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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울린 한국전쟁 100장면>
 <나를 울린 한국전쟁 100장면>
ⓒ 눈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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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에서 전운이 감돌고 있다는 얘기들을 많이 한다. 서해나 전방에서 군 복무 중인 아들을 둔 부모들은 불안해서 잠이 안 온다는 얘기도 흔히 듣는다. 한반도를 구석구석 속속들이 파괴하고 생명을 앗아갔던 한국전쟁이 일어난 지 59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한반도에는 전쟁의 공포가 유령처럼 배회하고 있다.

전쟁을 경험하지 못한 세대는 전쟁을 피상적으로 이해할 뿐이다. 영화나 드라마를 통해, 역사 수업을 통해, 혹은 게임을 통해 간접적으로 접할 뿐이다. 간접적으로 접한 전쟁에서 실제 전쟁의 참상과 공포를 제대로 느끼기 쉽지 않다.

전쟁을 경험하지 못한 내게 전쟁을 처음 얘기해준 건 어머니였다. 전쟁에서 아버지를 잃고 홀어머니와 함께 살아온 힘겨웠던 얘기를 어린 아들 앉혀놓고 하시며 눈물지으시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하지만 어린 아들은 어머니의 얘기를 들으며 울지도 않고 눈만 끔벅거릴 뿐이었다. 얘기 끝에 어머니가 후렴처럼 덧붙이셨던 말이 있다.

"내 생전에 전쟁이 한 번 더 날지도 몰라. 그게 젤 걱정이다."

식민지 말기에 태어나서 해방과 한국전쟁을 겪으며 살아온 어머니의 삶에서 전쟁은 잊지 못할 상처로 남아 있다. 지나간 과거 속 전쟁의 공포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또 전쟁이 일어날 것 같다며 걱정하신다. 어머니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란 아들도 이젠 장년이 되어 한 가족을 이루며 살고 있다. 하지만 어머니처럼 전쟁에 대한 공포나 두려움을 내면화하고 살아온 건 아니다. 전후 세대의 한계 때문에.

사진집에서 어른거리던 어머니 얼굴

피란길에 부모를 잃은 아이가 울부짖고 있다.
▲ 전쟁 고아 피란길에 부모를 잃은 아이가 울부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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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을 경험하지 못한 내게 전쟁의 공포와 두려움을 생생하게 느끼게 해주었던 계기가 있었다. <나를 울린 한국전쟁 100장면>이라는 책을 통해서였다. 여섯 살 소년 시절 한국전쟁을 경험했던 작가가 미국 국립문서기록보관청 사진자료실에서 찾아낸 한국전쟁 관련 사진을 사진집으로 엮고, 한국전쟁을 경험했던 김원일·문순태·이호철·전상국 작가의 전쟁 체험담이 소개된 책이다.

"산길 들길 아무 데나 지천으로 흩어져 있던 시체더미들, 쌕쌕이(전투기)들이 염소똥처럼 마구 쏟아 떨어뜨리는 포탄, 포화에 쫓겨 가재도구를 등에 지거나 머리에 이고 허겁지겁 뛰어가는 피난민 행렬, 배만 불룩한 아이가 길바닥에 버려진 채 울고 있는 장면…"(책 속에서)

작가는 어린 시절 경험했던 한국전쟁의 기억을 사진 속에서 되살렸지만, 전쟁의 경험이 없는 나는 사진을 통해 열한 살의 나이로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던 어머니 얘기가 떠올랐다. "색씨! 색씨!" 외치며 쫓아오는 미군을 피해 산속으로 도망가던 이모 얘기, 추운 겨울 피난길에서 잠잘 곳이 없어 민가 아궁이 앞에 쭈그려 앉아 밤을 지새운 이야기, 피난길에도 빈부의 차가 있어 돈으로 음식 사 먹는 사람들이 마냥 부럽기만 했다던 이야기, 총에 맞아 돌아가신 외할아버지 땅에 묻던 이야기….

