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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교육문화회관에서의 <한국문화탐방> 특강 고려대 행정대학원 CEO과정생 27명이 경주문화탐방을 떠나서 경주교육문화회관에서 <신한류열풍과 성공적 문화콘텐츠>라는 특강을 들었다.
경주교육문화회관에서의 <한국문화탐방> 특강고려대 행정대학원 CEO과정생 27명이 경주문화탐방을 떠나서 경주교육문화회관에서 <신한류열풍과 성공적 문화콘텐츠>라는 특강을 들었다. ⓒ 박태상

신라 천년의 고도 경주는 여전히 긴 호흡을 몰아쉬며 침묵의 묵언수행을 하고 있었다. 여전히 석굴암과 불국사는 외국인 등 한국문화의 토대를 이해하려는 발길들로 분주했다. 이번 여행은 고려대학교 행정대학원 CEO 과정생들을 인솔하여 경주와 울산지역 한국문화의 진수를 감상케 하고 그러한 문화적 토대가 '신 한류열풍의 진원지'로 작용하는가 여부를 확인하기 위한 것이었다. CEO 과정생을 이끌고 전국 우리나라 문화유산을 찾아다닌 지도 어언 6년의 세월이 흘렀다.

고려대학교 행정대학원(행정대학원장 유호열) 최고관리자과정을 다니는 CEO과정생의 면면은 매우 다채로웠다. 가장 많은 직업군은 대기업이나 중소기업 대표이사였지만, 성형외과 의사, 한의원 원장, 변호사, 검찰청 부장검사, 경찰청 경무관, 국공립 기관 기관장, 은행 지점장, 현대화된 한국군을 이끄는 육·해·공군 장성 등 다양한 직업을 가진 60여 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국문화의 토대를 이해시켜 준다는 점에 큰 자부심을 가지고 출발 전 준비를 철저하게 했다. 토요일 오후 1시 정각에 대전을 출발한 버스는 경부 고속도로로 접어들면서 쏜살같이 경주를 향해 질주하고 있었다. 날씨도 화창하여 고속도로 휴게소마다 관광객들로 인산인해였다. 첫 날은 경주교육문화회관에 여장을 풀고 김반아 박사의 특강을 들었다.

둘째 날은 조식을 마친 후 가야금홀에서 "신한류열풍과 성공적 문화콘텐츠"라는 주제로 특강을 했다. 2008년부터 금년까지 새롭게 불고 있는 '신 한류열풍'은 2003년의 대중문화를 주축으로 삼았던 한류열풍과 달리 한국의 전통문화를 기조로 하면서 세계와 소통할 수 있는 문화와 기술을 창출하거나 접목하고 있다는 점에서 좀 더 바람직한 측면이 많다는 요지로 발표했다.

특강을 마친 후 일행은 짐을 꾸려 버스에 올랐다. 경주문화탐방의 첫 방문지로 요즈음 한창 MBC TV 사극으로 인기몰이를 하고 있는 고현정 주연의 드라마 <선덕여왕>의 실제 왕릉을 선택했다.

선덕여왕릉 선덕여왕릉은 사천왕사 뒤편에 위치하고 있어 찾는데 애를 먹었다.
선덕여왕릉선덕여왕릉은 사천왕사 뒤편에 위치하고 있어 찾는데 애를 먹었다. ⓒ 박태상

선덕여왕(632 ~ 647)은 삼국사기에는 진평왕의 장녀로 기술되어 있다. 어머니는 마야부인으로 진평왕이 후사가 없자 백성들의 옹립으로 왕위를 계승한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신라 최초의 여왕'이라는 점이 요즈음 TV드라마로 제작된 주요인이라 생각된다. 선덕여왕은 첨성대를 만들고 분황사를 건립하였으며 황룡사 9층 목탑을 축조하는 등 신라의 건축기술을 한 단계 높이는데 크게 일조했다.

특히 재임기간 중에 여러 차례 고구려와 백제의 침략을 받는 등 외침이 많았다. 642년에는 백제 의자왕의 침략을 받아 미후성 등 40여 성을 빼앗기기도 했으나 644년에는 김유신으로 하여금 백제로부터 빼앗긴 성을 회복하게 하였다. 최초의 여왕으로서 내정에서는 선정을 베풀어 민생을 안정시켰고, 구휼사업에 힘썼다. 특히 김춘추와 김유신을 거느리고 통일의 기반을 구축한 것이 큰 공적이다.

