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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를 향해 가는 내 뇌리에는 10여년 전, 그곳을 지날 때의 풍경이 떠올랐다. 그때 나는 그 부근에서 직장생활을 했고, 전주를 가던 길이었다. 진안과 장수를 거쳐서 갔는데, 그 길목의 마을들은 마치 사람이 살지 않는 폐허(?)처럼 괴괴했었다.

"거기 말야. 잠 잘 때는 제대로 있을까?"

사실 여행을 하다보면 잠자리가 꽤 신경 쓰였다. 더구나 유명 관광지가 아니면 숙박시설은 열악하기 마련이었다.

"그래서 내가 알아 봤는데 장수읍내에 괜찮은 숙박시설이 두 군데나 있더라구."
"으음 그래, 그거 다행이네."

하지만 답변은 들었어도 의심은 완전히 가시지 않았다. 눈으로 직접 봐야만 믿는 내 예민한 촉수가 발동을 한 것이다.

"근데 그거 어디서 봤어?"
"여기저기 났더라구. 나도 그게 걱정돼서 여러 군데 뒤져 봤거든."

과연 그럴까? 하면서도 호기심이 생겼다. 쓸쓸한 소읍의 꽤 괜찮은 숙박시설이란 어떤 것일까, 궁금해진 것이다. 관광지도에서 내 눈길을 끌었던 곳은 단연 '뜬봉샘' 이라는 이름.

"난 뜬봉샘이 제일 가보고 싶은데. 무슨 강의 발원지이겠지."

경주마 목장 장수 경주마 목장에 드넓게 펼쳐져 있는 초원
▲ 경주마 목장 장수 경주마 목장에 드넓게 펼쳐져 있는 초원
ⓒ 이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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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우린 둘 다 그 강을 생각해 내지 못했고, 우선 경주마목장부터 가보기로 했다. 입장료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다행히 '공짜'였다. 드넓은 산비탈이 몽땅 초원이었고 말을 위한 시설들이 들어서 있었다. 말 병원에서부터 수영장, 교배소, 마사. 마사도 여러 형태로 나뉘어져 있었다. 일반 경주마 숙소가 있는가 하면 씨 수말 마사와 씨 암말 마사도 있었다. 씨 수말의 경우 40억이나 하는 말도 있다니, 난 말을 모셔야 하는 이곳 사람들은 참 힘들겠구나 생각하면서 둘러보았다.

정문에서 간단하게 안내를 받고 안으로 들어가는데 차가 소독물을 지나가도록 되어 있었다. 이곳의 방역인 셈이었다. '장수군 장계면 덕유산 육십령 자락 46만평 부지'에 드넓게 자리잡은 경주말들의 보금자리. 그런데 애석하게도 초원 위에서 한가로이 풀을 뜯는 말은 볼 수가 없단다. 날씨가 더워서 모두 안에 갇혀 있다고. 제일 처음 찾아간 곳은 말의 병원과 수영장을 지나 일반 말들이 사는 집.

경주마 마사와 말 이렇게 말이 우리를 구경하러 나왔다.
▲ 경주마 마사와 말 이렇게 말이 우리를 구경하러 나왔다.
ⓒ 이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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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보자 안에 있던 말들이 밖으로 어슬렁거리며 걸어 나왔다. 마구간은 쭉 연결돼 있어서 안에 있던 말들도 우리를 발견하고 구경하러 밖으로 나온 것이다. 말이 걷는 것은 참 멋지다. 매끄럽고 단단한 엉덩이를 약간씩 움직이며 걸어 나오는 그들의 모습. 나는 불현듯 '조나단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가 생각났다. 말의 나라에서 인간은 불결하기 짝이 없는 동물이었다. 욕심만 많고 동족끼리도 싸움이나 일삼는 파렴치한 동물. 그건 소설이지만 현실은 뒤바뀌어 인간이 말을 맘대로 이렇게 가둬놓고 사육을 한다.

씨암말과 망아지 어미 말이 망아지와 같이 살고 있었다. 말 목둘레에 말 이름이 써 있다.
▲ 씨암말과 망아지 어미 말이 망아지와 같이 살고 있었다. 말 목둘레에 말 이름이 써 있다.
ⓒ 이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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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잔뜩 심심해진 말은 지금 우리 사람을 구경하기 위해 우리 앞으로 나왔다. 그래서인지 말의 표정은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자유가 없어서 너무 심심하고 재미가 없다는 듯한 무표정한 얼굴이다. 다시 차를 타고 위쪽으로 올라가 드넓게 펼쳐져 있는 초원을 보고 씨말을 보았다. 그들은 바깥 마구간에서 망아지와 함께 있었다. 우리는 사실 초원에서 말이 겅중거리며 뛰어 노는 광경을 보고 싶었는데…. 하지만 어쩌겠는가, 더워서 그렇다는데. 그저 다음을 기약하며 아쉬움을 달래는 수밖에.

