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미리읽기 - 글쓴이가 드리는 말
[우리 말에 마음쓰기] ['-의' 없애야 우리 말이 깨끗하다] ['-적' 없애야 말 된다], 이 세 흐름에 따라서 쓰는 '우리 말 이야기'는, 우리 스스로 우리 말을 제대로 살피지 않고 있는 모습을 되돌아보면서 '우리 생각을 열'고 '우리 마음을 쏟'아, 우리 삶과 생각과 말을 한 동아리로 가다듬자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한자라서 나쁘다'거나 '영어는 몰아내자'고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다만, 우리 삶과 생각과 말을 어지럽히는 수많은 걸림돌이나 가시울타리 가운데에는 '얄궂은 한자'와 '군더더기 영어'가 꽤나 넓게 차지하고 있습니다. 쓸 만한 말이라면 한자이든 영어이든 가릴 까닭이 없고, '우리 말'이란 토박이말로만 이루어져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쓸 만한지 쓸 만하지 않은지를 생각하지 않으면서 한자와 영어를 아무렇게나 쓰고 있습니다. 제대로 우리 말마디에 마음을 쓰면서 우리 말과 생각과 삶을 가꾸지 않습니다. [우리 말에 마음쓰기]라는 꼭지이름처럼, 아무쪼록 '우리 말에 마음을 쓰면'서 우리 생각과 삶에 마음을 쓰는 이야기로 이 연재기사를 읽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ㄱ. 풍요(豊饒)

 

.. 과학자, 특히 물리학자들에게는 이런 일은 전례가 없는 풍요豊饒를 뜻하는 것이다 ..  《랠프 랩/표문태 옮김-핵전쟁》(현암사,1970) 40쪽

 

 '특(特)히'는 '이 가운데'나 '더욱이'로 손봅니다. '전례(前例)'는 '예전'이나 '여태'나 '그동안'으로 고쳐 줍니다. "뜻하는 것이다"는 "뜻한다"나 "뜻하는 셈이다"로 다듬습니다.

 

 ┌ 풍요(豊饒) : 흠뻑 많아서 넉넉함

 │   - 정신적 풍요 / 풍요 속의 빈곤 / 풍요를 누리다

 │

 ├ 풍요豊饒를 뜻하는

 │→ 넉넉함을 뜻하는

 │→ 배부름을 뜻하는

 │→ 돈잔치를 뜻하는

 └ …

 

 마음이 넉넉할 때가 있습니다. 돈이 넉넉할 때가 있습니다. 푸짐하게 먹으면 배속이 든든합니다. 세상은 온갖 물질문명이 넘치지만, 이러는 가운데에도 가난하고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한쪽으로는 넘치지만 한쪽으로는 모자랍니다. 조금이나마 넉넉하게 있으니 얼마든지 나누어 줄 수 있으련만, 그 돈이며 힘이며 이름이며를 얼마나 오래오래 간직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꽉 움켜쥐고 있는지 안타깝습니다.

 

 밥그릇만 넉넉한 우리들이라고 할까요. 마음그릇은 가난하고 생각그릇은 텅 비어 가며 넋그릇과 얼그릇은 채우지 못하는 우리들이라고 할까요. 밥그릇은 넉넉하니 집이며 자동차며 여행이며 무엇무엇이며 겉으로 보이는 몸차림은 잔뜩 꾸며 놓지만, 정작 마음그릇은 가난하기 때문에 내 속내와 마음결은 다스리지 못한다고 할까요. 이러는 가운데 저절로 말그릇과 글그릇은 조금도 채우지 못하는 우리들이라고 할까요.

 

 ┌ 정신적 풍요 → 마음이 넉넉함 / 넉넉한 마음

 ├ 풍요 속의 빈곤 → 넉넉한 가운데 가난함

 └ 풍요를 누리다 → 넉넉함을 누리다

 

 아름다운 밥그릇이 되고 고운 마음그릇인 우리들로 거듭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싱그러운 밥그릇이 되며 어여쁜 마음그릇인 우리들로 새로워지면 좋겠습니다. 언제나 자연스러우면서 해맑은 말그릇과 글그릇을 놓치지 않는 우리들로 다시 태어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기쁨 듬뿍 말마디에 담고, 사랑 듬뿍 글줄에 담는 우리들이면 얼마나 반가우랴 싶습니다. 즐거움 가득 말마디에 싣고, 믿음 가득 글줄에 싣는 동무요 이웃이요 식구 들이면 얼마나 반가우랴 싶습니다.

 

 한 마디 말을 하든, 백 마디나 즈믄 마디 말을 하든, 한결같이 알차고 바르고 티없는 우리들이 될 수 있도록, 우리 스스로 애쓸 수 있는 나날을 꿈꿉니다. 한 줄 글을 쓰든, 백 줄이나 즈믄 줄 글을 쓰든, 언제나 푸지고 깨끔한 우리들이 될 수 있도록, 우리가 손수 나서며 힘을 쏟을 수 있는 삶터를 꿈꿉니다.