MBC 드라마 <선덕여왕>은 팩션이다. 팩션(Faction)이란 팩트(fact)와 픽션의 조합어이다. 따라서 작가의 상상력에 따라 허구적인 이야기가 삽입되게 마련이다. 우선 드라마에서는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서와 달리 선덕여왕은 진평왕(재위 579 ~ 632)의 쌍둥이 중 둘째로 묘사된다. 드라마 속 선덕여왕(이요원 분)은 정적인 미실(고현정 분)이 '어출쌍생,성골남진(왕이 쌍둥이를 낳으면 성골남자의 씨가 마른다)'의 예언을 활용할 것을 두려워한 아버지 진평왕의 명령에 의해 시녀인 소화의 품에 안겨 중국 서북쪽의 타클라마칸 사막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는 것으로 각색된다.

이렇게 드라마에서 선덕여왕이 진평왕의 둘째로 뒤바뀌게 된 것은 김대문이 지은 <화랑세기>에 근거한 것이다. <화랑세기>에는 선덕공주(덕만) 위에 천명공주가 있었는데, 적자가 없는 진평왕이 처음에는 금륜왕(진지왕)의 아들인 용수에게 왕위를 물려주기 위해 그를 천명공주와 결혼시켰지만, 나중에 천명공주가 아버지 진평왕의 명에 따라 스스로 지위를 버리고 궁을 나감으로써 선덕공주가 대업을 이어받게 되었다고 기술되어 있다. 선덕여왕릉을 빠져나온 CEO 일행은 토함산 석굴암으로 올랐다.

석굴암 입구 '기본에 항상 충실하라'는 말이 있듯이 석굴암을 다시 찾았으나 본존불인 '석가여래좌상'만을 휙 둘러보고 내려왔다.
석굴암 입구'기본에 항상 충실하라'는 말이 있듯이 석굴암을 다시 찾았으나 본존불인 '석가여래좌상'만을 휙 둘러보고 내려왔다. ⓒ 박태상

토함산의 석굴암 전경 '기본에 항상 충실하라'는 말이 있듯이 석굴암을 다시 찾았으나 본존불인 '석가여래좌상'만을 휙 둘러보고 내려왔다.
토함산의 석굴암 전경'기본에 항상 충실하라'는 말이 있듯이 석굴암을 다시 찾았으나 본존불인 '석가여래좌상'만을 휙 둘러보고 내려왔다. ⓒ 박태상

석굴암 주차장에 서니 어디선가 송창식의 노래 '토함산'이 들려오는 듯했다. "토함산에 올랐어라. 해를 안고 앉았어라~~ 가슴 속에 품었어라~~ 세월도 아픔도 품어 버렸어라~~터져 부서질 듯 미소 짓는 님의 얼굴에도 천년의 풍파세월 담겼어라"는 노랫말이 허공을 맴돌았다. 석굴암으로 오르는 길에는 세계 문화유산이라는 돌표석이 앞을 가로막았다.

안타까운 것은 물이 새는 것을 막기 위해 석굴암 밖에 기와집을 짓고 석굴암 암실로 통하는 길을 만들고는 두꺼운 유리창으로 차단했을 뿐만 아니라 사진촬영도 금해서 석굴암의 웅장한 용태를 마음속으로 밖에는 느낄 수 없다는 점이다. 아쉽지만 발길을 돌려 종종걸음으로 산을 내려오고 말았다. 석굴암은 토함산 절벽 밑에 화강암 석굴로 인공적으로 조성되었다. 굴내는 둥근 평면이며, 천장은 반구형 또는 아치형으로 된 석굴이다.

석불사 본존불인 석가여래좌상은 석굴암을 방문하는 누구나 유리창 안에 들어 있는 상태에서 정면에서 관람할 수 있다. 석가여래좌상은 흰 화강석에 조각된 것인데, 석굴 중앙의 연화좌 위에 부좌해 있으며 조각기법이 정교하고 장중웅려한 기상이 잘 묘사되어 있는 예술품으로서 걸작이다. 본존 뒷벽에 반육각한 십일면관음보살상의 원만한 자태가 자리 잡고 있어 신라예술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으며, 이를 중심으로 석굴 벽면에 십나한, 범천, 제석천을 반육각하고 있다.

벽 윗부분에는 10개의 불강을 만들어 그 속에 1체의 유마거사상과 7체의 보살상을 안치하였다. 그 중 2개가 현재 비어 있는데, 대한제국 때 일본사람이 몰래 반출해나갔다고 한다.  석굴암은 신라스님들이 불법을 구하기 위해 중국과 인도를 방문하는 여정에서 경험한 중국 돈황석굴과 인도의 아잔타석굴을 보고 찬란한 불교문화에 감탄하여 돌아와 최고의 조각가를 동원하여 창조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인도의 아잔타석굴과 또 다른 섬세한 신라불교문화의 진수를 맛보게 해준다.

