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쿵쿵, 왁자지껄, 고샅길에 한바탕 난리가 났다. 남자도 여자도 어른도 아이도 불이 난 김대남씨 집을 향해 내달렸다. 빈 양철통을 들고 우물 쪽으로 내닫는 사람도 있었고 집에 길어다 놓은 물을 동이에 퍼 담아서 이고 가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뭔가 예사롭지 않은 구경거리가 있을 것 같아 가슴이 쿵덕거렸다. 희철이와 함께 골목길을 달려가고 있는데 누군가 내 손목을 덥석 잡았다. 어머니였다. 나는 영문도 모르고 다시 집으로 끌려 들어왔다. 어머니는 허겁지겁 물동이에 물을 채워 담았다.

"또가리 조깐 머리에 올례라."
어머니가 두 손으로 물동이를 불끈 들어 올리며 말했다. 나는 어머니가 역도 선수처럼 물동이를 뽑아 올렸다가 머리에 내려놓는 순간을 가늠해서 재빨리 똬리를 얹어 주었다.

"너는 동무 집에 불이 났다는디 빈손으로 갈 것이여?"
어머니가 물동이를 이고 서둘러 사립을 나가며 말했다. 나는 그때서야 불이 났다는 동백나무 집이 같은 학년의 봉순이네 집이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하지만 엄연히 남녀가 유별하거늘 여자아이를 동무라고 말하다니, 어머니의 어법이 참말 어색하고도 야릇하였다.

하지만 무엇인가를 해야 했다. 나는 절구통 옆에 있는 주전자를 들고 부엌으로 들어갔다. 물항(물을 길어 저장해두는 큰 항아리)이 거의 비어있다시피 했기 때문에, 그 가장자리를 잡고서 마치 철봉놀이를 하듯이 상체를 뽑아 올려 허리를 걸친 다음, 손을 뻗었다. 간신히 물항 속의 바가지가 잡혔다. 그렇게 해서 어렵사리 두 바가지의 물을 퍼서 주전자에 담았다. 평소 아버지의 술심부름을 하던 그 주전자에 물을 채워 들고서, 나 역시 비상출동의 대열에 합류하였다.

초가집 지붕의 한 귀퉁이가 이미 불에 타서 까맸다. 그러나 재미없게도 검은 연기만 하늘로 솟구칠 뿐 호쾌한 불길은 보이지 않았다. 몇몇 남자들은 연기 자욱한 지붕 위로 올라가 있었다.

"저, 물동우 올라간다, 받어라!"
"자, 여그 빈 양철통 나왔응께 얼릉 샘으로 갖고 달려가시오!"
"불이 집안에서 타올라오고 있응께 ,낫꾸로 지붕을 파헤친 담에 거그다 물을 붓어야 한당께!"
"집안에 사람 못 들어가게 해. 지붕 무너지면 큰일 나!"

우리 마을에는 동네 공동우물이 위아래 한 곳씩 두 군데 있었는데 사람들은 그냥 웃샘과 아랫샘이라 불렀다. 남자들은 불이 난 동백나무집 사립에서부터 하나는 웃샘으로 또 하나는 아랫샘으로 두 개의 대열을 만들어서 물동이를 손에서 손으로 빠르게 전달하고 있었다.

나는 불구경이 재미가 없었으므로 그 대열을 따라 우물 쪽으로 가보았다. 예닐곱 개의 두레박이 정신없이 우물물을 길어 올리고 있었다. 이미 우물의 수면도 한참 아래로 내려가서 이끼 묻은 속곳을 부끄럽게 드러내 보이고 있었다. 나는 괜스레 가슴이 뛰고 등줄기로 소름이 쭈르르 흐르는 것을 경험하였다.

'아무개네 집에 불 끄러 오시오!' 그 한 마디에 자기 집 부엌에 길어다 놓은 먹을 물을 부랴부랴 퍼이고서 내달리고, 잘 훈련된 병사들처럼 웃샘 아랫샘으로 대열을 이뤄 물동이를 전달하고, 집주인을 대신하여 위험한 지붕에 올라가 검은 연기와 마주 싸워주고…. 그것은, 동각 마당에서 윷놀이를 하다가 내가 던진 윷가락이 낙(落)이니 아니니 하며 멱살잡이를 하거나, 누군가 근거 없는 소문을 냈다면서 삼자대면을 하느니 마느니 하며 삿대질을 하던 어른들의 모습과는 영판 다른 풍경이었다. 그것은 무어랄까,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데서 오는, 그리고 제 가끔의 임무를 맡아 땀 흘리는 마을 사람들 모두가 갑자기 육친으로 다가오는 듯한 살가움에서 비롯된, 전율과 감동이었을 터이다.

