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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미안해"라고 했다. 나는 순간 멍해졌다. 엄마에게 뭐라고 대꾸를 해야 할지 몰랐다. 뭐든 첫경험 앞에서는 어리둥절한 법이다. 잠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을 깨고, "그럼 돈은 어디로 보내?"라고 물었다.

엄마가 "미안해"라고 했다. 쉰일곱된 엄마가 투박한 경상도 말투로 "미안해"라고 했다. 엄마도 '미안해'라고 하실 수 있는 분이었구나.

집을 떠나서 생활한 지 올해로 열세 해가 흘렀다. 올해 엄마가 쉰일곱이니, 내가 집을 떠났을 때 엄마 나이 마흔셋, 많지 않은 나이였다. 그때까지 나는 엄마가 우리 자매들에게 '미안해'라고 하시는 걸 들어본 적이 없다. 아니, 집을 떠나기 전뿐만 아니라 며칠 전까지도 들어본 적이 없다.

그렇다해서 엄마가 괄괄한 성격이신 것도 아니고, 드센 것도 아니다. 오히려 보통 엄마들보다 내성적이고 말수가 적다. 그런 엄마였지만 자식들에게 '미안해'라고 말하지 못했던 건, 시대 탓이 아닐까 싶다. 어느 부모나 그랬을 것이다. 부모도 자식에게 미안함을 느낄 때가 있겠지만, 굳이 표현하지 않았던 그런 시대 말이다.

감기몸살로 꼼짝도 못하고 누워 있는 딸에게, '많이 아프냐'고 물으며 이마에 손바닥을 얹어보는 대신, 밥 먹고 빨리 약 안먹냐고만 하시던 엄마였다. 아픈 딸을 보는 엄마 마음도 같이 아프다는 걸 알지만, 결코 그 감정을 표현하지 못했던 엄마였다. 그런 다정한 말들이, 경상도에서 평생 살아온 엄마에게는 참 간지러운지도 모른다.

그랬던 엄마가 나에게 처음으로 "미안해"라고 말씀하셨다. 엄마는 뭐가 그렇게 내게 미안하신 걸까.

현미쌀을 인터넷으로 주문할까 하다가, 엄마한테 부탁하려고 전화를 했다. 엄마는 현미를 먹으려면 쌀을 찧어야 한다 했다. 지금 당장은 없다고 했다. 그럼 10kg 정도 주문해서 먹어야겠다고 하니, 엄마는 작은 걸로 하나 사 먹고 있으면 현미 찧어서 보내주신다고 했다.

엄마는 나에게 일하는 중이냐고 물었다.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십만 원만 부쳐달라고 하셨다. '왜?'라고 물으니 7월 초에 MRI를 찍어야 하는데 그 비용이 오십만 원이라고 했다. 언니한테도 십만 원을 보태달라고 했다고, 나도 십만 원만 보태달라고 했다. 왜 MRI를 찍냐고 물었다. 엄마가 임파선 쪽이 좋지 않아 몇 주 전에 CT 촬영을 한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 이후 아무런 얘기가 없어 별 이상은 없나보다고 생각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랬는데 엄마가 MRI를 찍는다고 하자, 나는 깜짝 놀랐다.

"엄마, 무슨 임파선 암이라도 된대?"

엄마는 임파선결핵이라고 했다. 지금 약을 먹고 있는데, 그게 효과가 있는지 없는지를 MRI를 찍어서 확인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엄마는 정말 미안해 하는 목소리로 "미안해"라고 했다. 돈 십만원을 내게 부탁하면서 엄마가 "미안해"라고 하셨다.

결핵의 원인은 "예전에는 영양부족이 발병의 조건을 제공했다면 요즘에는 스트레스나 불규칙한 생활, 다이어트, 과로 등으로 면역력이 약화된 경우가 많아 결핵 유병률 증가의 또 다른 원인이 되고 있다"라고 인터넷에 나와 있었다. 내 눈에 '과로' 두 글자가 박혔다.

