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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12월 19일 아침식사를 마친 아버지가 기차 시간 늦겠다며 황급히 나가신 지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아 골목에서 누군가가 "아버지가 돌아가셨데요!"라고 외치며 뛰어왔다. 청천벽력(靑天霹靂), 그야말로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었다.

 

아버지는 친아우처럼 지내던 분이 사업을 함께하던 친구에게 배신당하고 재판 도중에 화병으로 죽자, 그의 아들·조카와 함께 재판이 열리는 전주지법에 가려고 군산역 대합실에서 기차를 기다리다 갑자기 쓰러져 병원으로 옮겼으나 이미 숨이 끊어진 상태였다고 한다.

 

고함소리에 놀라 허겁지겁 뛰어나가 택시에서 잠자듯 누워 있는 아버지 시신을 만져보았더니, 그때까지 온기가 남아 있어, 통곡을 하면서도 병원에서 너무 빨리 나온 것 아니냐고 원망했지만, 미비했던 당시 의료시설을 두고두고 아쉬워할 뿐이다.

 

아버지의 급작스러운 죽음은 사춘기를 막 벗어나려는 나에게 충격이어서 현실로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평생을 부부 싸움 한 번 하지 않고 살아온 어머니와 결혼식을 보름 앞두고 있던 형님의 비통함에 비할 수 있겠는가.

 

비명횡사했던 해가 예순일곱, 그 나이가 되도록 잔병치레 한 번 하지 않았을 정도로 건강해서 충격이 더 컸던 것으로 여겨진다. 당시만 해도 환갑을 넘기면 장수했다고 하던 시절이어서 가까운 어른들도 애석해 하면서도 천수를 누리셨다고 하셨다.

 

워낙 건강하셔서 장례에 대한 준비나 계획이 없었기 때문에 애를 먹었다. 3일장으로 결정이 났지만, 당장 어디에 모시느냐가 급선무였다. 그러나 가까운 친인척들과 동네 사람들의 협조로 장례를 원만히 치르고 아버지를 산수가 좋은 곳으로 모실 수 있었다.

 

동네 사람들 궁금증도 풀어주고 떠나 

 

아버지의 죽음은 동네 사람들에게 세 가지 의미로 다가왔을 것으로 생각된다. 첫째는 함께 슬퍼하는 것이요, 둘째는 그동안 궁금하게 여겼던 우리 집 사정을 조금이나마 알게 되는 기회가 되었을 것이며, 셋째는 보기 드문 구경거리를 제공했다는 것이다.

 

충청도 광천읍의 작은 시골마을에서 비보를 듣고 달려온 50대 여인이 골목 입구에서 통곡하며 머리를 푸는 모습을 화성인을 본 것처럼 신기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쑤군댔고, 당시에도 보기 어려웠던 꽃상여와 애절하고 청아한 목소리로 만가를 부르는 기생들을 구경할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   

 

남편이 죽으면 아내는 머리를 풀고 통곡하는 게 상례였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어쩌다 한 번씩 다녀가는 미모의 여인이 이모인지, 고모인지, 작은 부인인지 궁금해하던 동네 아주머니들이 골목 입구에서부터 머리를 풀어헤치고 통곡하는 모습으로 '작은 부인'이라는 것을 확인했으니 얼마나 시원했을까. 

 

아버지 죽음은, 열심히 돈을 벌면서 집안 살림만 챙기고, 아버지만 끔찍이 생각하던 어머니가 착하고 어진 아내이기 전에 순정도 있고, 질투도 할 줄 아는 한 여성이었음을 알려준 사건이기도 했다.

 

어머니는 평소 "광천 엄니는 자식이 없어 불쌍헌 양반잉게 잘 허야 헌다!"고 말씀하셨고, 형제들도 아무 불만 없이 어머니 말씀을 따랐다. 그런데 10여 년이 지난 어느 날 얘기 끝에 "아버지 돌아가셨을 쩌그 머리 풀고 곡을 허다니, 그건 광천엄니가 잘못이지, 잘못여···."라며 처음으로 서운한 감정을 표출하면서 말을 잇지 못했는데 더 자세한 얘기는 다음에 하기로 하자. 

 

그 외에도 아버지는 배고픈 사람들에게 밥과 술, 그리고 웃음을 선물하고 가셨다. 끼니때마다 가족이 교대로 와서 밥을 먹는가 하면, 문상객들은 화투를 치며 밤새도록 술을 마셨고, 놀리고, 싸우고, 화해하느라 웃음소리가 그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부엌과 마당에서 음식을 지지고 볶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각종 음식을 만드는 모습을 지켜보던 그때가 아스라이 떠오르는데, 형님 결혼잔치 때 쓰려고 예약해놓았던 돼지도 수명이 앞당겨질 수밖에 없었다. 

 

시신 앞에서 올린 눈물의 결혼식 

 

형님댁에 갈 때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사진이 있는데, 동갑내기 형님 내외가 예복을 입고 찍은 사진이다. 그런데 최근에 찍은 사진이라서 옆에 걸린 약혼 사진과 어울리지 않아 어색하면서도 볼 때마다 가슴을 아리게 한다.