용소... 용쏘라고도 하는 물구멍. 덕산계곡과 방화휴양촌 중간 쯤에 있다. 경치는 최고!
▲ 용소... 용쏘라고도 하는 물구멍. 덕산계곡과 방화휴양촌 중간 쯤에 있다. 경치는 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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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산계곡은 계곡 입구까지 포장이 돼 있었다. 계곡이라 하면 대개 계곡 아래에 저수지가 있는데 이곳은 반대였다. 저수지를 지나자 계곡이 나왔다. 다른 곳과 달리 저수지 물이 계곡으로 들어가는 현상이었다. 입구에 차를 세우고 줄곧 물소리를 들으며 걸었다. 20분쯤 걸으니 세찬 물소리가 들려왔고 용소라고 하는 커다란 물구멍이 나타났다. 용소라고도 하고, 용쏘라고도 하는 정말 큰 물구멍이었다. 물도 많고 경치도 좋아서 '장수에 이런 풍경이 다 있구나'하고 우린 새삼 감탄하면서 바라보았다.

방화휴양촌 방화휴양촌에서 물놀이 하는 정경. 숙박시설이나 물놀이 시설이 제법 잘 갖춰져 있었다.
▲ 방화휴양촌 방화휴양촌에서 물놀이 하는 정경. 숙박시설이나 물놀이 시설이 제법 잘 갖춰져 있었다.
ⓒ 이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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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은 쭉 연결되어 방화동 가족 휴양촌까지 걸어서 갈 수 있었다. 용소에서 휴양촌까지는 한 30분 정도. 그러나 우리는 차가 있어서 용소에서 다시 나와 차를 타고 방화 가족휴양촌으로 가야 했다. 산을 돌아 다시 장수읍을 거쳐 가는 길이라 시간도 꽤 걸렸다. 방화가족휴양촌은 경치도 계곡물도 아주 좋았다. 용소에서 보았던 그 물이었다. 가족 단위 여행객들이 즐길 수 있도록 물놀이 시설도 있고 숙박시설도 잘 갖춰져 있었다. 물놀이 하는 아이들을 지켜 보던 우리 신랑 기어이 한마디 한다.

"여기 와서 한 이틀 산림욕 하고 물놀이도 하면서 지내면 금상첨화겠네. 심심하면 그늘에 앉아 책도 읽고, 선선해지면 용소까지 트레킹도 하고 말야."
"아무렴 나도 그러고 싶지. 하지만 보는 것만으로도 아주 좋고 시원한데 뭐."

마지막으로 뜬봉샘을 찾았다. 내비게이션은 뜬봉샘휴게소까지만 알려 주었고, 그 다음은 뜬봉샘을 가려면 거쳐 가야하는 마을을 물어물어 찾아갔다.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어찌해야 하나 망설여졌지만 뜬봉샘은 꼭 가야 한다며 마을 사람에게 또 물었다. 걸어서 얼마나 걸리는지, 길은 잘 돼 있는지.

"반은 차로 갈 수 있고, 거기서 한 20분 정도는 걸어가야 합니다."

다행이다. 우리는 신이 나서 다시 차를 타고 가파른 비탈길을 오른다. 길은 좁고 가팔랐지만 포장은 돼 있었다. 그러나 중간에 내려오는 차라도 만나면 오도가도 못할 지경이라 오르는 내내 아슬아슬했다. 포장도로가 끝나고 제법 넓은 비포장 길이 나타났다. 아무 안내도가 없어 비포장길을 무작정 따라가다보니 아무래도 이상했다. 다시 되돌아와 비포장이 시작되는 곳에 차를 세우고 둘러보니 곧게 올라가는 길이 보였다.