불국사 백운교. 청운교 앞에서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인 불국사의 대표적 촬영장소로는 백운교, 청운교가 측면으로 보이는 곳이다.
불국사 백운교. 청운교 앞에서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인 불국사의 대표적 촬영장소로는 백운교, 청운교가 측면으로 보이는 곳이다. ⓒ 박태상

인파에 떠밀려 긴 시간 감상도 못하고 바로 버스로 내려와 불국사로 향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불국사의 가장 중요한 국보중 하나인 다보탑이 작년 가을부터 보수공사에 들어가 대웅전과 석가탑만 온전하게 감상할 수 있었다. 외국인을 비롯한 수 백 명의 관람객들로 대웅전 주변은 인산인해였다. 날씨는 섭씨 30도에 근접하는 매우 무더운 날씨인데도 불구하고 유네스코 지정의 세계문화유산을 가까이에서 보려는 사람들의 욕망은 불볕더위도 막을 수가 없었다.

불국사의 창건에 대해서는 두 가지 학설이 존재한다. 하나는 <불국사고금창기>에 나오는 이야기로 528년(신라 법흥왕 15) 법흥왕의 어머니 영제부인의 발원으로 불국사를 창건하였으며, 574년 진흥왕의 어머니인 지소부인이 절을 크게 중건하면서 비로자나불과 아미타불을 주조하게 하여 봉안하였다고 한다. 또 670년(문무왕 10)에는 무설전을 새로 지어 화엄경을 강설하였고 그 후 751년(경덕왕 10)에 김대성에 의하여 크게 개수되면서 탑과 석교 등도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다른 하나는 <불국사 사적>에 나오는데, 이보다 연대가 앞선 눌지왕 때 아도화상이 창건하였고 경덕왕 때 재상 김대성에 의하여 크게 3창(刱)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두 가지 학설을 종합해볼 때 처음에는 소규모로 창립되었던 불국사가 불심이 돈독했던 경덕왕 때 재상 김대성에 의해 대대적으로 확장된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유사>에는 김대성이 전생의 부모를 위해서 석굴암을, 현생의 부모를 위해서 불국사를 지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그가 목숨을 다할 때까지 짓지 못하여 그 후 나라에서 완성하여 나라의 복을 비는 절로 삼게 되었다는 것이다. 국보 제20호인 다보탑과 석가탑(불국사 삼층석탑, 국보 제21호)은 우리나라의 가장 대표적인 석탑으로, 높이도 10.4m로 같다. 절내의 대웅전과 자하문 사이의 뜰 동서쪽에 마주 보고 서 있는데, 동쪽 탑이 다보탑이다.

다보탑은 특수형 탑을, 석가탑은 우리나라 일반형 석탑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두 탑을 같은 위치에 세운 이유는 '과거의 부처'인 다보불(多寶佛)이 '현재의 부처'인 석가여래가 설법할 때 옆에서 옳다고 증명한다는 <법화경>의 내용을 눈으로 직접 볼 수 있게 탑으로 구현하고자 하기 위함이라고 알려져 있다. 석가탑을 보면 2층 기단(基壇)위에 세운 3층탑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지만, 다보탑은 그 층수를 헤아리기가 어렵다.

십(十)자 모양의 평면을 하고 있는 기단은 사방에 돌계단을 마련하고, 8각형의 탑신은 그 주위로 네모난 난간을 돌렸다. 여기에 대나무마디 모양의 돌기둥, 16장의 연꽃무늬 등을 새겼는데, 돌을 깎아 세운 것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그 솜씨가 훌륭하다. 탑을 세운 시기는 불국사가 대규모로 새롭게 단장을 한 경덕왕 10년(751)으로 추측된다. 목조건축의 복잡한 구조를 참신한 발상을 통해 산만하지 않게 표현한 뛰어난 작품으로, 4각, 8각, 원을 한 탑에서 짜임새 있게 구성한 점, 각 부분의 길이·너비·두께를 일정하게 통일시킨 점 등은 8세기 통일신라 미술의 정수를 보여주고 있다.

불국사 석가탑 '무영탑'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석가탑은 3층 석탑으로 8세기 중기에 이르러 절정에 달한 통일신라 석탑양식의 교과서로 통한다.
불국사 석가탑'무영탑'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석가탑은 3층 석탑으로 8세기 중기에 이르러 절정에 달한 통일신라 석탑양식의 교과서로 통한다. ⓒ 박태상

석가탑의 원래 이름은 '석가여래상주설법탑(釋迦如來常住設法塔)'으로, '석가탑'이라고 줄여서 부른다. 석가탑은 2층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모습이다. 감은사지삼층석탑(국보 제112호)과 고선사지삼층석탑(국보 제38호)을 시작으로 하여 8세기 중기에 이르러 절정에 달한 통일신라 석탑양식의 교과서라고 할 수 있는 훌륭한 작품이다. 탑 전체의 무게를 지탱할 수 있도록 2층의 기단이 튼실하게 짜여있으며, 목조건축을 본 따서 위·아래층 기단의 모서리마다 돌을 깎아 기둥모양을 만들어 놓았다.