 

 

형님은 턱시도를 형수는 드레스를 걸치고 찍었는데, 부모 결혼사진이 없는 이유를 알게 된 자식들이 자리를 만들어줘 찍었다고 한다. 자녀의 효성도 가상하지만, 43년 전에 찍었어야 할 결혼사진에 비할까.

 

형수는 1943년 황해도 해주에서 부잣집 딸로 태어나 호강하면서 자라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언니와 함께 충남 광천읍으로 피난 내려와 사업하는 작은아버지 밑에서 '아버지'를 잊고 자랐다고 하니, 한과 눈물로 얼룩진 세상을 살아왔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결혼식은 1967년 1월3일에 치를 예정이었다. 축하객들의 박수와 환호 속에서 식을 올릴 생각에 군산과 광천읍 시골마을에 살던 예비 신랑·신부 가슴이 얼마나 뛰고 흥분되었을까? 짐작하고도 남는다. 그런데 결혼식을 보름 남겨놓고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 그보다 황망한 일이 또 있겠는가.  

 

아내가 죽으면 남편이 상주가 되고, 아버지가 죽으면 큰아들이 상주가 되는 유교관습에 따라 당연히 형님이 상주가 되었으며, 시신 앞에서 눈물의 결혼식을 올리고 굴건제복 차림으로 문상객을 맞이해야 했다. 결국, 아버지가 결혼식 사진을 빼앗아간 꼴이 됐는데 형님이나 형수나 안쓰러울 정도로 아버지 복이 없는 것 같다.    

 

황해도 해주가 고향이면서 3대 독자였던 아버지도 객지에 나와 살면서 결혼도 하고 아들 셋을 포함해서 7남매를 두었으니 저승에 가서 선대 어른들을 만나도 떳떳하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는데, 큰아들 결혼식 날짜를 잡아놓고 얼마나 기뻐하셨을지, 당시 정황을 보면 짐작이 간다. 

 

결혼 얘기가 오갈 때 며느리(형수) 깜이 동향이라고 기뻐하며 흔쾌히 승낙했던 점. 아들(형님)이 스물세 살 나이로 군 복무 중에 약혼을 강행한 점. 결혼식 잔치에 쓸 술과 음식을 추석 전부터 준비했던 점으로 미루어볼 때 상당히 흥분하고 조급해하셨던 것 같다. 

 

어쩌다 형제들이 모여 당시 얘기가 나오면 형님은 "갑자기 당한 일이고 어렸을 때라서 어른들이 하라는 대로 했을 뿐이지, 황망 중에 무슨 생각을 했겠느냐?"며 아쉬운 표정으로 당시를 회고하는데 아버지 복이 없다고 하기엔 상처의 골이 너무 깊은 것 같다.

 

죽었다고 곧바로 이별로 이어지지 않아 

 

밖에서 죽으면 '객사'라고 해서 시신이 집에 들어오지 못하는 게 일반적이었고, 들어가더라도 복잡한 절차를 밟아야 하던 시절이었다. 아버지도 예외가 아니어서 골목에서 원귀를 달래주는 의식을 치르고서야 집으로 모실 수 있었다. 어머니의 인생 상담사 역할을 했던 '총각 점쟁이'가 그 일을 주도했는데, 객귀가 붙어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행위였다고 한다.

 

아버지의 죽음은 곧바로 가족과의 이별로 끝나지 않았다. 3년은 너무 길다고 해서 1년 만에 탈상을 했는데, 문간방에 아버지 영정사진과 애장품, 상복·상정 등을 보관하는 상청을 차려놓고 살아있을 때처럼 끼니때마다 매(밥)를 지어 올렸고, 평소 아버지가 좋아하던 반찬을 만들거나 과일이 선물로 들어오면 상청에 먼저 올리고서 먹었기 때문이다.

 

멀리 떨어져 있어 초상 때 못 왔던 분들은 찾아와서 술을 따라놓고 절을 했다. 학교 급우들도 찾아와 조의를 표했는데, 삭망(음력 초하루 보름) 일에는 결혼한 누님들까지 참석해서 상복으로 갈아입고 곡을 하면서 마음으로나마 아버지를 만났고, 형님이 간단한 음식과 제주(祭酒)를 준비해서 아버지 산소에 다녀오기도 했다.

 

그런데 1년이 지나 탈상과 함께 상청을 치우고서 얼마나 허전했는지 모른다. 끼니때마다 매를 올려서 그런지 아버지가 곁에 있는 것 같았는데 치우고 나니까 할 일이 없어지면서 영원히 떠났다는 것을 실감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상청을 또 차릴 수는 없는 일, 형제들이 산소에 자주 다니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덧붙이는 글 |  <'죽음'에 관한 특별한 이야기> 응모글


태그:#아버지 죽음, #형님 결혼식 사진,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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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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