우물에서 주전자에 물을 채워들고 다시 화재현장으로 왔을 때, 상황은 더욱 나빠져 있었다. 초기에 불길이 보였던 부엌 쪽에서 불길이 잦아드나 했더니 갑자기 헛간 쪽 지붕 위로 검은 연기가 치솟았다.

"거그를 낫으로 찍어서 헤집은 다음에 물을 붓으랑께 그래!"
마당에 있던 사람들이 소리쳤다. 지붕에 올라가 있던 사람이 연기 나는 쪽의 지붕을 낫으로 찍어 헤집는 순간 벌건 불기둥이 초저녁 하늘로 솟구쳤다.

"야아!"
나도 모르게 그렇게 소리쳤고, 옆에 있던 희철이는 아예 두 손바닥을 마주치면서 탄성을 내질렀다가 움찔 놀라 몸을 움츠렸다. 어른들의 움직임이 더욱 부산해졌다. 불씨가 자꾸만 옆집 지붕으로 날아갔으므로 동백나무집 옆집 주인인 점백이 아저씨는 자기 집 지붕을 덕석으로 덮고서 그 위에 물을 뿌렸다. 

불은 한밤중이 다 되어서야 가까스로 꺼졌다.
"아이고, 이 집도 뻿다구만 남었으니 아예 헐고 새 집을 짓어야겄구먼."
"그래서 도둑맞은 뒤끝은 있어도 불난 뒤끝은 없다고 하등가 안."
"소문 듣자 하니 우리가 걱정 할 일이 아닌 성불르데."
"뭔 소리여?"
"아, 이 집 쥔 김대식이 말이여. 그 사람 은근히 알부자라고 소문이 자자하든디?"
"헛소문이여. 아, 이 낙도 오지 동네 생활 뻔한디 어디서 뭔 짓거리를 해서 부자가 되겄어?"
"하기사."

기둥과 서까래만 꺼멓게 남은 집을 뒤로하고 집으로 돌아가면서 어른들이 저마다 한마디씩을 보탰다. 나도 손실이 있었다. 북적거리는 와중에 주전자 뚜껑이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던 것이다. 아버지의 막걸리 주전자인데…그러나 걱정할 일은 아니었다. 뚜껑이 없어서 막걸리가 찰랑찰랑 넘치거든 고놈의 주둥이에 입을 대고서 다섯…아니, 일곱 모금쯤 들이켜고 나면 주전자도 편해지고 나도 기분이 좋아질 것이기 때문에. 

"아니, 너, 봉순이!"
불에 탄 동백나무집을 뒤로하고 빈 주전자를 달랑거리며 집으로 향하려다가 변소 옆에서 누군가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려 다가갔던 것인데, 같은 학년 봉순이가 쪼그려 앉아 울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 애는 무릎위에 책보퉁이를 올려놓고 있었다.

나는 봉순이의 책보를 보자 갑자기 숙제 생각이 났다. 내일 학교에 가져갈 산수 숙제가 많은데 봉순이는 집이 불탄 바람에 숙제를 못 했을 거라는 걱정부터 들었던 것이다. 봉순이에게 뭔가 위로가 될 말 한 마디쯤은 해줘야 할 것 같았으나 아무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훌쩍거리고 있는 봉순이의 모습을 보자, 불기둥이 지붕을 뚫고 치솟았을 때 아주 잠깐이긴 했지만 희철이와 함께 탄성을 내지르며 신나라, 했던 내 자신이 심히 부끄러워졌다. 나는 결국 울고 있는 봉순이 앞에서 잠시 걸음을 자박거리다가 아무 말도 건네지 못 한 채 집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자리에 누웠는데 나는 한 가지 걱정거리 때문에 좀처럼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어른들 말에 의하면 불놀이를 오래 하면 그 날 밤, 잠을 자다가 오줌을 쌀 거라고 했다. 불놀이 정도가 아니라 활활 타오르는 불길 곁에서 오랫동안 있다 왔으니 틀림없이 오줌을 쌀 것이 분명했다. 절대로 오줌을 싸지 말아야지, 다짐 다짐하며 아랫도리를 감싸 쥐고 설핏 잠이 들 찰나에 마당에서 누군가의 기침소리가 들려왔다.

"자네한테 중하게 할 말이 있어서 왔네야."
불이 나서 집을 태워버린 바로 그 동백나무집의 봉순이 아버지였다. 자리에 누웠던 아버지와 어머니가 후다닥 일어나서 등잔불의 심지를 돋웠다. 나는 그저 자는 척하고 누워 있기로 했다. 

