

 낱말뿌리나 말투뿌리를 캐 보면, '생존 불가능'은 일본말입니다. 그러나 일본말이라 하여도 우리가 쓰기에 좋다면 얼마든지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일본말이 아닌 고유한 토박이말이라 하여도 요즘 세상에서 쓰기에 알맞지 않다면 국어사전에 묻혀 버리고 마는 죽은말이 될 테고요.

 

 그렇다면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일본말 '생존 불가능'은 어느 쪽으로 바라보아야 할까요. 일본말이라 하지만 우리한테도 쓰기에 알맞거나 좋은 말로 여겨서 받아들이면 될까요. 일본말이고 아니고를 떠나 우리한테는 알맞지 않으니 걸러내거나 털어내거나 씻어내야 한다면, 스스럼없이 다듬고 거리낌없이 손질하며 거침없이 고쳐쓸 때가 알맞을까요.

 

 어느 쪽이든 우리 스스로 생각할 노릇입니다. 어느 쪽으로 가든 우리 스스로 길머리를 잡아서 말머리를 알뜰히 추스를 노릇입니다. 어느 쪽으로 나아가 말글살이를 꾸리든, 우리는 우리 말글살이를 우리 손으로 책임질 줄 아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hbooks.cyworld.com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말익히기#글다듬기#우리말#한글#국어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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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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