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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전쟁'이란 말은 우리에게 너무 쉬운 단어인지도. 컴퓨터 게임으로 수천 수만을 죽이고, 영화나 TV를 통해 다른 사람의 살해를 수도 없이 지켜보며 박수친다. 군대에 가면 제일 먼저 총부터 들어 사람 표적을 잘 맞추라고 강요한다. 미디어는 무엇을 하든, 어떤 문제를 꺼내든 다 전쟁이라고 말한다. "이건 전쟁이야! 여긴 전장이고, 너희들은 병사다. 싸워라." 사는 것도 다 전쟁, 돈 문제도 다 전쟁, 사소한 오해나 다툼도 그저 전쟁이라고 말하면 그만이다. 전쟁은 이미 우리에게 일상의 한 부분처럼 여겨진다.

전장, 병사, 총, 게릴라. 밥벌이를 위해 다니는 회사에서는 암묵적인 명령복종을 배운다. 무엇이든 집단이, 무리가 최고다. 개인의 생명이나 바람 따위는 하찮은 사치처럼 취급된다. 어디에서든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말을 들을 수 있다. 그 속에서는 폭력과 억압 등이 모두 비밀스럽게 허용된다. 사람들은 이제 누가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일렬로 늘어서고, 무엇을 하든 혼자보다는 거대집단에 속해있는 게 낫다는 것을 깨우친다. 그러나 집단마저도 온전히 믿을 수는 없다. 언제고 다시 누군가를 사지로 내몰 수 있으니까.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다는 확신은 어느 누구에게도 없다.

최근 북핵문제로 불거진 안보위협 탓인지, KBS 스페셜에 나온 아프가니스탄의 처참한 전장이 남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매일 이어지는 자살폭탄 테러와 전투, 죽음과 가난이 그들에게는 익숙한 일상이다. 두 다리 쭉 뻗고 배고픈 걱정 없이 편하게 잘 수 있는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하루는 탈레반의 위협에, 또 하루는 연합군의 공격에 시달린 그들은 매우 지치고 힘들어 보였다. 아니, 그마저도 뛰어넘어 이제는 눈물마저 말라 버렸으리라.

우리가 사랑이나 소소한 일상의 일부분 때문에 불면증에 시달리는 동안, 그들은 잠자는 내내 연합군의 폭격이나 탈레반의 침입으로 살해되진 않을지 걱정해야 한다. 하루가 지나면 앞에 앉아서 같이 밥 먹던 형제나 친구가 사라진다. 다음 날은 옆집, 그 다음 날은 또 누군가가 희생된다. 물론 피해자가 자기 자신이 될 수도 있다. 때문에 그들은 탈레반이나 연합군 그 어느 누구도 신뢰하지 않는다. 그들 모두가 '지켜주겠다'는 최면을 걸려고 애쓴다. "우리는 반드시 승리한다! 상대방은 결코 이길 수 없다." 두 진영 모두 그런 이야기로 사람들을 유혹한다. 건너오라.

그들이 잔혹하면서도 지루한 전투를 계속하는 동안, 사람들은 여기저기 도망치고 피해 다닌다. 누군가는 분노를 참지 못해 경찰이 되고, 또 다른 누구는 탈레반이 되어 불특정 다수에게 총을 겨눈다. 이념의 경계는 애당초 존재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단지 살기 위해서 숙명의 결단을 내린다. 그렇지만 그마저도 확실한 생존의 마침표를 찍어주지는 못한다.

탈출구 없는 전쟁, 벼랑 끝으로 내몰린 사람들

KBS 스페셜 <인간의 땅> 1편 '살아남은 자들'은 탈레반 세력이 점령한 도시 칸다하르의 제흐리 경찰서에서 일하는 한 소년의 시선으로 시작한다. 그 곳에서 사환이자 요리사로 일하는 압둘바리는 유일하게 돈을 벌어오는 집안의 생명줄. 아이의 눈에 비친 삶과 죽음의 경계는 극히 희미했다. 이미 너무 많은 것을 보았기 때문일까.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죽음이란 그에게 그저 숨이 끊어져, 더 이상 눈 뜰 수 없는 상황일 뿐이다.

아프가니스탄 전쟁은 사람들에게 죽음을 너무 쉽고 가벼운 것으로 만들었다. 누구든 죽을 수 있다는 상황은 모두에게서 꿈과 희망을 빼앗아갔다. 그들은 더 이상 꿈꾸지 않고 멀리, 그 너머를 내다보지도 않는다. 그런 그들에게 삶이란 그저 위태로운 줄 위의 곡예나 다름없을 것이다.

한 시간 남짓한 다큐멘터리를 보고 답답했던 것은 이 문제에 해결책도, 탈출구도 딱히 보이지 않다는 점이다. 연합군, 미군은 여전히 하늘 아래 모든 것을 관장하려고 한다. 경찰국가라고 스스로를 자부하는 것에도 알 수 있듯이. 왜 상대방이 자신들에게 위협을 느끼는지 생각해 보지는 않고, 그저 그들의 위협에 '강대 강' 전법으로만 응수한다. 그들은 전쟁이 벌어지는 어디에든 있고, 어디에서든 누군가를 쏘아 죽인다. 탈레반 역시 마찬가지로 심각한 상황. 자신들에게 동조하지 않는 이에게는 참수형을 택하고 닥치는 대로 사람들에게 살해하겠다고 위협한다. 어느 누구 하나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는 이 팽팽한 전투에서 평범한 서민들은 갈피조차 잡지 못한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지, 어느 누가 진정 믿을 만한 사람인지.

아프가니스탄에는 '왜 죽어야 하는지 이유도 알지 못하고' 죽어간 사람들이 버려진 휴지조각처럼 널렸다. 그들의 피로 물든 땅에는 아직도 누군가 살아가지만, 과연 이것이 인간의 땅일까. 전쟁을 영화나 게임의 일부분처럼 여기며 살아가는 이들에게 이는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뭐, 실제로도 그렇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치킨게임이 계속되는 현재 상황에서는 어느 누구도 영원한 평화를 장담할 수 없다. 위협을 일삼는 휴전선 너머의 나라가 있고, 고집부리며 강경책밖에 내놓을 줄 모르는 이기적인 정권이 있다. 게다가 머리 위에는 우리를 관장하며 심판하려고 하는 이른바 '경찰국가'가 있지 않은가. 순식간에 모든 것이, 우리 곁에 머물던 그 소중한 것들이 대기 속 먼지처럼 사라질 수도 있다.

그 곳이 어디든, 누가 있고, 어떤 첨예한 대립이 있든 중요한 것은 총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점이다. 두려워하며 계속 서로에게 총을 겨누기만 한다면 최악의 파국은 예정된 수순대로 진행될 것이다. 타인의 이야기는 눈곱만큼도 듣지 않으면서 그저 자신들의 이익만 추구하는 양립불가능의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어느 누군가는 '그만!'이라고 외쳐야 한다. 소통하기 어려울 만큼 매듭이 꼬여 있다면, 긴 시간 동안 하나하나 천천히 풀면 된다. 서로의 입장을 존중해 주면서 마음을 조금만 연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물론 현 상황에서는 이런 바람이 그저 상상 속 자위행위에 불과하다고 여겨지지만. 그래도 불가능한 꿈을 꾸는 것은 좋다. 그 불가능함이 닿는 지향점에 우리가 가질 수 없는 그 무언가가 있을 테니까.


#KBS스페셜#인간의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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