"어짜다가 집을 태와뿔고…상심이 컸겄네마는 어짜겄능가."
아버지가 봉순이 아버지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집이야 새로 짓으면 될 것잉께 크게 걱정 안 하네마는…"
"그라먼 뭔 일로…?"
"이, 이것을 조깐 보드라고."

봉순이 아버지가 들고 왔던 보퉁이를 방바닥에 내려놓더니 풀어보였다. 나도 궁금했으므로 아예 그 쪽으로 돌아누워서 두 눈을 뜨고서 넘겨다보았다.
"아니, 이건 돈!"
어머니가 놀라서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질렀다. 어둠속에 희끄무레하게 보이는 모습으로 짐작하기에 보자기에 싸 온 것은 지폐다발이었다. 그런데, 그 돈다발에서 썩은 이엉이 불탈 때 나던 것과 비슷한 냄새가 후끈 풍겨왔다. 

"불이 나서…안방 이불장 바닥에 감춰뒀든 돈다발이 이렇게 타부렀는디…."
보자기에 싸온 지폐가 괘 여러 다발이었는데 온전한 것이 하나도 없었고 절반이나 혹은 삼분의 일 정도씩 불에 타서 부스러져나간 모양이었다.

"언젠가 자네가 한 말이 생각나서…돈이 불에 타드래도 절반 이상이 남어 있으면 새 돈으로 바꿀 수 있다고…그거이 틀림없는 사실이여?"
"아암, 사실이제."
"아이고, 인자 살었네, 살었어!"
"흐음, 그랑께 그 소문이 사실이었구먼. 에이끼, 나쁜 사람!"

아버지가 봉순이 아버지를 나무랐다. 아버지가 말한 '그 소문'이 어떤 것인지. 그리고 왜 그를 나쁜 사람이라 했는지 나도 아는 바가 있었다.

한바탕 풍랑이 생일도를 휩쓸고 자나가고 나면 바다에서 이런 저런 부유물들이 갯가로 밀려왔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풍랑이 거세게 몰아치고 난 다음 날 아침이면 다투어 일찍이 바닷가로 나갔다. 더러는 가죽구두나 고무신짝을 줍기도 하였고(그런데 바다에 오래 떠다니다 밀려온 고무신짝은 짠물에 삭아서 하루도 못 신고 너덜너덜해지고 말았다), 뿌리가 뽑혀 밀려온 미역이나 곰푸(다시마)를 한 바구니씩 횡재하기도 했다. 풍랑에 밀려서 갯바탕으로 올라온 것들 중에는 전기가오리도 있었다. 처음에 우리는 고놈을 별 의심 없이 맨손으로 덥석 잡았다가 온몸으로 짜르르 흘러드는 전기 충격 때문에 기절을 할 뻔했다. 그러나 된장에 푹 삶은 전기가오리 고기의 맛은 별미였다.

그해 봄에도 한바탕 큰바람이 지나갔는데 봉순이 아버지가 돈다발을 주웠다는 소문이 동네에 파다하게 나돌았다. 어느 날, 용출리의 거짓말쟁이 장열이가 동백나무 집에 볼 일이 있어 갔는데, 김대식씨 부부가 부엌에서 물에 젖은 돈다발을 잔뜩 쌓아놓고 말리고 있더라는 것이었다. 봉순이 아버지는 동네 사람들에게, 돈다발이라니 무슨 소리냐며 펄쩍 뛰었고, 사람들은 어디까지나 거짓말쟁이 장열이의 얘기였으므로 '장열이 도깨비 만난 얘기' 쯤으로 여기고 지나갔다.

그런데 동백나무집 바로 윗집에 살던 두남이라는 홀아비가 갑자기 피를 토하고 쓰러져서 육지 병원으로 실려 가야 할 형편이 되었다. 백방으로 돈을 구하러 다녔으나 여의치 않았다. 두남이의 노모가 봉순이 아버지에게 찾아가서, 웃샘 옆의 논 한 배미를 팔 터이니 현금이 있으면 융통해 달라고 통사정을 했으나 봉순이 아버지는 그럴 돈이 어딨느냐면서 손바닥을 탈탈 털었다. 결국 제때 병원에 가지 못한 두남이는 세상을 떠났다.

"부탁이 있네."
봉순이 아버지가 우리 아버지에게 말했다.
"이 일은 절대적으로 비밀로 해주소. 내가 내일 육지 은행에 가서 새 돈으로 바꾸면 자네한테도 조깐 띠 줌세."
그러나 아버지는 봉순이 아버지의 그 은근한 제안에 콧방귀를 뀌었다.