탑의 기단과 탑신에 특별한 꾸밈을 두지 않고 간결하게 짜여진 것에 비해 3층 지붕돌 위의 머리장식은 화려한 느낌을 준다. 이는 1973년에 석가탑보다 100년이나 뒤에 만들어진 남원 실상사삼층석탑(보물 제37호)의 머리장식을 본 따서 복원한 것이기 때문이다. 탑 주위로 둘러놓은 주춧돌모양의 돌에는 연꽃무늬를 새겼는데, 이를 부처님의 사리를 두는 깨끗한 곳이라는 뜻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다른 곳에서 쉽게 찾아볼 수 없는 특징이며, 이로 인해 탑의 장엄함을 한층 높여준다. 탑이 만들어진 시기는 불국사가 절의 규모를 제대로 갖추던 때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아, 절을 창건한 연대인 경덕왕 10년(751) 이후로 보고 있다.

<아사달의 혼> 조각 '신라를 빛낸 인물관' 옆에 서있는 <아사달의 혼>조각
<아사달의 혼> 조각'신라를 빛낸 인물관' 옆에 서있는 <아사달의 혼>조각 ⓒ 박태상

그 후 원래 모습대로 잘 보존되었으나, 안타깝게도 1966년 9월 도굴꾼들에 의해 탑이 손상되는 일이 있었다. 그해 12월 탑을 완전하게 복원하면서 2층 탑신의 몸돌 앞면에서 부처님의 사리를 모시던 사각형의 공간을 발견하게 되었다. 여기서 여러 가지 사리용기들과 유물을 찾아냈는데, 그 중에서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국보 제126호)이다.

이것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인쇄물로 닥나무 종이로 만들어졌으며,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이 탑은 '무영탑(無影塔:그림자가 비치지 않는 탑)'이라고도 불리는데, 여기에는 석가탑을 지은 백제의 석공(石工) 아사달을 찾아 신라의 서울 서라벌에 온  아사녀가 남편을 만나보지도 못한 채 연못에 몸을 던져야 했던 슬픈 전설이 서려 있기 때문이다.

아사녀의 영혼이 잠겨있는 <영지> 백제 석공 아사달의 아내 아사녀가 빠져죽었다는 <영지>
아사녀의 영혼이 잠겨있는 <영지>백제 석공 아사달의 아내 아사녀가 빠져죽었다는 <영지> ⓒ 박태상

이러한 설화를 근거로 하여 20년대 사실주의 소설가 현진건은 장편소설 <무영탑>을 창작하여 1938 ~ 1939년 <동아일보>에 연재하였다. 경덕왕 때 어느 초파일 밤, 왕 일행은 불국사에 행차한다. 일행에 끼여 온 구슬아기는 석가탑의 정교한 솜씨에 감격하고 왕 앞에 나온 석공(石工) 아사달을 보고는 한눈에 반해 버린다. 그러나 백제 사람인 아사달에게는 고향에 두고 온 아내 아사녀가 있었다.

아사녀는 아사달의 연적이었던 팽개의 치근거림을 피해 서라벌에 왔으나 남편을 만나지는 못하고 석가탑이 완성되면 영지(影池)에 비칠 것이라는 말만 믿고 영지 주변에서 기다리다 못에 빠져 죽는다. 탑은 완성되지만 아내의 죽음을 전해들은 아사달은 영지로 뛰어가서 울음을 터뜨린다. 구슬아기는 영지에서 아사달을 만나 함께 부여로 떠나려고 하다가 아버지가 보낸 군졸들에게 붙잡힌다. 화형에 처해진 구슬아기는 정혼자인 경신에게 구출되지만 결국 숨을 거둔다. 아사달은 아사녀와 구슬아기의 영상(影像)을 합해서 원불(願佛)을 조각하고는 아내를 따라 영지에 빠져 죽는다는 낭만적인 줄거리를 지니고 있다.

