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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 정부의 집회시위의 자유에 대한 침해와 광장공포증이 극에 달하고 있습니다.  경찰의 서울광장 경찰버스 봉쇄가 이어지고 있고, 서울시는 문화행사 이외에는 사용 제한을 내걸었습니다.  광장의 위기는 민주주의의 위기를 상징하기도 합니다. 시민사회와 야당은 광장의 위기에 맞서 주민직접발의라는 직접민주주의의 방법으로 광장을 시민의 품으로 찾아오는 서울광장조례개정운동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참여연대, 참여사회연구소와 공동으로 '광장을 열어라'는 주제로 공동기획을 진행합니다. 독자여러분의 관심 부탁드립니다.  <편집자말>
 문화연대, 인권단체연석회의, 참여연대 등 시민단체와 야4당이 4일 오전 서울 중구 서울시청 별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광화문 광장을 소통의 공간으로 개방'을 요구하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문화연대, 인권단체연석회의, 참여연대 등 시민단체와 야4당이 4일 오전 서울 중구 서울시청 별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광화문 광장을 소통의 공간으로 개방'을 요구하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 유성호

 

온 나라에 광장 폐쇄다. 서울광장은 공공기관 행사장이 되었고, 인터넷의 여론 광장에는 자기검열의 장막이 덮였고, 시민들의 집회장은 경찰버스로 물샐 틈 없이 포위되었다. 자유의 억압이다. 권리의 제한이다. 자유와 권리를 되찾아야 한다. 하지만 그런 소극적인 권리주장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광장이, 광장 폐쇄가, 광장의 회복이, 이 나라 민주주의의 운명에 얼마나 중대한 의미를 갖는지를 이해하는 것이다.

 

이 시대에 진행되고 있는 변화들은 기득권층에 대한 즉각적인 정치적 봉사와 신자유주의적 제도 개혁의 차원을 훨씬 넘어서고 있다. 'MB보수', 즉 청와대, 한나라당과 보수언론, 우익단체들을 중핵으로 하는 극우보수 세력은 그 이상의 의미를 갖는 뭔가를 하고 있다.

 

정권 초기에 '강부자 정권'의 본색을 경박하게 드러냈던 것과 달리, 이후 청와대와 한나라당은 장기적으로 한국사회에서 극우보수의 권력을 증대시키기 위한 요새와 토루를 쌓는 '정치적' 전략 거점들에 집중해왔다.

 

매스미디어 장악, 인터넷 통제, 행정·사법부의 수뇌부 장악과 수직적 통제체제 정립, 보수우익 사회단체 지원, 국민의 정치적 기본권 제약, 공안정국을 통한 국민 겁박, 저항행동에 대한 악마적 낙인 등은 모두 그러한 정치적 기획의 일환이다. 이들은 한국사회의 권력지형을 재구조화함으로써, 미래의 전격적인 공세를 가능케 해 줄 후방진지를 하나씩 구축하고 있다.

 

민주-권위 사이 회색지대서 움직이는 MB정부

 

지난해 촛불집회 이후 정권은 검경 등 국가강제기구를 동원하여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던 수많은 시민들을 협박하고, 체포하고, 처벌하고 있다. 이 시민들이 정권에 특별히 위험한 존재이기 때문일까? 아니다. 이를 통해 직접 탄압의 대상이 되지 않은 수백만의 시민들까지도 현 정권에 저항한다는 것이 위험한 일이라고 믿게 만들고자 함이다. 그리하여 '시민의 힘'이라고 하는, 민주주의의 가장 강력한 버팀목을 유약하게 만들고자 함이다.

 

그런 의미에서 기본권 투쟁은 단지 개개인의 권리 보장의 문제가 아니다. 거기엔 민주주의의 보루를 놓고 벌이는 진지 싸움이 걸려 있다. 서울광장을 놓고 벌어지는 봉쇄와 탈환의 기동전적 힘겨루기는 실은 그러한 진지 싸움의 일환이다.

 

서울광장은 여느 평범한 광장이 아니다. 그것은 대한민국 시민사회의 역동적 에너지가 응축되고, 역사창조의 힘으로 전환되어 온 장소다. 서울광장의 봉쇄는 그 에너지를 죽이는 것이다. 서울광장을 되찾는 것은 아래로부터 솟구치는 시민들의 힘에 분출구를 열어젖히는 일이다.

