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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살자의 신원이 확인되었으니 필경 범인에 대한 프로파일링 요구가 거세질 터였다. 조수경은 피살자가 남긴 글이나 발언들을 취합해 달라고 김인철에게 지시했다. 그녀는 김인철의 자료가 오는 대로 작업을 시작하려고 했지만 그는 퇴근 시간이 되도록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조수경은 김인철이 있는 방으로 가 보았다. 김인철은 한 뼘 높이의 자료를 옆에 놓은 채 인터넷을 검색하고 있었다.

조수경은 퇴근을 조금 늦추기로 했다. 자기가 시킨 일을 하느라 퇴근도 생각하지 않고 일하는 후배를 두고 먼저 일어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한 시간쯤 지나서야 김인철은 한 더미의 자료를 보듬고 조수경의 방으로 들어왔다.

"죄송합니다. 오늘은 늦었으니 내일 보시면 될 겁니다."

김인철은 말을 마치자마자 핸드폰을 눌렀다. 여자 친구에게 하는 전화 같았다.

"쏘오리. 갑자기 일이 생겨서 조금 늦었어. 이제 갈 수 있어."

조수경은 김인철에게 미안한 마음을 느꼈다. 그녀는 쇼핑백을 구해 김인철이 가져다 놓은 자료를 챙겼다. 아무래도 내일 아침이면 언론이 떠들 테고, 그렇게 되면 자기도 일을 급하게 처리해야 될 것 같았다. 그녀는 자료를 집에 가져가서 읽기로 했다.

'THE CONSERVATIVES'

조수경은 밤이 깊도록 단어의 의미를 음미하고 있었다. 보수주의자, 수구파, 수구꼴통 말고는 다른 의미를 찾을 수 없는 말이었다. 피살자의 자료를 다 읽고 나니, 그것은 보다 더 확실해졌다. 조수경은 피살자 이광무의 어록에서 자신이 밑줄을 친 문장들을 다시 읽어 보았다.

-한국은 금강산 관광에만 북한에 5억 3천만 불을 지급했다. 북한 사정에 정통한 군사 전문가들은 북한이 이 돈을 가지고 러시아로부터 무기를 도입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남북 동포로서 6·15 선언 중에 있는 '자주적 통일'을 탓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북한이 말하는 자주 통일에는 미군의 철수가 전제되어 있다.

-김정일은 테러리즘 전문가이고 집단 살인 범법자이다. 그는 KAL 858기의 폭파범이며 아웅산 테러의 주범이다.

-통일에 절충안은 있을 수 없다. 북이 남을, 남이 북을 흡수 통일할 수밖에는 없는 것이다.

-북한은 지금 타타담담(打打談談)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이는'적이 우세할 때는 대화를 해서 시간을 벌고, 힘이 축적되었을 때 적을 친다'는 마오쩌둥의 전략이다.

-6·15 선언 때 한국 언론은 너무 호들갑들을 떨었다. 마치 한반도에 금세 통일이 오고 천지개벽이라도 할 듯이 아우성을 쳤다. 우리는 일본 언론의 침착성을 배워야 한다.

-남한이 지원한 식량을 북한 당국이 전쟁 비축용으로 전용하는지 아니면 평양 거주 고위 당, 군 간부들에게 배급하는지 알 수 없다.

-북한은 우리의 명백한 주적이다. 대한민국 건국이념과 합치하는 안보태세 원상회복이 민족 공영의 길이다. 북한처럼 우리도 내부 체제를 강화해야 한다. 통일 세력들은 더 이상 북측의 전략에 놀아나지 말라.

피살자 이광무는 남북 관계뿐 아니라 거의 모든 분야에서 김대중· 노무현 정부의 정책을 신랄하게 비판한 기록을 남겨 놓고 있었다.

다음 날 김인철은 조회가 끝나자마자 종이컵 커피 두 잔을 들고 조수경의 방으로 들어왔다.

