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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킹은 자신의 자전적인 수필 <유혹하는 글쓰기>의 뒷부분에서 창작에 관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그는 소설에서 전체 플롯이나 줄거리는 중요하지 않다면서 이런 말을 한다.

 

"상황이 제일 먼저 나온다."

 

일종의 독특한 상황을 만들어놓고 자신이 만든 인물들을 그 속으로 던져넣는 것이다. 그런 상황은 대부분 위험한 상황이다.

 

그 안에서 등장인물들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는 스티븐 킹 자신도 모른다. 스티븐 킹에게 창작이란 창조가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일을 파내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스티븐 킹은 인물들을 곤경에 빠뜨리고나서, 그들이 벗어나는 모습을 돕거나 아니면 그들을 조정해서 안전한 곳으로 이동하도록 할 뿐이다. 어찌보면 스티븐 킹도 참 짓궂은 사람이다. 그의 장편소설들은 대부분 이런 상황을 바탕으로 한다.

 

흡혈귀가 뉴잉글랜드의 작은 마을을 습격한다면?(세일럼스 롯)

네바다 사막의 변두리 마을에서 정신나간 경찰관이 닥치는 대로 사람들을 죽인다면?(데스퍼레이션)

미친개에 쫓기던 엄마와 어린 아들이 고장나버린 승용차 안에 갇힌다면?(쿠조)

아홉 살 소녀가 거대한 숲 속에서 길을 잃어버린다면?(톰 고든을 사랑한 소녀)

 

악마에서 갱스터까지, 14편의 단편소설

 

2002년에 발표한 단편집 <모든 일은 결국 벌어진다> 역시 마찬가지다. 이 단편집에는 모두 14개의 단편이 실려있는데, 초현실적인 악마의 등장부터 1930년대의 갱스터까지 다양한 소재를 다루고 있다. 그리고 이런 소재들은 여러 가지 상황설정에서 비롯된다.

 

한 히치하이커가 죽은 자의 승용차에 올라탄다면?(총알차 타기)

살아있지만 전신이 마비된 사람이 사망자로 오인되서 부검실로 들어간다면?(제4호 부검실)

귀신들린 호텔방을 공포소설 전문작가가 예약한다면?(1408)

시냇가에서 낚시하는 소년에게 악마가 나타난다면?(검은 정장의 악마)

벼룩 시장에서 구입한 수채화의 풍경이 스스로 변해가기 시작한다면?(로드 바이러스, 북쪽으로 가다)

 

다소 황당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상황설정이다. 하나같이 등장인물을 위험하게 만드는 상황들이다. 또한 '등장인물이 무사히 곤경을 벗어날 수 있을까?' 하는 호기심이 들게 하는 장면이기도 하다.

 

이런 호기심 때문인지, <모든 일은 결국 벌어진다>에 실린 작품들은 대부분 빠르게 진행된다. 단편소설답게 장황한 서술이나 묘사를 생략한 채, 사건만을 잡아서 독자들에게 보여주고 있다. 독특한 상황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는 스티븐 킹의 솜씨는 장편이나 단편이나 마찬가지다.

 

그가 소재를 얻는 방법도 다양하다. 한 젊은이가 교외의 자기 집 배수구에 잔돈을 버리는 모습이 소재가 되기도 한다. 네바다의 다 허물어진 호텔에 묵었을 때는, 베개 밑에 놓여진 2달러 짜리 슬롯 칩을 보고 순식간에 글을 써내려 갔다. 스티븐 킹에게 "소재를 어디서 얻나요?"라는 질문을 던지면, "무엇이든 소재가 될 수 있다"라는 대답이 돌아올지도 모른다.

 

단편소설에 대한 스티븐 킹의 애정

 

흔히 스티븐 킹의 작품들을 '공포소설'로 분류하지만, 이 단편집에는 공포 그 자체를 느낄만 한 작품들은 많지 않다. 오히려 곤란한 지경에 놓인 인물들의 심리를 들여다보는 것이 더욱 흥미롭다. 쓰러져서 병원에 실려간 어머니를 만나기 위해 먼 길을 떠나는 아들, 절망과 자포자기 속에서 자살을 결심한 남자의 갈등, 금주법 시대에 우정과 의리로 뭉쳐있던 갱스터들, 어긋나버린 결혼 생활을 어떻게든 바로잡으려는 남자 등.

 

또한 이 작품집은 단편소설에 대한 스티븐 킹의 애정이기도 하다. 킹은 단편소설이 점점 사라져가는 것을 안타까워 한다. 단편소설들을 많이 싣던 잡지들은 점점 폐간되고, 단편집이 베스트셀러에 오르는 경우도 거의 없다. 무엇 때문일까?

 

종이책 대신에 전자책이 등장하는 시대다. 세월이 변해서 라디오 극도 사라져가고 셰익스피어 스타일의 희곡도 더이상 인기를 얻지 못한다. 하지만 킹은 아직도 '짧은 이야기'가 사람들에게 던져주는 매력은 남아있다고 말한다. 자신이 좋아하는 이야기도 모닥불 주변에 둘러앉아 사람들에게 들려줄 만한 유령이야기라고 한다.

 

그런 이야기야말로 요즘 같은 때에 적당할 것이다. 무더운 여름밤, 선풍기를 틀어놓고 침대에 누워 그 자리에서 한 번에 다 읽을 수 있는 흥미로운 (또는 무서운) 이야기를 접하는 것이야 말로 최고의 피서법이 아닐까. <모든 일은 결국 벌어진다>는 그런 피서법에 어울릴 만한 단편집이다.

덧붙이는 글 | <모든 일은 결국 벌어진다> 1, 2. 스티븐 킹 지음 / 조영학 옮김. 황금가지 펴냄.


모든 일은 결국 벌어진다 - 상 - 스티븐 킹 단편집

스티븐 킹 지음, 조영학 옮김, 황금가지(2009)


태그:#스티븐 킹, #단편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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