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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골집 쟁반자장. 해물이 많이 들어간 게 특징인데요. 먹고 난 후에도 속이 편해서 좋습니다.
 단골집 쟁반자장. 해물이 많이 들어간 게 특징인데요. 먹고 난 후에도 속이 편해서 좋습니다.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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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이 자장면 한 그릇씩 먹는 것도 큰 행사였던 시절에는, 중국집도 주문이 들어오면 주인이 직접 배달했다. 그런데 살림이 조금씩 좋아지고 장사가 잘되니까 배달하는 꼬마가 나타났고, 무슨 요리든 집에 편히 앉아서 시켜먹을 수 있게 되었다.

제주도 마라도까지 가서 '자장면 시키신 분!'이라고 외치는 광고 멘트가 아이들 세계에까지 파고들 정도로 세상이 변했다. 그런데 나라를 대표하는 대통령과 한나라당 사람들만 1980년대 전두환 시절에 멈춰 있는 것 같아 여간 안타까운 게 아니다.     

갯가에서 낚시하다 시켜도, 경기가 열리는 운동장에서 응원하다 시켜도 철가방을 든 자장면 배달원이 달려온다. 그렇게 야외에서 먹는 자장면 맛은 별미 중 별미라 아니할 수 없는데, '부뚜막 소금도 집어넣어야 짜다'고 골백번 설명해봐야 소용없으니 직접 야외에 나가서 시켜먹어 보시라, 맛이 어떤지. 

학창 시절, 퀴퀴한 냄새가 코를 찌르는 중국집 방에 둘러앉아, 관심 있는 여고생 근황을 얘기하면서 먹는 자장면 맛도 환상적이었다. 얼마나 맛있으면 시계를 사이좋게 며칠씩 돌려가며 잡혀 놓고 먹었을까. 그릇의 면이 조금씩 줄어드는 것을 보면 먹기 아까울 정도였다. 

지금이니까 듣도 보도 못한 값비싼 자장면들이 메뉴판을 차지하고 있지만, 학창 시절에는 간자장이 얼마나 고급스럽고 맛있게 보였는지 모른다. 내 돈을 주고 사먹든, 남이 사주든 식대를 치르는 사람이 큰맘을 먹어야 시켜먹을 수 있었으니까.

자장면 얘기를 하다 보니까 돌아가신 아버지와 셋째 누님, 그리고 돼지고기 비계 찌꺼기를 얻어먹으려고 중국집 주방장에게 사정하던 초등학교 시절과 자장면을 처음 사주었던 급우의 곱상한 얼굴 모습이 시나브로 떠오른다.

# 자장면 냄새도 못 맡게 했던 아버지

 단골 중국집 자장면, 자장면 한 그릇을 시켜도 꼭 김치가 나오는데요. 맛도 좋지만, 우리 전통음식을 대접해주는 것 같아 흡족합니다.
 단골 중국집 자장면, 자장면 한 그릇을 시켜도 꼭 김치가 나오는데요. 맛도 좋지만, 우리 전통음식을 대접해주는 것 같아 흡족합니다.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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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 가면 나보다 못사는 아이들도 아버지를 따라가서 자장면을 먹고 왔다며 자랑을 늘어놓았다. 그렇지 않아도 아버지가 늙은 게(초등학교 3학년 때 환갑이었음) 가장 슬펐는데 그런 얘기를 들을 때는 나 자신이 죽고 싶도록 싫어졌다.

그런데 아버지는 자장면을 사주기는커녕 자장면 냄새도 맡지 못하게 했기 때문에 더욱 기억에 남는다. 어쩌다 멀리서 귀한 손님이 오시면 자장면을 시켜먹었는데, 냄새가 판자울타리를 넘어갈 정도로 온 집안에 풍겼다. 그 고소한 냄새라도 맡으려고 샘가에서 놀면 아버지는 눈에 거슬렸는지 꼭 밖으로 쫓아내셨다.

자장면 시키는 심부름도 다녔고, 경제적인 여유가 있었음에도 돌아가실 때까지 한 그릇도 얻어먹지 못했다. 친아버지이기에 망정이지 작은아버지나 큰아버지 아래에서 자랐다면
차별받고 살았다며 두고두고 손가락질을 하거나 슬퍼했을 것이다. 그렇게 살았다는 것이지, 아버지를 미워해 본 적은 한 번도 없다.

# 간자장밖에 몰랐던 셋째 누님

 단골집 잡채밥, 값(6,000원)이 큰 부담이 없어 밥맛을 잃었을 때 시켜먹으면 좋지요. 한두 달에 한 번 정도.
 단골집 잡채밥, 값(6,000원)이 큰 부담이 없어 밥맛을 잃었을 때 시켜먹으면 좋지요. 한두 달에 한 번 정도.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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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친구들에 비해 몇 년 앞서 돈을 만지기 시작했던 나는, 사업이 그런대로 잘되어 형님과 술자리도 자주 했고, 심심할 때는 가족과 외식도 했다. 어머니를 모시고 형제들과 처음으로 중국집에 갔을 때 이야기인데, "오늘은 호주머니 사정이 좋으니까 각자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부담 느끼지 말고 주문하세요"라고 말했다. 

