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지난 20일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영안실에서 박지원 의원이 정세현, 임동원 전 통일부장관, 문정인 교수와 함께 북한 조문단 접대 문제를 논의하고 있다.
지난 20일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영안실에서 박지원 의원이 정세현, 임동원 전 통일부장관, 문정인 교수와 함께 북한 조문단 접대 문제를 논의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지난 23일 영결식으로 마무리 된 고 김대중(DJ) 전 대통령 국장은 몇 가지 기록을 남겼다. 건국 이래 두 번째, 전직 대통령으로는 처음 치러진 국장이었고, 영결식에는 최대 인파(정부 공식 초청자 2만4000명)가 몰렸다.

북한 특사조문단이 남한 국장에 참석하기 위해 내려온 것도 처음이다. 2371명으로 구성된 장의위원회나 국회의사당 대형 분향소도 사상 최대 규모다. 국장 6일 동안 전국 182곳 분향소에서는 70만 여명이 조문행렬에 동참했다.

이처럼 사상 최대로 치러진 국장이었지만, 큰 사고는 없었다. DJ 서거 직후 장례 형식과 절차를 놓고 유족과 정부 사이에 불협화음이 생긴 점만 빼면 이번 국장은 한치의 오차도 없이 준비된 절차대로 착착 진행돼 갔다.

정부와 유족, 정치권과 시민사회, 북한 정부까지 참가한 국장이 성공적으로 치러진 데는 한 사람의 탁월한 조정력이 큰 힘을 발휘했다. '영원한 비서실장' 박지원 의원이다.

정부 '국장' 거부하자 "가족장 할테니 손 떼라" 맞서기도

지난 7월 13일 DJ가 입원한 이후 줄곧 곁을 지켜 온 박 의원은 8월 18일 오후 1시43분 DJ 서거 직후부터 정부와 유족, 민주당과 시민사회를 오가며 국장을 총괄했다. DJ 국장의 '총감독'이었던 셈이다.
  
DJ 장례식이 국장으로 결정된 것도 박 의원의 노력이 컸다. DJ 서거 직후 전화로 청와대에 통보한 박 의원은 병실이 수습되자 곧바로 청와대에 들어가 맹형규 정무수석을 만났다. 이 자리에서 그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위상에 걸맞게 국장으로 치르자"고 요구했다고 한다.

하지만 장례 절차 협의를 위해 병원을 찾아 온 이달곤 행정안전부장관은 "전직 대통령을 국장으로 치른 전례가 없다"고 난색을 표했다. 1시간 가량 이어진 협상에서 별다른 진전이 없게 되자, 참고 있던 박 의원은 버럭 화를 냈다. 그는 "그냥 가족장으로 치를테니 정부가 신경쓰지 마라"며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박 의원을 통해 유족의 강경한 뜻을 확인한 정부는 국장 요구를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국장 기간 동안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박 의원은 일일이 개입해 문제를 풀어갔다. DJ의 유품과 마지막 일기 공개나 북한 특사조문단이 가져 온 조화 위치 같은 민감한 일도 모두 그의 손을 거쳐 실행됐다.

DJ가 남긴 마지막 일기는 일부 내용만 추려 40쪽 분량의 소책자로 발간됐다. 출간되자마자 동이 나 10만부를 다시 찍은 이 소책자에는 정치적으로 민감한 얘기가 전혀 없다. 이는 DJ 국장 기간 동안 소모적인 정쟁을 일으키지 않으려는 유족과 박 의원이 내린 결정이다. '화해와 통합'이라는 DJ의 유지를 받든 것이기도 하다.

미공개된 일기에는 이명박 정부에 대한 비판적 의견과 후배 정치인들의 평가 등이 들어있다고 한다. 따라서 미공개 부분마저 공개된다면, 정치적 파장은 만만찮을 것으로 보인다.

