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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에 '죽음은 도둑같이 찾아든다'는 말이 있다. 이는 죽음의 돌발성을 지적한 말이다. 다시 말해 죽음은 누구에게나 '갑자기 들이 닥친다'는 뜻이다. 또한 '창백한 죽음은 가난한 자의 초막도 제후의 궁전도 두드린다'는 시구도 있다. 이는 죽음의 보편성을 노래한 것이다. 이처럼 죽음은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에게 예외 없이 주어진다.

하지만 이런 말들보다는 죽음에 대해 혐오감이나 거부감을 토로하는 말들이 단연 많다. 이것은 대부분의 인간이 죽음을 두려워하기 때문일 터이다.

진시황의 불로초 일화는 죽음을 거부하기 위해 직접 행동에 나선 이례적인 사건을 담고 있다. 그래서 진시황은 일면 무모하고 어리석어 보이지만, 기실 대부분의 사람이 만약 진시황과 같은 형세를 얻는다면 그보다 더한 행동도 불사하지 않았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요컨대 대부분의 인간은 죽음을 거부하려는 태도를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인간은 왜 죽음을 거부하는 것일까? 그것은 죽음이 갖는 종료성 때문일 것이다. 죽음은 이승의 모든 것들을 종료시킨다. 망자라면 필연적으로 이승의 아름다운 것들을 종료해야만 한다. 그래서 망자는 유감을 갖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모든 것이 여기에 있는데 왜 나만 혼자 떠나야만 하나?'

이런 소외감이 우리의 내부에 회오리바람처럼 감길 때, 우리는 대책 없이 비탄에 빠지거나 심지어 저주에 사로잡히게도 되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와 장자 그리고 페르캉의 죽음

소크라테스는 죽음을 육체와 영혼이 분리되는 것이라고 믿었다. 나아가 그는 육체를 '속박의 쇠사슬'로 보는 한편, 죽음을 '영혼의 해방'이라고 인식했다. 그러므로 그에 의하면 죽음은 삶에 비해 현저히 자유로워지는 결정적 계기가 된다. 따라서 그는 사람이 죽음을 싫어할 이유라고는 없는 법이라고 호언했다.

그는 슬피 우는 임종자 아폴로도르스에게, "이게 무슨 꼴인가?"라고 사뭇 힐난하면서 "참 이상한 사람들 다 보겠다"고 탄식했다고 한다.

영육분리설을 믿었다는 점에서 철학자 소크라테스의 죽음관은 오히려 종교적이다. 그리고 죽음을 해방이라고 보았다는 점에서 그의 죽음관은 대단히 낙관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는 죽음의 종료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죽음을 슬퍼하는 사람을 힐난하기는 장자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아내가 죽었을 때 곡하기는커녕 아예 두 다리를 펴고 앉아 질그릇을 두드리며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물론 여기에는 죽음을 대책 없이 슬퍼하는 사람들에게 주의를 주려는 위악적인 풍자가 담겨 있다고 본다.

장자는 죽음을 슬퍼할 필요도 없을 뿐더러, 죽음에 놀랄 까닭도 없다고 말한다. 그는 죽음이란 자연의 조화일 뿐이라고 확신했다. 삶과 죽음을 시간에 따라 진행되는 자연의 이치로 파악했다는 점에서 장자의 죽음관은 과학적이다. 그의 죽음관은 현대 이론물리학자들의 관점과 상통한다. 그는 죽음의 종료성뿐 아니라 그것의 돌발성마저도 전혀 인정하지 않았다.

소크라테스는 죽기 전 빚진 닭 한 마리를 갚아 달라는 유언을 했다고 한다. 이것은 죽음의 순간에도 여유를 보이는 일종의 유머였다. 하지만 소크라테스의 죽음관은 비논증적이라는 데에 문제가 있다. 그는 죽음에 관한 자신의 개인적인 신념을 토로했을 뿐이다.

육체와 영혼이 따로 있어 분리된다는 소크라테스의 말에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죽음이 좋은 것이라는 그의 주장이 솔깃할 수는 있겠지만 다소 종교적이어서 흔연히 수용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반면에 장자의 죽음관은 대단히 이성적이지만 그의 태도에는 약간 위악적인 면도 있어 보인다. 죽음이 자연의 이치라는 그의 말에는 동의한다. 하지만 그것은 우주론적인 관점일 뿐이다. 죽는 이나 주변인들의 입장에서 죽음은 냉혹한 시련이자 두려운 통과의례란 점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한다. 장자 식으로 자연의 이치라고 해서 즐겁게 노래한다면 태풍이나 수해가 몰려와도 그것을 자연의 이치라고 해서 좋아라만 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앙드레 말로의 소설 <왕도>에서 죽어가는 주인공 페르캉은 이렇게 말한다.