아사달과 아사녀의 영혼을 기리는 문화유산은 천년고도 경주의 도처에 산재해 있다. 이 설화의 흔적은 영지 연못에도 있고, 동리 ․ 목월문학관에도 '아사달의 혼'이라는 조각 작품으로 새겨져 있다. <아사달의 혼>이라는 조각 작품 앞바닥에 새겨져 있는 대리석으로 된 한반도 모양의 조각은 남 ․ 북한 간의 문화교류가 한참 잘 될 때 북측의 도움으로 북한 돌을 공수해 와서 통일을 기리는 의미에서 한반도 지도를 새겨 넣은 것이라고 한다. 따라서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통일에 대한 남북한 사람들의 염원을 되새겨 봐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신라를 빛낸 인물관> 2008년 개관한 <신라를 빛낸 인물관>에는 박혁거세를 비롯한 총33인의 인물이 전시되어 있다.
<신라를 빛낸 인물관>2008년 개관한 <신라를 빛낸 인물관>에는 박혁거세를 비롯한 총33인의 인물이 전시되어 있다. ⓒ 박태상

<아사달의 혼> 조각 옆에는 신라를 빛낸 인물관이 있고, 주차장을 끼고 정면에는 동리 ․ 목월문학관이 있다. 신라를 빛낸 인물관은 2008년 3월 20일 개관을 했는데, 수학여행단과 초등학교, 중학교 학생들을 대동하고 온 가족여행팀들에게 인기를 끌고 있다.  신라 인물관 왼쪽에는 신라 불교 문화를 꽃피운 주요 인물로 꼽히는 아도, 위촉, 혜숙, 안함, 의상, 표훈, 사파, 원효, 혜공, 자장 등 신라 최초 사찰인 흥륜사 금당에 모신 고승 열 분이 모셔 있다.

오른쪽에는 신라문화를 진흥시키고 빛낸 왕을 비롯한 33명이 전시되어 있으며 이는 왕 9명(박혁거세, 탈해왕, 미추왕, 법흥왕, 진흥왕, 문무왕, 무열왕, 신문왕, 경덕왕)과 재상 3명(거칠부, 김대성, 김양), 충신 2명(김후직, 소나), 장군 4명(김유신, 이사부, 무력, 당천), 화랑 2명(사다함, 관창), 학자 4명(설총, 강수, 김대문, 최치원), 예술 5명(솔거, 양지, 백결선생, 김생, 월명사), 효행 3명(지은, 손순, 향덕), 불교 1명(원광법사) 등이다.

한편 동리·목월문학관을 들어가면, 왼쪽으로 동리문학관이 있고 오른쪽으로 목월문학관이 있다. 동리문학관을 들어서면 바로 작가 김동리의 동상이 관람객을 맞이한다. <경주의 소설문학> 등 김동리가 집필한 책들이 전시되어 있고 다음으로 <부활>과 <대왕암> 등 동리의 신문연재소설이 나타난다. 그 다음 코너에는 1948년에 집필한 <문학과 인간>, 1955년 집필한 장편소설 <실존무> 등의 책이 진열되어 있다. 바로 옆에는 김동리의 대표작인 <등신불>, <사반의 십자가>, <까치소리>가 방문객들을 환영하고 있다.

<동리문학관>의 문방사우-지필묵연 동리문학관의 명물인 문방사우인 지필묵연이 놓여 있는 서화방
<동리문학관>의 문방사우-지필묵연동리문학관의 명물인 문방사우인 지필묵연이 놓여 있는 서화방 ⓒ 박태상

재미있는 것은 프랑스 발자크 박물관처럼 동리의 <현대문학> 연재소설인 <남포의 계절>의 삽화를 박고석화백이 그린 삽화(컷)가 반갑게 다가선다. 다음으로 동리의 육필원고인 <인간의 사상>이 세로로 된 원고지에 쓰여 있다. 대개 유명 예술가들은 글씨가 악필이 많다고 하는데, 동리는 서예를 해서 그런지 글씨가 매우 담백하고 깔끔하다. 진열장에서 특히 눈에 띄는 것은 박두진, 최정희씨 등과 함께 찍은 사진이다. 해방직후에 촬영한 사진인지, 모두들 젊은 청년의 모습이다. 

인상 깊은 것은 동리가 사용한 책상이다. 책상위에는 작은 스탠드와 담배갑 그리고 나무 필통이 눈에 들어온다. 특히 용도는 잘 모르겠으나 동으로 된 거북이가 동리의 원고지와 볼펜을 지켜보고 있어 흥미로웠다.  동리문학관에서 관람객들로부터 가장 관심을 끄는 곳은 서예에 일가견이 있던 동리의 문방사우가 있는 진열장이다. 그곳에는 20여 개의 붓과 이조백자 몇 점이 단아하게 엔티크한 장식장 안에 놓여 있었다. 동리는 연적과 붓을 통해 얼마나 많은 서예글씨들을 지기와 제자들에게 선물로 전했을까?

