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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테말라 이름 모를 작은 국경 마을의 버스터미널. 대형 버스가 아닌 봉고나 승용차로 승객을 실어 나른다.
 과테말라 이름 모를 작은 국경 마을의 버스터미널. 대형 버스가 아닌 봉고나 승용차로 승객을 실어 나른다.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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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5달러!"

국경 직원은 무표정이었다. 벨리즈는 입국할 때도 100달러나 걷어가더니 나갈 때도 또 출국세 명목으로 거금을 뜯어낸다. 비싸도 너무 비싸다. 도대체 아무리 자유라지만 자기 나라를 방문한 여행자에게 왜 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장 비싼 입·출국세를 뜯어내는지. 벨리즈 국경에서의 경제적 횡포에 눈물 흘리는 여행자들이 많다더니 나도 꼭 그 꼴이다.

누구 나 도와줄 사람 없나 주위를 둘러보아도 군중 속에 외로운 섬이 되고 만다. 직원은 뒷사람 기다리니 빨리 내고 가라는 듯 왼손을 연신 오므렸다 폈다 하면서 기능적인 액션으로 돈 달라는 시늉을 한다.

하루 종일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과테말라 넘어가기 전 남은 벨리즈 달러를 환전했는데 세마나 산타(부활절) 홀리데이 환율을 적용해 1벨리즈 달러에 3.4케찰 밖에 주지 않는다. 그나마 이것도 방금 전 환전상이 심각한 표정으로 이만하면 제대로 라는 3.2케찰 보다야 낫지만 생각보다 환율이 좋지 않았다. 그럼에도 벨리즈 지폐를 소모하기 위해 남은 벨리즈 돈을 모두 환전했다.

더구나 멕시코 지폐도 꽤 남아 있었는데 일부 환전상은 멕시코 대 과테말라 환율대비가 1:0.7 인데도 무슨 꿍꿍이에선지 1:0.5로 준단다. 지금 과테말라 국경으로 넘어가면 더 환율이 나쁘다고. 어디 속을 줄 알고. 환전상들은 길을 지날 때마다 계속해서 나에게 들러붙었다. 조금이라도 환차액을 노려보겠다는 심산이다. 수수료는 감수하겠지만 드러내놓고 뒤통수를 치겠다는 태도에 질려 멕시코 페소는 끝내 주머니 속에 담아 두었다. 이러니 국경 넘기도 힘들다.

봉고 위에 올린 내 애마 로페카(Ropeca).
 봉고 위에 올린 내 애마 로페카(Ropeca).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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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을 넘자 견딜 만했던 가랑비는 이제 폭우 수준으로 변했다. 어떻게 이 난관을 헤쳐가 볼까 도로의 간이 치킨가게 파라솔 아래서 카드놀이에 열중인 사람들에게 조언을 구했다. 그들의 대체적인 결론은 버스였다. 이렇게 비가 오니 길도 진흙길인데다 중간에 마을도 별로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항상 이런 대화에 나서기 좋아하는 이로부터 흉흉한 얘기도 들었다. 예전에 과테말라 자전거 여행하던 서양 여행자가 원주민들에게 습격당해 사망했다는 소름끼치는 소식 말이다. 물론 그 여행자는 원주민 관습을 이해하지 못하고 사진 찍다가 대노한 원주민들에게 관용 없는 즉석 재판을 받았단다. 같은 실수를 하진 않겠지만 괜히 닭살이 돋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결국 예정에 없던 버스를 이용하기로 했다. 하지만 이 정도 비라면 도로 사정이 좋지 않아 파인 길에는 버스도 속절없이 빠진다니 말 다 했다. 그저 하늘에 뜻에 맡기는 수밖에. 그런데 국경 근처에는 따로 버스 터미널 건물이 있는 게 아니라 봉고차와 승합차만 몇 대 주차되어 있을 뿐이었다. 그게 사람들이 이용하는 이 마을에 유일한 버스 터미널이란다.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 한 청년이 나에게 오더니 티칼가지 않겠느냐고 물어왔다. 티칼! 과테말라 그리고 마야 문명 최고의 유적지 아니던가! 과테말라 볼거리는 그것이 반인데 말이다. 빗속에서도 나는 그 거대한 문명의 역사를 듣는 순간 흥분되기 시작했다. 당장 그와 흥정에 돌입했다.

"얼만데?"
"70."
"아, 70케찰(약 2만원)?"

고개를 젓던 그가 말했다.