 

 

ㄴ. 비가(悲歌)

 

.. 그들에게 굴착기 소리는 비가(悲歌)가 되었다. 진보의 고매한 사제들은 학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으며 거의 관심도 없었다. 엔지니어들에게 종(種)이라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겠는가? ..  《알도 레오폴드/송명규 옮김-모래 군의 열두 달》(따님,2000) 132쪽

 

 "굴착기(掘鑿機) 소리"는 그대로 두기보다는 "땅 파는 소리"로 고칠 때가 낫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진보의 고매(高邁)한 사제"는 "진보를 읊는 훌륭한 사제"나 "진보를 외치는 훌륭한 분"으로 손질하고, "관심(關心)도 없었다"는 "마음도 없었다"나 "눈길도 안 두었다"로 손질합니다. "종(種)이라는 것이"는 이야기 흐름을 살피며 "목숨붙이란"이나 "새 한 마리 목숨이란"으로 다듬고, '의미(意味)'는 '뜻'으로 다듬습니다.

 

 ┌ 비가(悲歌)

 │  (1) 슬프고 애잔한 노래

 │   - 그녀의 넋두리는 한 자락 비가처럼 듣는 이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  (2) 슬픈 감정으로 엮은 서정 시가의 한 갈래

 │

 ├ 굴착기 소리는 비가(悲歌)가 되었다

 │→ 땅 파는 소리는 슬픈 노래가 되었다

 │→ 땅 파는 소리는 구슬픈 노래가 되었다

 └ …

 

 '비가'라는 낱말을 어디에서 들었는가 곰곰이 헤아리니 〈루이노의 비가〉가 떠오릅니다. 그렇군. 〈루이노의 비가〉. 그런데 〈루이노의 비가〉를 떠올리면서도 이 '비가'는 선뜻 와닿지 않습니다. "루이노가 부른 슬픈 노래"로 적는다면 무엇을 말하는지 훤히 알 수 있지 않느냐 싶으나, 저로서는 "루이노의 비가"는 고개를 갸우뚱갸우뚱할 말마디일 뿐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래저래 고개를 갸우뚱갸우둥하면서 이 말뜻을 어렴풋이 헤아릴 수 있습니다. 아이들은 이 말마디를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옆지기도 처음에는 알아차리지 못하다가, 제가 넌지시 "'비가'란 말이지, 한자로 이렁저렁 적는 말이야." 하고 일러 주어야 비로소 알아차리지 않으랴 싶습니다.

 

 ┌ 한 자락 비가처럼

 │

 │→ 한 자락 슬픈 노래처럼

 │→ 한 자락 구슬픈 노래처럼

 │→ 한 자락 애타는 노래처럼

 │→ 한 자락 애틋한 노래처럼

 │→ 한 자락 슬픔 어린 노래처럼

 └ …

 

 초등학교 아이들한테 "너 '비가'가 무언지 아니?" 하고 물으면 아이들은 무어라 대꾸할는지 궁금합니다. 중학교 아이들은 어떠할까요? 고등학교 아이들은?

 

 문화를 다루거나 예술을 밝히면서 쓰는 말마디는, 문화를 빚거나 예술을 이루는 분들 깜냥껏 펼칩니다. 당신들로서는 '비가'만큼 잘 어울리는 낱말은 더 없으리라 여길 수 있습니다. 이 한자말에 깊이 빠져들거나 푹 젖어들어 있기에, 다른 낱말을 쓰고픈 마음이 없을 수 있습니다.

 

 곰곰이 돌아본다면, '슬프다-구슬프다-애타다-애틋하다-가슴 저리다-가슴 저미다-가슴 아프다-……'처럼 슬픔을 나타내는 낱말을 죽 이어 볼 수 있습니다. 이런 말마디를 앞에 넣고 '무슨무슨 노래'라고 적을 수 있습니다.

 

 ┌ 슬픈 + (무엇)

 └→ 슬픈노래 / 슬픈시 / 슬픈이야기 / 슬픈일 / 슬픈사람 / 슬픈영화

 

 어쩌면, 우리들은 '슬픈-'을 앞가지로 삼아 여러 가지 새 낱말을 지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기쁜-'을 앞가지로 삼아 이와 마찬가지로 새 낱말을 지을 수 있겠지요. '슬픈노래/기쁜노래'로, '슬픈일/기쁜일'로, '슬픈삶/기쁜삶'으로.

 

 다만, 우리 가운데 어느 누구도 이렇게 우리 새말을 빚으려고 해 보지 않습니다. 여느 사람이든 말글을 다루는 학자이든 국어사전 엮는 분들이든, 어느 누구도 우리 새말을 싱그럽고 즐겁게 빚어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hbooks.cyworld.com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묶음표 한자말#한자#우리말#한글#국어순화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