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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플의 시국선언' 써 보겠냐는 부탁을 받았는데, 어때? 쓰고 싶은 내용 있어?"

"너 지금 몸 안 좋으니까 잠깐 눈 좀 붙여. 내가 타이핑해 놓을게."

 

마침 우리도 뭔가 말하고 싶던 차에 잘됐다 싶었다. 그러나 우리는 다소 긴장했다. 인터넷을 뒤져 각계각층의 시국선언을 찾아봤는데, 다들 하나같이 너무 비장했다. 국민에 대한 예의도 없이 방패로 사람을 찍어 눌러 진압하는 것은 예삿일이이었다. 표적수사로 사람을 궁지에 몰아 목숨을 잃게 만든 정부에 목소리를 내는 것이니 그럴만도 했다.

 

대학 때도 써 본 적 없는 시국선언인데, 이왕이면 멋지게 쓰고 싶었다. 자기 계발 공부보다 다음 아고라 찾는 것을 더 좋아하는 남자친구인 만큼 멋진 시국선언문을 기대했다. 하지만 그가 타이핑해 놓은 글을 보는 순간, 욱하는 마음을 참을 수 없었다.

 

"이게 뭐야, 누가 글 쓰면서 분노하래! 반복되는 말은 왜 이렇게 많은 거야. 이거 지금 누구랑 싸워? 내용은 또 왜 이렇게 많아! A4 네 장을 넘겼잖아!"

 

남자친구가 작성한, 생각나는 내용은 전부 다 갖다붙인 이 시국선언문은, '커플의 시국선언'이 아니라 '지하에서 민주화운동 하는 두 남녀 동지의 시국선언'이 될 게 뻔했다. 결국 평소 이야기 나누는 대로 가볍게 쓰기로 했다.

 

아, 시국선언문을 낭독하기 전에 어떻게 우리가 '커플의 시국선언문'을 작성할 수 있었는지부터 먼저 밝히고 가는 게 순서겠다.

 

남녀, 눈 맞았는데 정치토론만

 

다른 남녀들이 분위기 잡고 외식하는 장소인 여대 앞 스파게티 집에서 우리 커플은 정치 얘기를 한다. 토마토소스가 듬뿍 든 면발을 입에 넣은 채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이 타살인지 의문사인지에 대해 주간지 <시사IN>을 펼쳐놓고 말다툼(?) 하는 두 사람의 모습은 상상에 맡기겠다.

 

연애 초기, 이 남자는 참 아는 게 많다고 생각했다. 나처럼 대학에서 역사를 전공한 것도 아닌데, 친일파와 그 후예들이 지금까지 권력을 갖고 나라를 좌지우지하는 현실, 한국의 열악한 노동환경에 대한 말을 주로 들을 수 있었다. 그의 아버지가 젊은 시절 정치를 했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그중 특히 '정치'에 대한 말을 많이 했다.

 

그렇다고 내가 처음부터 호락호락 그의 말에 귀 기울였던 것은 아니었다. 내가 그의 말에 진심으로 공감하게 된 것은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 전선에 뛰어든 후였다. 당시 졸업 후 내가 들어간 직장은 서울 인근의 지역신문사.

 

걸핏하면 밤 10시 퇴근, 일이 많을 때는 밤 11시 퇴근이었다. 그의 회사도 야근이 잦아 두 사람은 자주 만나기가 쉽지 않았다. 연애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였건만, 두 사람은 만나면 배고픔에 지쳐 밥을 사먹고 차 안에서 뻗어 잠만(!) 잤다. 야근은 연애의 적이었다.

 

그런 상황 때문이었을까. 우리 둘은 주말에 '무슨 영화 보지?' '어디 놀러가지?'라는 한가한(?) 고민 대신 한국의 노동 현실과 회사 문화에 대해 많은 것을 이야기했다. 그러면서 친 기업 정책을 추진하는 현 정부를 지지하는 어른들에 대한 원망도 숨기지 않았다.

 

사귄 지 3년차인 지금까지도 우리는 아침마다 서로 "힘내"라는 말을 주고받으면서 출근한다.

 

MB 시대, 우리 커플이 사는 법 

 

신문사를 다니지 않았다면 그와 정치 얘기를 하는 데 별 흥미를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차떼기당으로 불리며 이익만 챙기는 한나라당이 싫어서 막연하게 민주당과 노무현을 지지했을 만큼 정치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끊임없이 쏟아내는 남자의 정치 지식과 짧지만 인상적이었던 나의 사회 경험은, 정치는 곧 '우리'가 하는 것임을 서서히 알게 했다.

 

현 정부 정책의 부정적 측면을 토론하면서 종종 다투느라 우리 커플의 정신 건강이 악화됐음은 물론이다. 미국산 쇠고기를 수입한다는 정부의 방침 덕분에 종종 스테이크를 썰면서 분위기 있는 데이트를 즐길 권리마저 침해당했다.