북한 특사조문단 접대 역시 민감한 일이었다. 박 의원은 특사 조문단 접대를 정세현, 임동원 전 통일부장관, 문정인 교수 등 대북 전문가들에게 맡겨 원만하게 풀어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조화를 영결식 전날 동교동으로 옮긴 것도 탁월한 선택이었다.

북한 특사조문단은 국회 분향소에 도착한 뒤 김 위원장의 조화가 내려질 때까지 차에서 기다릴 만큼 조화를 소중히 다뤘다. 따라서 반북단체 등에 의해 조화가 훼손된다면 마찰이 일어날 수도 있었다.

박 의원은 이를 막기 위해 영결식 전날 몇몇 측근들을 불러 조화를 옮길 것을 지시했다고 한다. 조화 이동도 경찰의 경호 속에 비밀리에 이뤄졌다. 이런 사실을 모른 일부 자원봉사자들은 경찰이 조화를 옮기자 "정부가 김정일 조화를 탈취하려 한다"고 항의하는 작은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김정일 조화' 훼손 우려, 동교동 사저로 비밀리에 옮겨

영결식 당일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부인 권양숙씨와 아들 건호씨가 전직 대통령들과 함께 헌화할 수 있었던 것도 박 의원 덕분이었다. 노 전 대통령 서거에 "내 몸의 반쪽이 무너진 것 같다"고 애통해 한 DJ의 마음을 생각한 박 의원은 서거한 노 전 대통령을 대신해 유족들이 DJ에게 감사를 표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행정안전부에서는 이를 반대했지만, 박 의원은 끝까지 고집을 꺾지 않았다. 이참에 박 의원은 '영부인 예우에 관한 법률'도 만들도록 민주당에 건의했다고 한다.

DJ 서거로 나로호 발사를 연기해야 할 처지에 놓인 정부의 고민을 해결해 준 것도 박 의원이었다는 후문이다. 교육과학기술부는 19일 나로호 발사를 준비하고 있었지만, DJ 서거로 발사를 예정대로 해야 할지 고민에 빠졌다.

박 의원은 나로호 발사 여부를 의논하기 위해 찾아온 이주호 차관에게 "나로호를 예정대로 발사하는 것이 고인의 뜻일 것"이라고 조언했다고 한다. 비록 기술적 결함으로 19일 발사에는 실패했지만, 나로호가 카운트다운에 들어갈 수 있었던 데는 DJ 유족들의 배려 덕분이었다.
  
23일 국립서울현충원 안장까지 무사히 마치고 국장이 끝난 뒤에도 박 의원은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다. DJ 유족들을 대신해, 그는 국장에 도움을 준 각계각층에 한사람 한사람 감사 전화를 돌린다고 한다.

25일 삼우제가 끝난 뒤 돌아오는 승용차 안에서 그는 강희락 경찰청장, 주상용 서울지방경찰청장, 현충원 관계자들에게 전화를 걸어 고마움을 표했다. DJ 생전처럼 매일 아침 동교동에 들러 부인 이희호씨의 안부를 묻는 일도 빼놓지 않고 있다.

DJ 국장 기간 동안 박 의원이 보여준 성실함과 조정, 협상 능력은 또 한번 그를 돋보이게 한다는게 주변의 얘기다. 민주당 원내대표 경선, 천성관 인사청문회, 민주당 정책위의장 발탁 등 최근 이어진 정치적 고비마다 발군의 능력을 나타낸 박 의원이 DJ 서거로 또 한번 능력을 과시했다는 것이다.


#김대중#박지원#국장#김정일 조화#마지막 일기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2001년 오마이뉴스 입사 후 사회부, 정치부, 경제부, 편집부를 거쳐 정치팀장, 사회 2팀장으로 일했다. 지난 2006년 군 의료체계 문제점을 고발한 고 노충국 병장 사망 사건 연속 보도로 언론인권재단이 주는 언론인권상 본상, 인터넷기자협회 올해의 보도 대상 등을 받았다.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