목월문학관의 박목월시인의 서재 목월문학관의 박목월시인의 서재는 한국의 전통선비방을 연상케 하는데 수백권의 창작노트가 진열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목월문학관의 박목월시인의 서재목월문학관의 박목월시인의 서재는 한국의 전통선비방을 연상케 하는데 수백권의 창작노트가 진열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 박태상

목월문학관의 입구를 들어가도 동리문학관과 마찬가지로 동상이 자리 잡고 있다. 목월문학관의 경우, 동상에 앞서 목월 형상의 큰 걸게 그림이 먼저 손님을 맞는 것이 특징이다. 목월은 시인이므로 시집이 진열장 가득하게 놓여 있다. <청담>(1964), <난(蘭). 기타>(1959), <경상도의 가랑잎>(1968), <어머니>(1968), <무순(無順)>(1976), <크고 부드러운 손>(1976) 등이 차례로 손님을 맞는다. 그 외에도 목월이 창간했던 잡지 <시문학> 제3호(1951)와 <심상> 수 십 권이 진열되어 있다. 책 중에서 인상 깊은 것은 릴케가 지은 <문학을 지망하는 청년에게>(박목월 번역)라는 책과 <청록집 이후>라는 시집이었다.

박목월은 조지훈, 박두진과 함께 현대시의 아버지 정지용으로부터 잡지 <문장>을 통해 추천을 받아 문단에 데뷔했다. 목월문학관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시인 목월이 시를 구상하고 습작을 했던 대학노트들인데, 족히 100여 권은 넘어 보였다. 한 예술가가 문학사에 족적을 남긴다는 것이 얼마나 힘이 드는가를 입증해주는 영수증과도 같은 것이리라. 서가 2개와 엔티크로 장식되어 있는 목월의 서재에는 동리의 서양식 책상이 아닌 한국식 큰 테이블이 한가운데 놓여 있는 것이 눈에 한 번에 들어왔다. 역시 고향과 청산을 노래한 청록파 시인답게 목월은 자연친화적인 한국 전통 방식의 삶을 동경했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동리·목월문학관을 나온 일행은 버스에 다시 올라 점심을 먹기 위해 울산광역시 장승포로 달려갔다. 장승포에는 그 유명한 고래박물관이 웅장한 모습을 지니고 바닷가에 서 있었다. 고래박물관 주변에는 수 십 군데의 고래 고기를 파는 음식점이 있었다. 그 중 가장 유명한 집에서 고래 육회를 비롯하여 고래 사시미 등 고래 모듬회를 안주삼아 맥주를 한 잔 들이켰더니 세상이 다르게 보였다.

고래 육회와 고래 모듬회 장승포 고래고기 음식점에서 먹은 고래 육회와 고래 모듬회는 일미였다.
고래 육회와 고래 모듬회장승포 고래고기 음식점에서 먹은 고래 육회와 고래 모듬회는 일미였다. ⓒ 박태상

큰 접시에 있는 고래 모듬회에는 우네라고 하는 배복살, 붉은 색의 양념 안 된 생고기, 쟁반 오른쪽의 수육(흰쪽은 배쪽이고, 회색쪽은 등쪽), 갈비살과 대창, 고래혓바닥, 흰색으로 보이는 고래 꼬리 등 다양한 부위가 담겨 있어서 입맛을 돋우었다. 

점심식사를 마치고 울주군으로 향해 달려갔다. 선사시대 문화유적을 보기 위해 울산광역시 울주군 언양읍 대곡리에 있는 구석기 시대의 유물인 반구대암각화(국보 제 285호)로 향한 것이다. 3년 전에 반구대 암각화에 갔을 때는 아직 암각화 전시관이 없어서 사전 지식이 부족한대로 그냥 감상했지만, 2008년 5월 '울산 암각화 전시관'이 완성되어 선사문화에 대한 사전지식을 갖고 감상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이 전시관은 지을 때부터 울산시와 환경 문화 시민단체 그리고 문화재청이 논쟁을 펼쳐 과연 완성될 수 있을까 걱정이 많았다. 즉 암각화가 1년 중 240일이나 물에 잠겨 있어 박리현상이 심한데, 선사문화전시관까지 짓느냐는 비판이었다.

최근에는 다시 문화재청과 울산시가 대립하고 있다. 문화재청은 그동안 현재 바닥에서 60m 높이인 사연댐 수위를 반구대암각화의 최저 높이인 52m로 낮추자고 제시했다. 하지만 울산시는 "하루 3만여t의 식수 공급이 줄어든다"고 반대하며, 암각화 맞은편 언덕 뒤편에 별도의 수로를 만들자고 제안해왔다. 이 방안은 사연댐 바닥으로부터 52~56m 높이에 위치한 암각화가 물에 잠기는 것을 막기 위해 52m 높이로 매립하고 반구대암각화 앞 80m 지점에 높이 62m의 제방을 쌓는 것이다.