 

그 후 우리는 데이트 때마다 분식을 먹었다. 뷔페에 가도 쇠고기는 먹지 않았다(실은 갈비를 좀 먹고 싶었으나 남자에게 제지당했다). 남자는 간혹 일본 출장을 가서는 일본은 검역이 철저하니 안심이라며 끼니마다 종종 쇠고기를 먹었다고 알려와 내 염장을 질렀다.

 

현 정부는 우리 두 사람의 식비를 줄여줌과 동시에 데이트 장소에도 세심한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영화관에서 서울광장으로. 평소 직장 동료들과 친척들 사이에서 정치 얘기는 꿈도 꿀 수 없었던 두 사람에게, 자유롭게 발언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사람들이 모인 집회는 별천지였다. 영화는 스크린 속 주인공들을 의자에 앉아 가만히 감상하는 것이었지만, 집회는 역사라는 영화의 주인공으로 우리를 만들어줬다.

 

우리는 소망한다, 행복해질 권리가 있는 세상을

 

작년에 이어 올해 그와 내가 집회에 참여한 때는 6월 10일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정국으로 슬픔과 분노를 표출하는 민심이 절정에 달한 때였다. 노 전 대통령이 서거한 토요일(5월 23일) 오전, 그 전날 회사에서 야근한 탓에 조금 늘어져 있던 난 집밖으로 나와 지하철을 타고 가던 도중 "노무현이 죽었다며?"라는 할머니들의 대화에 놀라 엄마한테 사실 확인을 한 후 남자에게 급히 전화를 걸었다. 마지막 순간에 외롭게 혼자였던 한 사람의 죽음을 난 그렇게 알았다.

 

정권 차원의 정치 보복으로 빚어진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을 통해 우리는 타인의 고통에 가슴 아파할 수 있는 마음까지 배웠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배우고 싶지 않았다. 연인 사이에도 서로 대화하는 '소통'이 기본이건만, 노인들까지 나라를 걱정하며 모인 촛불 집회에 정부는 귀를 막았다. 어느새 이 나라는 권력의 안위를 위해, 평화를 바라는 한 개인의 삶을 스스럼없이 짓밟는 나라가 되었다. 단 1년 만에.

 

남자와 여자, 우리 두 사람은 이러한 현실을 외면하고 개인의 안정만을 추구하면 결국 기득권의 노예로 살 것임을 알기에 시국선언에 동참하려 한다.

 

정부가 거부하는 '대화'야말로 이 땅에서 행복을 찾으려는 우리 두 사람의 무기다. 우리는 끊임없이 진실을 기억하고 대화를 나누며 조금씩 현실을 바꾸려 노력할 것이다. 만약 두 남녀의 사랑이 결실을 맺어 부부가 된다면 아이들에게 두 사람이 살아온 기억,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내놓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줄 생각이다.

 

두 사람이 6월 10일 서울광장에서 나눠준 유인물에서 본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반복된다"는 문구를 기억하면서.

 

이명박 시대를 사는 커플의 시국선언

하나, 우리는 소망한다. 우리는 이 정부가 한국말로 의사소통 하는데 서툰 티 좀 그만 내고 행복한 삶을 바라는 국민의 마음을 헤아려주길.

 

예전에는 한국의 현실을 외면하고 이민 가는 사람들이 이기적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이해할 수 있다. 이 나라에서는 행복하게 살 수 없다는 불안감이 그 사람들을 말도 안 통하는 타국으로 가게 한 것인지 모른다. 하지만 나와 그 사람은 이 땅에서 한국말을 쓰며 살고 싶다. 소중한 친구, 이웃, 가족과 떨어져 살고 싶지 않다.   

 

시민들의 집회를 무조건 탄압할 것이 아니라 여론을 수렴하고 소통과 합의를 통하여 국민의 의견을 경청하기 바란다.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를 보장하라. 정부는 조중동을 통한 여론 조작을 중단하고 여론을 획일화 하려는 미디어 악법 추진을 중단하라.

 

하나, 우리는 소망한다. 현실 참여에 관여하지 않고 희생 없이 자유만 누리려는 사람들이 정의를 외쳐온 수많은 사람의 죽음으로 누리게 된 자신들의 모습을 깊이 성찰하길.

 

나와 남자는 목숨 바쳐 세상을 바꿀 각오를 다지기는 힘든 소시민이지만, 세상의 진실에 대해 깊이 고민하고 기억하는 것은 우리의 의무라고 생각한다. 각 국민은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고 스스로 삶의 주인이 될 권리가 있다. 우리가 모르는 이 나라 사람들이나 우리의 친구와 가족 등 모두 이러한 권리를 보장받아야 마땅하다. 우리는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자유를 지켜내고 우리가 처한 현실을 기억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2009년 6월 16일 이상미 유권창


#시국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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