 

광장을 막고 있는 것은 얼핏 경찰의 물리력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막고, 때리고, 끌어내는 긴박한 기동전의 이면에서 작동하고 있는 진지전을 주시하면 진짜 힘은 다른 데서 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바로 '법치'의 기제다. 광장을 열기 위해 참여연대가 서울광장 조례개정 운동을 벌이고, 민변이 집시법의 위헌요소에 대한 헌법소원을 제기한 것은 현 정권의 통치양식이 '법치'의 이데올로기와 제도적 수단에 주로 의존한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이명박 정권이 국민의 민주적 기본권을 훼손하는 방식은 한국의 과거 권위주의 정권들과 몇 가지 측면에서 구분된다. 현 정권은 군부나 정보기관 등을 국내정치에 활용하기보다는 주로 검찰·경찰 등 제도화된 내무기관을 동원하고 있다. 반대 세력의 지도적 인물이 아니라 평범한 시민들을 처벌과 위협의 표적으로 삼고 있다.

 

고문·사형 등 반인륜적 수단으로 소수에게 극단적 고통을 주는 것이 아니라 다수에게 고통을 분배한다. 그래서 많은 시민들은 이 나라 민주주의에 뭔가 심상찮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지만, 현 정권을 명백히 반민주적 권력으로 심판하게 해 줄 선명한 선악 대비 상황에 항상 1㎜ 부족하다. 이명박 정권은 지금 민주주의와 권위주의 사이의 회색지대에서 움직이고 있다.

 

정권의 당파적 이익 대행자로 전락한 '사법부'

 

MB식 법치는 추악한 마귀 얼굴을 만천하에 드러내놓고 다니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세 구멍으로 번갈아 머리를 내미는 두더지 같다. '사법지배', '악법지배', '탈법지배'라는 구멍이다. 현 정권이 탈법적 수단에만 의존한다면 MB식 법치를 공격하는 건 어렵지 않을 것이다.

 

'법을 어기는 건 너다'라고 말해버리면 그만이다. 하지만 현 정권은 탈법과 악법이라는 두 수단을 혼합하고 있으며, 무게중심은 후자에 있다. 이들은 집시법 위반죄, 허위정보유포죄, 업무방해죄, 공무집행방해죄, 명예훼손죄, 사이버모욕죄, 저작권법저촉죄, 상관모욕죄, 아동학대죄 등 수많은 죄목을 찾아내서 '법에 근거하여' 기본권을 질식시키고 있다. 그래서 저항은 법을 바꾸고, 법의 오용과 남용을 비판하는 데 집중된다.

 

하지만 그 저항은 곧 사법지배(juristocracy) 체제라는 벽에 부딪친다. 원래 이 개념은 정치의 사법화, 즉 의회 정치를 통해 해결하지 못한 문제를 사법부의 결정으로 위임하는 체제를 뜻하는 것으로서 반드시 부정적 의미만을 갖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한국의 맥락에서 보면 사정이 다르다. 1987년 헌법의 산물이기도 한 사법지배 경향은 노무현 정권 하에서 정부·여당을 견제하고 정국주도권을 약화시키는 역할을 했지만, 이명박 정권에 와서는 오히려 사법부를 정치권력의 도구로 만드는 기제가 되었다.

 

사법지배는 이제 정치적 결정의 사안을 사법부에 '위임'하는 것이 아니라, 정권의 당파적 이익을 위한 정치 행위를 사법부가 '대행'함으로써 그것에 합법성의 외피를 입혀주는 체제를 의미하게 되었다. '거짓 법치를 진짜 법치로'라는 논리가 현실에서 한계를 갖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저항의 궁극적 동력은 '사람'에서 나온다. 각성되고 연계되고 결집된 시민들의 힘으로만 이길 수 있는 싸움이다.