반구대암각화 앞쪽을 매립해 육지로 만든 뒤 그 둘레에 제방을 쌓아 물이 넘지 못하게 하겠다는 방안이다. 이 방안에 대해 문화재청은 임시방편이라고 그동안 반대해오면서 암각화의 훼손은 심각한데 비해, 보존대책은 5년째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 반구대암각화에는 수천 년 전 선사시대 사람들의 활동과 동물의 모습 등 200여점의 그림이 바위에 새겨져 있다. 암각화는 너비10m, 높이 3m의 직사각형 바위에 새겨져 있으며 널리 알려진 귀신고래와 흰수염고래 등은 물론 사람 및 배, 울타리 등의 도구와 사슴, 호랑이 등의 형상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작살과 그물, 고래 옆에 있는 배의 형상 등을 통해 이미 이 시기부터 한반도에 포경이 이루어졌음을 추정할 수 있다.

반구대 암각화 국보 제 285호인 <반구대 암각화>의 영구 보존대책은 5년째 논쟁만 하고 별다른 대책도 없이 세월만 허비하고 있다.
반구대 암각화국보 제 285호인 <반구대 암각화>의 영구 보존대책은 5년째 논쟁만 하고 별다른 대책도 없이 세월만 허비하고 있다. ⓒ 박태상

<반구대 암각화> 국보 제 285호인 <반구대 암각화>의 영구 보존대책은 5년째 표류하고 있다.
<반구대 암각화>국보 제 285호인 <반구대 암각화>의 영구 보존대책은 5년째 표류하고 있다. ⓒ 박태상

반구대 암각화는 그 곳을 찾아가는 탐방객들의 마음을 가뿐하게 해준다. 그 이유는 가는 길의 코스가 아기자기하고 주변풍광이 좋기 때문이다. 울산 암각화 전시관 주차장에서 걸어서 총 1. 2Km를 가면 암각화가 나온다. 길을 나서서 조금만 가면 '반구대'라고 하는 '울산 12경'중의 한 명소가 나타난다. '반구대'는 산세와 계곡, 기암괴석이 한데 어우러진 절경으로 마치 거북이 한 마리가 넙죽 엎드려 절을 하고 있는 형상이라고 하여 반구대(盤龜臺)라고 명명되었다. 

반구대의 바위면에 시인 묵객들의 글씨가 많이 새겨져 있는데, 유명한 학그림은  병풍바위에 조각되어 있다. 그 이 바위를 예부터 사람들은 서석대(書石臺)라고 불렀다. 즉 이 근처 바위에는 옛 선비들의 이름과 관직이 새겨져 있어서 서석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그 중 바위에서 찾을 수 있는 글귀로는 반구, 옥천선동(玉泉仙洞), 포은대(圃隱臺) 등이 음각서석으로 크게 조각되어 있다고 한다.

이곳은 <동경속지>에서도 "산수의 경치가 동남에서 으뜸(山水風光甲於東)"이라고 격찬했을 정도로 경승지로 유명한 장소이다. 따라서 예로부터 소인묵객(騷人墨客)들이 몰려들었다고 전해진다. 고려 말에 포은 정몽주가 친원배명(親元排明)의 외교정책을 반대하다가 1년간 언양현 요도로 유배를 와서 생활하다가 풍광이 좋은 이곳을 지척에 두고도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 발길을 자주 대어 인근 지방의 선비들에게 강론을 펼치면서 후학을 배출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래서 반구대에는 포은의 유허비(遺墟碑)가 세워져 있다.

또 원래 반구대 아래에 있던 반구서원이 사연댐으로 인해 지금 장소로 옮겨져 서있다. 이곳은 포은 정몽주, 회재 이언적, 한강 정구 세 사람을 배향하는 서원이다.