전쟁터에서 동생을 업고 있는 소녀
 전쟁터에서 동생을 업고 있는 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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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속 어린 여자 아이 모습만 모면 어머니 얼굴이 어른거렸다. 열한 살이었던 어머니도 전쟁 속에서 어린 외삼촌을 저렇게 업고 다녔겠지. 비록 전쟁에 이리저리 휩쓸려 헐벗고 굶주리며 살았지만 때로는 폐허가 된 양지쪽에서 천진한 웃음도 머금었겠지. 그 천진한 어머니가 있던 곳에도 쌕쌕이가 날아들고 십 원에 열두 개 준다던 아주 공갈 염소똥 같은 폭탄이 줄지어 쏟아졌겠지. 전쟁에서 남편 잃은 외할머니는 버려진 것들 주워 모아 어린 삼 남매 가슴에 품고 이 악물고 모질게 살아갔겠지.

죽은 그들은 말이 없지만

피란길에 죽음을 당한 사람들
 피란길에 죽음을 당한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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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집 속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주검을 확인할 수 있다. 부역한 죄로 죽은 사람들, 피난길에 총탄 세례를 받고 논두렁 밭두렁에 처박혀 죽은 민간인들, 어린 남매 남겨둔 채 죽은 어미, 뽕잎 채반 위의 누에처럼 널브러진 수많은 사람들의 시신….

작가 문순태의 전쟁 체험담에 등장하는 파나마 모자의 죽음도 있다. 처가에 다녀오던 길에 총 멘 네댓 명의 사내들에게 잡혀 회중시계·궐련·라이터·가죽지갑 등을 빼앗기고 점백이네 고추밭으로 끌려가 자신이 판 구덩이에 죽음을 당해 묻혀버린 사람. 그는 왜 죽었을까? 그들은 왜 파나마 모자를 죽였을까?

죽은 그들은 말이 없다. 하지만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들도 말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눈빛을 통해서만 자신의 심정을 드러낼 뿐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처형된 처형장에서 아직 숨이 붙어 있는 사형수가 뒤를 돌아보고 있다. 그의 눈빛에 담긴 의미는 무엇일까. 그의 발을 잡아끄는 사람은 또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다시는 되풀이되지 말아야 할 비극

염소똥 같은 폭탄이 줄을 이어 쏟아지고 있다.
 염소똥 같은 폭탄이 줄을 이어 쏟아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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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튼튼하고 마음씨 고운 이웃마을 처녀한테 중매를 넣어 청혼을 했고, 곧 성사가 되어 혼인잔치를 해서 세 분 웃어른한테 큰 기쁨을 주었다. 다음해 아들까지 낳고 내외가 합심해 농사에 힘을 쓰니 그가 샛골에 뿌리내리리라는 건 누가 보기에도 의심할 나위가 없었다. 만약 6.25 사변만 없었던들 그는 샛골에서 상봉하솔, 다복하고 늠름한 농사꾼 노릇에 자족하며 늙어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 여름의 난리는 그의 첫아들의 돌도 되기 전에 휘몰아쳐 왔다. 그는 일찌감치 의용군을 지원했다." (책 속에서 - 박완서 장편소설<미망> 인용)

한국전쟁은 한반도에 사는 모든 사람의 삶을 뿌리째 뒤흔들어 놓았다. 전쟁만 없었던들 아들 낳고 딸 낳고 다복하게 살아갈 튼튼한 사내와 맘씨 고운 처녀애들의 삶이 한국전쟁으로 인해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졌다.

<나를 울린 한국전쟁 100장면>을 보며 어머니 생각을 했다. 어머니가 어린 나를 앞에 앉혀놓고 전쟁 얘기를 해주신 뒤 마지막에 후렴처럼 덧붙이셨던 말도 함께 생각났다.

"내 생전에 전쟁이 한 번 더 날지도 몰라. 그게 젤 걱정이다."


나를 울린 한국전쟁 100장면 - 내가 겪은 6.25 전쟁

김원일 외 글, 박도 사진편집, 눈빛(2006)


태그:#한국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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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서 있는 모든 곳이 역사의 현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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