 

시민이 떠받치지 않는 헌법은 '죽은 문자'

 

 참여연대, 시민사회단체 등 야 4당의 서울시당이 지난 6월24일 오전 서울 시청광장 앞에서 광장조례개정 서울시민캠페인단 발족 및 서명시작 기자회견을 열었다.
참여연대, 시민사회단체 등 야 4당의 서울시당이 지난 6월24일 오전 서울 시청광장 앞에서 광장조례개정 서울시민캠페인단 발족 및 서명시작 기자회견을 열었다. ⓒ 유성호

 

정권의 법치 담론에 대항해서 민주진보 진영은 헌법에 규정된 기본권과 그것의 우월적 지위를 강조해왔다. 이 주장은 오늘날 선진적 민주주의 국가에서 통용되는 법이론과 정치적 관행에 부합하는 것이다. 공권력과 법질서의 최종적인 규범적 기초가 헌법적 기본권에 있음이 널리 인정되고 있고, 이에 따라 정당한 공권력 행사의 범위는 기본권 규정에 기초하여 제한적으로 정의되고 있다. 오늘날 많은 나라에서는 국가가 질서유지의 필요성을 입증할 수 있는 상황에서조차도 집회·시위의 권리는 그에 우선하는 중요성을 갖는다고 간주한다.

 

하지만 기본권 보장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 단지 헌법에만 호소하는 것은 시민사회의 정치적 에너지를 사법지배의 체제 안에 가둘 위험을 안고 있다. 사람들은 기본권의 정치적 의의와 가치를 깊이 의식하기보다는 사법적 판결을 기다리는 수동적 주체가 될 수 있다.

 

그리고 정치권력에 유리한 판결이 내려지게 되면 저항의 동력은 쉽게 소멸될 것이다. 기본권이 헌법에 규정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을 방어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다수 인민이 이들 기본권을 불가침의 가치로 확신하기 때문에 근대 헌법은 그것을 승인했던 것이다. 행동하는 공화국 시민이 떠받쳐주지 않는 헌법 조항은 그냥 죽은 문자일 뿐이다.

 

민주공화국의 시민은 어떻게 정치적 기본권을 위한 투쟁에 참여하게 되는가? 그것 없이는 민주주의가 없고, 민주주의가 없으면 노예의 삶이 있을 뿐임을 각성하면서다. 집회, 결사와 시위, 공론장에서의 자유로운 표현과 토론은 권력자원에 접근할 수 없는 대다수 시민들이 자신의 의사를 정치제도에 반영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다. 이 통로가 막히면 민주주의는 위선적인 선거정치, 다수당 전제주의로 전락한다. 그래서 민주적 기본권은 대한민국 최상위의 법규범일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와 사회적 정의를 위한 중대한 '정치적' 가치를 갖는다.

 

광장을 열어서 무엇을 할 것인가?

 

MB정권은 장기적이고 구조적인 권력지형의 이동을 추진하고 있는 데 반해, 민주진보 진영은 매번 정부·여당이 터뜨린 이슈들에 격렬히 반발하는 반사적 대응을 반복해왔다. 나라가 요동칠 때마다 '경제파탄', '독재', '파시즘' 등 파국론적 진단을 내리고 당장 전민항쟁이라도 일으켜야 할 것 같은 함성이 터져 나오지만, 요동이 잦아들고 나면 보수정당들의 지지 기반은 재빨리 회복된다.

 

이 싸움은 긴 싸움이다. 아무리 주기적으로 세상이 들썩거린다 하더라도, 들불 같은 봉기로 일격에 세상을 바꿀 수 있으리라는 환상을 버려야 한다. MB보수의 진지전에 저항하는 민주진보 세력의 대응은 단발적 궐기에 그쳐선 안 된다. 하나하나의 싸움을 계기로 더 많은 사람들을 변화시키고, 연계하고, 힘을 응집해가야 한다.

 

광장을 여는 것은 그것을 위한 하나의 중요한 출발점이다. 그러나 광장을 열어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열린 광장이 단지 분노의 표출, 자족적 축제만을 위한 장소가 아니라, 더 많은 사람을 모으고 다지는 장소가 될 수 있게 하기 위해 우리는 거기서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광장을 여는 운동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작업을 함께 해나가야 한다.

 

☞ 서울광장 사용권리 되찾기 주민조례개정운동 사이트 바로가기

덧붙이는 글 | 신진욱 기자는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이자 참여사회연구소 부소장입니다. 


#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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