지난 오월 십팔일은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맞는 첫 제사였다. 나는 제사 준비도 도울 겸, 설날 이후 처음으로 고향집에 갔다.  집에 간 날은 제사 3일 전 금요일. 동생이 항암치료를 받고 퇴원한 날이었다.

 작년 아빠 생신 준비하느라 냉동실에서 꺼내놓은 해물
 작년 아빠 생신 준비하느라 냉동실에서 꺼내놓은 해물
ⓒ 이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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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즈음 고추농사를 하시는 부모님은 한참 정신없이 바쁜 날을 보내고 계셨다. 마침 그 주는 또 동생이 입원을 하는 주였다. 매일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엄마는 아빠 저녁을 챙겨주고는 바로 쉬지도 못하고 동생 먹을 것을 챙겨 병원으로 가셨다. 동생이 밤에 혼자 있을 수 있다고 해도, 엄마는 마음이 안 놓인다고 고집스레 병원에서 주무셨다. 그리고 대충 눈만 붙인 상태에서 새벽 네 시에 일어나 삼십여 분을 걸어 집에 가셨다. 아빠와 함께 아침을 챙겨먹고 다시 일하러 가셨다. 처음 아침마다 삼십여 분을 걷는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는, 엄마가 아침에 운동삼아서 걷나 보다고 생각을 했다. 그러나 나중에 다시 생각을 해보니 그 시각엔 버스가 다니지 않았던 것이다. 

동생이 퇴원을 하자마자 바로 할머니 제사 준비를 하셨다. 동생이 퇴원을 했으니 집에서 제대로 주무시기는 했지만, 농사일을 하면서 제사 준비까지 하는 엄마는 여전히 바쁘셨다. 나는 오랜만에 집밥에 제사 음식에, 입에서 음식을 놓지 않았지만, 할머니 제사를 준비하면서부터 엄마는 속이 좋지 않다고 죽을 끓여 드셨다. 약국에서 속 쓰릴 때 먹는 약이라고, 약을 한 뭉치 사오셨다.

할머니 제사가 지나고, 이틀 뒤 아빠 생신이었다. 오랜만에 집에 내려간 나는 아빠 생신때까지 집에 있다가 아빠 생신 밥을 먹고 서울로 가겠다고 했다. 잡채가 먹고 싶다고 했고 엄마는 다시 새벽같이 일어나 아빠 생신상을 준비하고, 잡채를 만드셨다.

서울로 올라온 며칠 뒤, 결국 엄마는 너무 아파서 언니가 병원으로 모셨다고 했다. 동네 병원에서 대학 병원으로 모셔가라고 했고, 대학병원에서는 조직검사까지 했다. 그 얘기를 듣고 걱정을 많이 했는데 이후 아무 얘기가 없어서 별 일 아니구나, 생각하고 있었다.

엄마는, 동생 병간호와 농사일, 할머니 제사준비와 아빠 생신상 준비로, 하루 서너 시간도 제대로 못 주무시면서 과로를 하셨다. 면역력이 약해졌고, 결국 임파선결핵이라는 병을 얻었다. 그리고는 어떻게 공짜 현미쌀 좀 얻어먹을까 싶어 전화한 딸에게 처음으로 병원비 십만원을 부탁하시면서 "미안해"라고 말씀하셨다.

병원에 입원했던 동생도, 생신이었던 아빠도, 지칠대로 지친 엄마에게 잡채가 먹고 싶다고 했던 나도, 임파선결핵에 걸린 엄마에게 '미안해'라고 하지 않았는데, 엄마는 백만 원도 아닌, 오십만 원도 아닌 십만 원을 부탁하면서 '미안해'라고 말씀하셨다. 동생 병원비로 백만원도 쓰시면서, 엄마가 십만 원을 부탁하면서 내게 '미안해'라고 하셨다.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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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살아갈 날이 살아온 날만큼 남아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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