"Oh~ No, no. 70 US달러."

국경에서 티칼까지는 차로도 두어 시간 정도면 가는 거리다. 그런데 70케찰도 비싸다고 입이 삐죽 나올 기센데 그것도 아닌 70달러나 내라니. 아무리 자전거와 함께 라지만 아주 뽕을 뽑을 기세였다.

"네 자전거도 따로 실어야 하고, 무엇보다 다른 승객들과 부대낌 없이 너만 특별히 고급 택시(라고 하기엔 내 눈엔 큰 메리트가 없어 보였다)에 편안하게 데려다 줄 수 있거든. 비도 오는데, 어때?"

역시 관건은 비였다. 이렇게 비가 쏟아지는데 '네 딴엔 뛰어봤자 벼룩'이라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게다가 넉넉한 미국 여행자들이 70달러라는 거금에 개의치 않고 몇 차례 이용해서 다음 여행자가 부담되는 것도 있었다. 3명이면 20달러 조금 넘는 금액으로 차를 전세 내는 것과 같으니 말이다.

우는 동생을 달래던 누나. 신기하게도 사진 찍은 비용으로 동전 한 닢을 주니 울음을 뚝 멈춰버린 과테말라 아이.
 우는 동생을 달래던 누나. 신기하게도 사진 찍은 비용으로 동전 한 닢을 주니 울음을 뚝 멈춰버린 과테말라 아이.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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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기말고사 성적표 받아든 것 마냥 차가운 침묵으로 거절했다. 그러자 옳거니 대기하고 있었다는 듯 다른 호객꾼이 또 흥정을 해 왔다. 과테말라 밀림의 중심지에 위치한 플로레스까지 가는데 60케찰만 달란다. 사람 30케찰에 자전거 30케찰.

"그냥 자전거로 갈래요."

콧바람에 힘 좀 준 뒤 냉연히 뒤돌아섰다. 지금까지 자전거 하나 믿고 달려온 길, 이깟 어려움쯤이야 가볍게 뒤로하고 달릴 수 있으리라 여겼다. 사실 하루 5달러로 살아가는 자전거 여행자에게 몇 배나 되는 60케찰은 너무 비현실적이기도 했다. 하지만 비는 나의 의지를 꺾으려는 듯 더욱 거세지고 급기야 이젠 시야마저 확보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추위도 함께 엄습해 와 나도 모르게 자동반사로 이빨이 부딪히며 덜덜 떨고 있었다.

자전거와 비라는 두 가지 난점 때문에 협상의 비교우위를 점한 그들의 상술에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당당하게 박차고 나왔는데 상황은 나를 다시 그들에게 살근살근 다가가 친한 척해야만 하는 울고 싶은 현실로 내몰았다. 모르긴 해도 자전거에 관한 짐 비용은 내가 외국인이라서 따로 받는 듯 했다. 다른 과테말라인은 아무리 크거나 무거운 짐이라도 그냥 무료였다. 심지어 양 같은 살아있는 가축까지 싣는 것도 일상이다. 가끔 차별받는 외국인 전용 물가에 익숙하긴 하지만 그래도 이럴 때 아쉬운 건 어쩔 수 없다.

개봉박두! 세마나 산타가 다가오고 있다.
 개봉박두! 세마나 산타가 다가오고 있다.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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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도 오고 게다가 사람 몫까지 비용을 물어야 하는 자전거를 소유한 나. 협상은 완패였다. 결국 중간에 표를 파는 호객꾼과 흥정 끝에 플로레스까지 가는데 50케찰로 합의했다. 도로 사정과 극악의 날씨를 고려해도 썩 만족할만한 액수는 아니지만 내가 선택할 방법은 그리 많지 않았다. 플로레스가 티칼의 거점 지역이니 티칼 보는데도 한결 수월할 것 같다는 점과 곧 세마나 산타가 다가오니 구경하려면 어서 서둘러야 한다는 두 가지 타협점에 의의를 두기로 했다.

잠시 후, 차 안.

"아, 진짜 비싸지 않아요? 플로레스 가는데 자전거까지 해서 50케찰이나 냈단 말예요! 그나마 호객꾼에게 사정해 겨우 10케찰 깎았지 뭐예요."
"여보, 우린 얼마 냈지?"
"당신이랑 나랑 둘해서 40케찰 냈죠."

중남미의 별미. 엠파나다(Empanada)
 중남미의 별미. 엠파나다(Empanada)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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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과테말라, #자전거세계일주, #비전트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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