"대식이 자네 그 돈 갖고 육지 은행에 가봤자 헛고생이여."
"뭔 소리여? 돈다발들이 반도 넘게 안 타고 남었응께 새 돈으로…."
"이 사람아. 라디오 늬우스도 못 들었어? 지난 6월 10일 0시를 기해서 화폐개혁을 선포한시롬, '환'을 '원'으로, 십대 일로 쳐서 교환해 줄 것잉께, 장롱에 있는 돈들 갖고 나와서 6월17일까지 바꿔라, 그랬다고 안."

"뭔 소리여? 시방도 육지에 나가면 10환짜리 갖고 물건을 살 수 있는디?"
"여그 신문 조깐 보드라고. 10환 이하의 소액권만 통용이 허용된다, 이렇게 안 나와 있다고. 자네가 갯바탕에 줏은 돈다발은 오백 환짜리하고 천 환짜리잉께 6월 17일 이전에 바꿨어야제, 이 사람아. 펭생을 벌어도 귀경 못 할 겁나게 큰 돈인디…안 됐구먼."
"그라먼 이 돈이 시방 다 못쓰게 돼 부렀다 이 말이여? 아이고, 내 팔자야…"

불타버린 집을 바라보면서도 눈물을 보이지 않던 봉순이 아버지는 쓸모없어진 돈다발을 앞에 두고 서럽게 울어댔다. 불난 집에 부채질 하듯 아버지가 이렇게 덧붙였다.
"그랑께 뭣땀시 거짓말을 해. 나쁜 사람 같으니라고. 안 그랬으먼 불쌍한 두남이도 살렸을 것인디…. 내가 동네 사람들한테 비밀은 지켜줌세."
나는 아버지가 봉순이 아버지에게 거짓말을 했다고 지청구를 하는 소리를 듣고서, 철봉대 밑에서 주워 감춰둔 새 돈 21원이 필통 속에서 기어 나와서는 아버지에게 고자질을 할지도 모른다는 걱정 때문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월요일이었는데 이번에도 애국조회가 없었다. 태풍주의보 때문에 선생님들이 또 육지에서 발이 묶인 것이었다. 화가 난 교장 선생님은 무서운 얼굴을 한 채, 슬리퍼를 요란하게 끌면서 복도 이쪽과 저쪽을 말없이 왔다 갔다 했다. 우리 교실에는 학교 소사 홍씨가 들어왔다. 욋소리쟁이 윤식이 아버지가 동네 소사인 것처럼, 그 역시 학교의 허드렛일을 맡아 하는 소사였는데, 어쩌다 선생님이 결근해서 교실에 대신 들어올 때면 꼬박고박 '홍 선생님'이라고 부르라 했다. 그리고 우리가 어려운 산수 문제 같은 것을 물어보기라도 할라치면 그는 갑자기 러닝셔츠를 걷어 올렸다.

"느그들 이 숭터가 뭣인 중 알어? 육이오 때 전장터에서 적군하고 싸우다 맞은 총알자국이여. 산수 문제가 그런 것이 중한 것이 아녀. 시방부터 내가 6.25 사변 얘기를 해줄 것이여."
홍씨가, 아니 홍 선생님이 들려준 전쟁 이야기는 참말로 재미졌다. 수업이 끝나자 나는 그를 따라서 복도로 나갔다.
"쩌그 홍 선생님, 할 말이 조깐 있는디라우…"
"뭣인디?"
"내가 쩌어번 날 아침에 운동장 철봉대 밑에서 돈을 줏었는디…"
"뭣이여? 돈을 줏어? 얼매를?"
"21원이오. 그란디 그 중에서 공책 사고 과자 사묵니라고 5원은 써뿔고 16원만 남었는디…"
"이놈의 자석 봐라. 돈을 줏었으면 주인 찾아주십시오, 하고 선생님한테 갖고 와야제, 놈의 돈을 갖고 공책 사고 과자를 사묵어부러? 이런 나쁜 놈. 남재기 돈이래도 일로 내놔봐!"

나는 나머지 돈 16원을 그에게 주었다. 그만큼이라도 주고 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그런데 이후 아무런 말이 없었으므로, 소사 홍씨가 그 돈을 주인에게 어떻게 돌려주었는지, 그 주인이 내가 자기 돈 5원을 몰래 써버린 사실을 알고 뭐라고 했는지 두고두고 궁금했으나 그 뒤로도 끝내 물어보지 못 하였다. 


태그:#이상락, #성장소설, #화폐개혁 , #돈다발, #화재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