그런데 길에는 풀이 무성했다. 과연 끝까지 올라갈 수나 있을지 걱정이었다. 여기까지 와서 되돌아갈 수도 없고. 용기를 내서 우산을 들고 나섰다. 풀을 헤치며 올라가는데 계속 물소리가 들렸다. 물 소리는 들리는데 물줄기는 보이지 않고. 한참을 가다보니 데크가 숲 안쪽으로 연결돼 있었다. 데크를 따라 가보니 보이지는 않지만 숲 밑으로 꽤 많은 양의 물이 흘러간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물길... 데크를 따라 가서 보았던 숲속에 숨은 물길. 물소리가 아주 시원하게 들렸다.
▲ 물길... 데크를 따라 가서 보았던 숲속에 숨은 물길. 물소리가 아주 시원하게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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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신기하기도 하네. 어떻게 산에서 그렇게 큰 강이 시작이 될까?"
"검룡소도 그렇고 말야."

정말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신비라고 밖엔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길을 잘 모르니 두려웠다. 풀은 무성하고 빗방울은 간간이 떨어지고, 혹시 풀 숲에서 뱀이라도 불쑥 나오는 건 아닐까 긴장되었다. 위로 쭉 뻗은 길이라 끝도 가늠이 되지 않았다. 20분쯤, 하지만 그것도 꽤 길게 느껴질 즈음 안내도가 보였다.

뜬봉샘 안내도 무성하게 자란 풀숲을 헤치며 가다가 처음 만난 안내도...
▲ 뜬봉샘 안내도 무성하게 자란 풀숲을 헤치며 가다가 처음 만난 안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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뜬봉샘 드디어 고대하던 뜬봉샘 푯말이 보이고...
▲ 뜬봉샘 드디어 고대하던 뜬봉샘 푯말이 보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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뜬봉샘 약간만 떨어져서 봐도(오른쪽) 물이 잘 안 보여 가까이 가서(왼쪽) 들여다 보았다.
▲ 뜬봉샘 약간만 떨어져서 봐도(오른쪽) 물이 잘 안 보여 가까이 가서(왼쪽) 들여다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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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우리 앞에 나타난 뜬봉샘 푯말, 반가웠다. 그냥 바가지 우물이나 약수터처럼 움푹 들어간 곳에 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산 정상이 가까운 곳에 이런 샘이 있다니, 신비가 아니라면 설명할 길이 없어 보였다.

물 뿌랭이 마을 옛날엔 물뿌랭이 마을이었다고...
▲ 물 뿌랭이 마을 옛날엔 물뿌랭이 마을이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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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를 타고 내려오다 재밌는 안내도를 발견하고 차를 세웠다. 물뿌랭이 마을에 관힌 재밌는 이야기였다. 옛날 한 처녀가 이 마을로 시집을 오게 되었는데, 마을의 한 할머니가 하시는 말씀이 '그 마을이 바로 물뿌랭이 마을이여' 하셨다는. 그러니까 예전부터 이곳이 금강의 발원지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것 같다. 그래서 그런가 이 마을 이름도 '수분리'다.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우리는 장수에서 많은 곳을 둘러보았다. 지지계곡도 가고, 장수향교도 가고, 논개 생가지와 토옥동 계곡도 갔다. 잠은 장수읍에서 잤다. 그런데 아무리 시골이라지만 시가지는 너무나 엉성했다. 제과점에도 들렀다. 그리고 미리 알아놨던 두 곳의 숙박업소를 찾아 다녔다. 한 곳은 쉽게 찾았지만 다른 한 곳은 내비게이션에도 나오지 않았고 이곳 저곳을 둘러봐도 보이지가 않았다. 그러다가 포기하고 돌아설 즈음 간판을 내려놓은 그 숙박업소를 발견했다. 그동안 폐업을 한 것이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어 나머지 그 한 모텔로 들어갔다. 그리고 우리가 잡은 방안에 들어서자 서글퍼졌다. 제과점에 데코레이션 해 놓은 빵들도 그렇고, 인테리어라고 할 것도 없는 모텔 방의 도배지나 집기들도 그렇고. 정말 이건 '유치찬란'하다고 얕본다거나 흉을 보기보다 슬픔을 보고 있다고 해야 맞을 것 같다. 21세기 지방의 자화상이라고나 할까?

대기업 하나 잡지 못하고, 유명 관광지 하나 갖지 못한 지방의 설움이 이런 것인지, 정말 가슴이 아파왔다. 벌써부터 지방균형발전이 필요하다고 느끼고는 있었지만 이번 여행을 하면서는 더더욱 절실해졌다. 점점 인구가 줄어드는 이 시대에 텅 비어버린 우리의 고향을 마주하고 싶지 않다면 지방 균형 발전을 꼭 이루어야겠구나, 뼈저리게 느끼면서 돌아왔다.        


#장수군#경주마목장#뜬봉샘#덕산계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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