어머니, 형님, 형수, 누님들, 조카 중에는 잡채밥, 잡탕밥, 탕수육에 팔보채와 유산슬을 시키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데 조용히 있던 셋째 누님이 힘차게 "나는 간짜장!"이라고 하기에 더 비싸고 맛있는 것으로 주문하라니까 요리 이름도 모르거니와 간자장이 최고 맛있고 또 먹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 후에도 가족동반으로 중국집에 여러 번 갔는데, 셋째 누님에게 조르다시피 해도 변함없이 "나는 간짜장!"이었다. 다른 요리를 먹어보라고 권해도 20년이 넘도록 '간짜장'을 고집했는데, 몇 차례 반복되다 보니까 별명이 되었고, 지금도 형제들이 모이면 '나는 간짜장!'이라고 놀리면서 웃음바다가 되곤 한다.

# 돼지고기 비계 찌꺼기 얻어먹던 추억 

지금은 비싼 쟁반 자장면도 옛날 맛이 나지 않는다고 투덜대는 이들이 많다. 당연하다. 옛날 자장면이 맛있는 가장 큰 이유는 고소한 돼지고기 기름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식용유를 사용하는 지금과 맛이 차이가 날 수밖에 없는데, 선조들의 제사상에 오르는 부침개 역시 다를 게 없다.  

검은 철판 위에 돼지고기 비계로 기름을 내고 남은 찌꺼기가 바삭바삭하고 고소한 과자 이상으로 맛있다는 사실을 아는 이들은 별로 없을 것 같다. 부침개를 부치는 아주머니들 옆에 앉아 심부름도 하면서 튀김처럼 바싹 마른 돼지고기 비계를 얻어먹던 기억이 새롭다. 

식용유가 없던 시절에는 중국집 주방장들도 한가할 때는 돼지고기 비계를 검은 철판 위에 올려놓고 기름을 짜는 게 일이었다. 학교가 파하면 쌍성루 골목으로 가서 주방장 아저씨에게 기름을 뺀 돼지고기를 몇 개씩 얻어먹었는데 얼마나 고소하고 맛있었는지 모른다.

# 처음으로 자장면 맛을 보여준 급우

1960년대 초에는 20원(중국집 기준), 1970년대 초에는 60원, 1980년대 초에는 400원, 지금은 2500원에서 4천 원까지 값도 다양해진 자장면, 비록 시장에서 파는 싸구려였지만, 급우가 사주는 자장면을 먹는 그 순간은 몸이 하늘을 나는 것 같았다. 세상에 태어나 초등학교 6학년이 되어 처음으로 자장면 맛을 보았고, 감사한 마음마저 더해졌으니 어찌 감격스럽지 않겠는가. 

중국집에서 기술을 배워 시장에 가게를 낸 것으로 보이는 아저씨가 땀을 뻘뻘 흘리며 만든 자장면을 먹었는데 한 그릇에 7원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초등학교 6학년 때였으니까 지금으로부터 47년 전쯤 일이다. 

학교를 달리 선택한 관계로 서른이 넘어서야 만났는데 "야 너네 집에 갔을 때 아버지가 벽장을 열더니 소쿠리에서 한과를 꺼내주시더라. 그 한과 맛을 지금도 기억허는디 기가 막히더라. 얼마나 고맙고 미안헌지 엉덩이를 일으킬 수가 없더라고··"라고 하기에 아버지 덕으로 자장면을 얻어먹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생각할 때마다 입에 침이 고이는 그때 그 자장면 맛도, 돈을 치른 급우도 지금까지 잊지 못하는데, 고향으로 이사해서 저녁이라도 먹으려고 찾으니까, 3년 전 위암으로 세상을 떴다고 해서 얼마나 놀라고 실망했는지 모른다. 명복을 비는 일 외에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중국집에서 탕수육을 시키면 빨라야 30분, 늦으면 1시간 넘게 기다리기도 했다. 이유는 냉동실은커녕 냉장고를 가진 음식점도 드물었기 때문이었다. 시장이 코앞이라서 중국집 주인들이 자전거를 타고 정육점에 다녀가는 것을 자주 봤는데, 물어보니까 주문이 들어오면 돼지고기를 한두 근씩 사다가 요리를 한다고 해서 알게 되었다. 

친구들과 중국집에 가서 "어이, 여기 탕수육 하나에 고량주 두 병!"이라고 주문하면 계산대에 앉아있는 주인이나 주방의 주방장이 "예, 곧 갑니다!"라고 시원하게 대답한다. 그런데 그 대답이 탕수육이 곧 나온다는 게 아니라 고기를 사러 간다는 뜻이라면서 웃던 일들이 자장면 냄새와 함께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아, 옛날이여!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신문고뉴스와 한겨레필통)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자장면의추억#간자장#잡채밥#쟁반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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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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