"죽음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죽어가고 있을 뿐이다."

이것은 사람은 자신이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인식할 뿐, 죽음의 세계에 입장하는 순간 그것은 인식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실존주의자들은 죽음이란 인식되지 않는 것이므로 존재하지도 않는다고 말한다. 일면 타당해 보이지만 이것 역시 크게 보아 죽음을 부인하려는 또 다른 노력일 따름이라고 본다.

누가 끄더라도 꺼야 할 불 아닌가

나는 소크라테스나 장자 그리고 페르캉보다 단연 인간적이고 자연스럽게 죽음을 맞이한 분을 가족으로 두고 있다. 그 분은 내 아버지이다. 아버지는 죽기 직전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 죽을 것 같으니 누워야겠다."

아버지는 살아생전 정규 교육을 한 번도 받지 못한 분이었다. 그래서인지 그는 이런 말씀을 더러 하셨다.

"배고픈 서러움보다 못 배운 서러움이 더 크니라."

정규 교육뿐 아니라 정규 직업을 한 번도 갖지 못한 내 아버지는 '권불십년'이라는 말을 곧잘 쓰셨다.

내 어머니는 당신의 남편을 '답답한 위인'으로 치부하곤 했다. 7남매의 생활과 교육을 담당한 측은 주로 어머니였기 때문이다.

6·25 때 아버지는 인민군 사역으로 비행장에 나갔다고 한다. 저녁이 되어 동네 다른 사람들은 다 돌아왔는데 당신의 남편만은 돌아오지 않았다고 했다. 그래서 어머니는 아기를 들쳐 업고 비행장으로 가 보았다고 했다.

미군의 폭격이 지나간 현장에는 땅거미가 내리고 있었고 연기와 불길이 남아 있는 가운데 오로지 당신의 남편 한 사람만 남아서 바삐 오가며 양동이로 불을 끄고 있었다고 한다. 어머니는 화가 치밀었다고 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정색을 하며 말했다고 했다.

"누가 끄더라도 꺼야 할 불 아닌가?"

아버지는 종교를 갖지 않았다. 대신 그는 당신의 조상에 대한 자부심이 남달랐다. 하지만 어머니의 기독교 신앙을 인정해주긴 한 것 같다.

"니 어머니 교회 안 다녔으면 큰 사기꾼 되었을지도 모른다."

위암 판정을 받은 아버지는 수술을 선택하지 않았다. 그는 조상들의 선영을 건사하고 싶어 했다. 나는 경비를 마련해 아버지께 드렸다.

"마음만 있다고 되는 일도 아니고 돈만 있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너는 나에게 두 가지를  다 보여 주었다."

선영 공사를 마친 아버지는 참으로 흡족해 하셨다. 그는 이듬해 가을 약 일주일 동안 홀로 여행을 다녀오셨다. 아버지는 그 여행에서 쇠고기 80근을 소비했다고 했다. 평생 자신에게 은혜를 준 전국 각지의 사람들을 찾아 쇠고기를 한두 근씩 돌렸다고 했다.

여행 다음 날 아침 아버지는 소파에서 텔레비전을 보다가 말씀하셨다.

"나 죽을 것 같으니 이제 누워야겠다."

자리에 누운 아버지는 15분만에 눈을 감았다.

수도자들은 '좌탈(座脫)'하는 것을 자랑으로 여긴다고 한다. 죽는 순간까지 앉아 있을 수 있다는 것은 죽는 순간까지 정신력을 잃지 않았다는 것을 입증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아버지는 앉아 있다가 일부러 누워서 돌아가셨다. 나는 아버지의 죽음이야말로 참으로 인간적이고 자연스러운 죽음이었다고 생각한다.

덧붙이는 글 | <죽음'에 관한 특별한 이야기> 응모글 입니다.



태그:#죽음, #소크라테스, #장자, #페르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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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과 평론을 주로 쓰며 '인간'에 초점을 맞추는 글쓰기를 추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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