반구대 울산 대곡리 암각화 가는 길에 위치한 반구대와 반구서원은 포은 정몽주에 대한 회고에 젖게 만든다.
반구대울산 대곡리 암각화 가는 길에 위치한 반구대와 반구서원은 포은 정몽주에 대한 회고에 젖게 만든다. ⓒ 박태상

반구서원 울산 대곡리 암각화 가는 길에 위치한 반구대와 반구서원은 포은 정몽주에 대한 회고에 젖게 만든다.
반구서원울산 대곡리 암각화 가는 길에 위치한 반구대와 반구서원은 포은 정몽주에 대한 회고에 젖게 만든다. ⓒ 박태상

암각화 가는 길에서 발견하게 되는 또 하나의 묘미는 공룡발자국을 감상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대곡리 공룡발자국 화석은 약 1억 년 전의 전기 백악기(白堊紀) 시대에 살았던 공룡들의 것으로 보인다. 당시의 공룡들은 아열대 기후아래 우기와 건기가 반복되고 열대 무역풍이 영향을 미치는, 사바나 지역의 하천평야일대에서 살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곡리 공룡발자국은 약 100㎡ 넓이의 바위에 새겨져 있는데, 용각류 팔용과에 속하는 것(60톤급)과 조각류 이구아나과에 속하는 것 등 24개가 남아 있다. 

이곳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천전리 각석 주변에 보다 큰 규모의 공룡발자국이 남아 있는데, 두 곳의 변별성은 천전리 것이 방향이 서로 혼재되어 있는 반면에 대곡리 것은 일정 방향으로 향해 있는 것이 차이점이다.

대곡리 공룡발자국 천전리의 공룡발자국과 달리 대곡리의 공룡발자국은 1억년전의 전기 백악기 시대에 살았던 공룡의 것으로 일정 방향으로 향해 있는 것이 특징이다.
대곡리 공룡발자국천전리의 공룡발자국과 달리 대곡리의 공룡발자국은 1억년전의 전기 백악기 시대에 살았던 공룡의 것으로 일정 방향으로 향해 있는 것이 특징이다. ⓒ 박태상

대곡리 공룡발자국2 천전리 공룡발자국과 달리 대곡리의 공룡발자국은 1억년 전의 전기 백악기 시대에 살았던 공룡의 것으로 일정 방향으로 향해 있는 것이 특징이다.
대곡리 공룡발자국2천전리 공룡발자국과 달리 대곡리의 공룡발자국은 1억년 전의 전기 백악기 시대에 살았던 공룡의 것으로 일정 방향으로 향해 있는 것이 특징이다. ⓒ 박태상

울산 암각화 전시관 주차장으로 CEO 일행들이 돌아오니 벌써 6시가 넘어서고 있었다. 저녁식사를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휴게소에서 먹을 것인가 아니면 비용이 많이 나오지만, 근처의 한우관광특구인 '봉계리' 한우촌에서 먹을 것인지 다시 의견을 물었다. 귀가가 늦어지는데도 모두가 '봉계리 한우불고기 특구'로 가자는 의견이 압도적이었다. 지역특구 선정 주관 부처인 재정경제부가 지난 2007년 6월 제9회 지역특화발전특구위원회를 열고 울주군 언양.봉계 한우불고기를 지역특구로 지정했다. 이에 따라 언양.봉계 한우불고기는 국내 최초의 먹을거리 특구가 됐다.

봉계리에 들어서서 가장 주차장이 넓고 손님이 많아 보이는 곳으로 장소를 정하고 '한우 소고기 육회'와 '꽃등심 숯불 소금구이' 등으로 저녁식사를 했다. 특히 '한우육회'의 맛은 일품이라고 모두들 첫 손가락을 꼽았다. 여행에서 볼거리 다음으로 중요한 것이 먹을거리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다.

1박 2일 간의 경주울산 문화탐방의 일정은 이렇게 끝이 났다.
봉계리 한우고기 특구의 한우육회 2007년에 재경부가 지정한 <언양.봉계 한우불고기 특구>의 한우육회와 꽃등심 소금구이는 천하제일의 별미로 통했다.
봉계리 한우고기 특구의 한우육회2007년에 재경부가 지정한 <언양.봉계 한우불고기 특구>의 한우육회와 꽃등심 소금구이는 천하제일의 별미로 통했다. ⓒ 박태상

봉계리 한우고기 특구의 '한우 꽃등심 소금구이' 2007년에 재경부가 지정한 <언양.봉계 한우불고기 특구>의 한우육회와 꽃등심 소금구이는 천하제일의 별미로 통했다.
봉계리 한우고기 특구의 '한우 꽃등심 소금구이'2007년에 재경부가 지정한 <언양.봉계 한우불고기 특구>의 한우육회와 꽃등심 소금구이는 천하제일의 별미로 통했다. ⓒ 박태상

덧붙이는 글 | 한국문화탐방은 기본에 충실해야 한다. 그래서 고려대대학원 CEO과정생을 인솔하고 경주를 다시 찾았다. 또한 애초 10만원 고액권의 바탕으로 선정되었던 <반구대 암각화>를 탐방함으로써 문화유산의 보존대책 마련이 시급함도 깨달았다.



#경주울산문화탐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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