"선배님, 자료 다 읽으셨나요?"
"모두가 비슷한 주장이라서 상세히 읽지는 않았어."
"사실은 자료를 두 개 만들어 저도 어제 샅샅이 다 읽었습니다."
"김 경위 생각은 어때?"
"다른 건 몰라도 'THE CONSERVATIVES'의 의미는 분명해지더군요."
"그런가?"
"그런데 선배님, 조금 우습지 않던가요?"

조수경은 김인철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김인철은 손바닥을 펴서 커피를 가리켰다. 어서 마시라는 표시였다.

"이거 내 거야?"
"그럼요."
"말을 해야지. 고마워."

조수경은 커피 잔에 입을 대며 물었다.

"뭐가 우습다는 거지?"
"고인에게는 안 된 말이지만 그의 논리가 너무 허술하지 않던가요?"

"한국에서 이른바 성공했다고 생각하는 아저씨들이 흔히 하는 말들이잖아."
"그런가요? 제 주변에는 그런 사람들이 워낙 없어서 저는 그 글들을 퍽 신기하게 읽었어요."
"신기했다고?"

김인철은 조수경보다 6,7세 정도 어렸다. 그는 작년에 갓 경찰대학을 졸업하고 경위로 임관한 지 불과 두 달밖에는 되지 않은 청년이었다. 조수경은 김인철에게 세대차 비슷한 것을 느끼며 물었다.

"그런 말들이 신기하게 느껴졌다는 것이지?"
"분명히 통일에 반대하는 아저씨인데, 수도 이전은 통일을 위해서 안 된다고 하잖아요. 신기하지 않으세요?"

"신기하다기보다는 논리적으로 오류라고 할 수는 있겠지."
"우리는 그런 것을 엽기라고 해요."

"엽기라... 하기야 엽기의 개념이 많이 바뀌었으니까. 우리 때에는 '썰렁하다'는 말의 의미가 크게 바뀌었었는데..."
"팀장님, 아니 선배님."

김인철은 갑자기 말소리를 낮추었다.

"그 분이, 그러니까 피살자 이광무씨가 보고 있던 곳이 어디였지요?"

조수경은 김인철을 이윽히 쳐다보았다.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그녀는 이미 꿰뚫고 있었다.

"피살자나 피살자가 내려다보던 법원· 검찰청 사람들이나 똑같은 종류의 사람들이라는 것을 범인이 알리려고 했던 게 아닐까요?"
"희미한 가설일 따름이야."

김인철은 웃었지만 조수경의 가슴은 격렬하게 방망이질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김인철은 그녀에게 새로운 사실을 하나 더 알려 주었다.

"선배님은 피살자가 고발의 명인이었다는 것을 아시는지요?"

김인철의 조사에 따르면 피살된 이광무에 의해 고발된 사람은 10여 명이 넘는다고 했다. 그 중에서 과거 반공법이나 지금의 국가보안법으로 기소되어 옥살이를 한 사람이 7명이나 된다고 했다. 나머지 사람들도 끌려가 모진 고문을 받거나 강도 높은 조사를 받고 겨우 풀려났다고 했다.

"그렇다면 원한에 의한 사건일 수도 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하겠네?"
"저는 그런 심증이 가는데, 아직은..."
"아직은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겠지."

조수경은 모든 가능성을 열어 놓지 않으면 수사가 곧 난관에 봉착하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그녀는 서둘러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왠지 사건과 수사는 끝없이 길고 긴 터널 속으로 이제 막 진입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지금 상태로는 도저히 프로파일링에 착수할 수가 없었다. 다만 두 번의 엽기적인 살인과 사체 유기를 쥐도 새도 모르게 아무런 흔적도 없이 할 수 있었다는 것은 고도로 훈련된 살인 기계가 아니면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 따름이었다. 또한 범죄는 완악한 폭력성과 정교한 추진력을 겸비한 조직에 의해 저질러지는 기획 살인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태그:#수구꼴통, #남북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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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과 평론을 주로 쓰며 '인간'에 초점을 맞추는 글쓰기를 추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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