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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경궁 관천대 이 관천대는 조선 후기 숙종 14년, 서기 1688년에 만들어진 것이다
창경궁 관천대이 관천대는 조선 후기 숙종 14년, 서기 1688년에 만들어진 것이다 ⓒ 이종찬

어릴 때 어머니를 따라 외갓집 제사에 갔다가 하늘에 휘영청 떠오른 달과 보석처럼 빛나는 별을 바라보며 집으로 돌아온 때가 더러 있다. 그때 어머니께서는 달과 금성, 북두칠성 등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나중에 커서 타지로 나갔다가 행여 방향을 잃으면 그 달과 금성, 북두칠성을 바라보며 방향을 가늠하면 된다고 하셨다. 

옛 사람들이 하늘에 떠 있는 달과 별을 관찰하다가 마침내 천문대까지 세운 것도 하늘의 움직임에 따라 농사 시기나 기후 혹은 국가의 길흉화복을 점칠 수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릴 때 내 어머니께서도 달무리가 지면 큰비가 온다고 말씀하셨고, 별빛이 흐릿해지거나 별똥이 떨어지면 누군가 이 세상을 떠날 것이라 말씀하시곤 했다.    

그 하늘에 떠 있는 달과 별들을 관찰하는 천문대. 천문대, 하면 사람들 대부분은 경주 인왕동에 있는, 동북쪽으로 약간 기울어져 있는 그 첨성대(국보 제31호)를 떠올릴 것이다. 신라 선덕여왕(632∼647) 때 세워진 것으로 어림짐작되는 이 첨성대는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그 뒤에는 천문을 관측하는 새 첨성대를 만들지 않았을까.

아니, 만들었다. 고려시대에 만든 '고려첨성대'(사적 제49호)도 있고, 조선시대 때 만든 첨성대인 '관천대'도 있다. 그중 고려첨성대는 북한 송악산 남쪽 구릉지에 있는 고려 궁터인 만월대 서북쪽에 있으나 화강암으로 다듬어 만든 축대부분만 남아 있다. 이 축대는 동서남북 방위와 같으며, 높이는 2.8m, 한 변의 길이는 2.6m이다.

조선시대 때 만든 첨성대인 관천대(觀天臺)는 2개가 있다. 하나는 창경궁 안에 있는 보물 제851호로 지정된 관천대이고, 다른 하나는 제작 연대가 확실치 않으나 옛 북부 관상감 자리인 옛 휘문고등학교 자리, 지금은 현대건설주식회사 건물 대지 안에 있는 사적 제296호 관상감 관천대이다. 이 두 관천대는 구조나 크기, 제작 방법이 거의 같다.   

송화가 노오란 꽃가루 툭툭 털고 있는 창경궁 솔숲

창경궁 관천대 임금님 가마처럼 우뚝 서 있는 관천대
창경궁 관천대임금님 가마처럼 우뚝 서 있는 관천대 ⓒ 이종찬

창경궁 관천대 관천대는 천체 위치를 관측하는 천문기구인 간의(簡儀, 조선시대 천체 운행과 현상을 관측하던 기구)를 놓았던 돌로 만든 대(臺)이다
창경궁 관천대관천대는 천체 위치를 관측하는 천문기구인 간의(簡儀, 조선시대 천체 운행과 현상을 관측하던 기구)를 놓았던 돌로 만든 대(臺)이다 ⓒ 이종찬

고 노무현 전 대통령 영결식이 있던 29일(금) 오전 10시쯤. 노오란 풍선과 노랑 검정 리본이 빼곡히 매달린 청계광장과 프레스센터, 시청을 오가며 노 전 대통령 영구차를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눈물로 보냈다. 나그네는 그날 오후부터 문학예술인들과 어울려 31일(일) 새벽까지 넋 나간 사람처럼 술만 벌컥벌컥 마셨다. 

2009년 5월의 마지막 날 31일(일) 낮 12시. 언뜻 잠을 깨어보니 동묘 앞 전철역 주변에 있는 찜질방이었다. 어쩌다 여기까지 왔을까. 후다닥 일어나 대충 몸을 씻은 뒤 도망치듯 찜질방을 빠져나왔다. 어디로 갈까. 그래, 우선 뭘 좀 먹으며 생각하자. 종로5가 쪽에 있는 2천 원짜리 자장면을 먹고 있을 때 문득 지난해에 들렀던 창경궁 관측대가 떠올랐다. 

왜? 갑자기 그 관측대가 어른거리는 것일까. 노 전 대통령 혼백이 그 관측대에 가서 자신이 어디에 머물고 있는지 살펴보라는 것일까. 오늘따라 늘상 먹어도 맛있었던 자장면도 맛이 별로다. '싼 게 비지떡'이라는 옛말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노 전 대통령 서거 때부터 몸과 마음이 물 먹은 솜처럼 무거우니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 있어도 제 맛이 나겠는가. 

관측대가 있는 창경궁으로 천천히 걷는다. 창경궁은 1418년 세종대왕이 왕위에 오르면서 상왕인 태종을 편안하게 모시기 위해 지은 수강궁이 옛 이름이다. 창경궁 정문 홍화문(보물 제384호)에 들어서자 정 몇 품, 종 몇 품이라 새겨진 품계석이 차렷 자세로 줄지어 서 있고, 그 끝자락에 임금이 정사를 돌보던 문정전이 우뚝 솟아 있다.  

창경궁 편전인 문정전 안을 찬찬히 살펴본 뒤 관천대가 있는 남쪽 편 종묘 쪽으로 터벅터벅 걷는다. 오늘따라 햇살이 몹시 따갑다. 이마와 목덜미에서는 땀이 줄줄 흘러내린다. 땡볕을 지나 송화가 노오란 꽃가루를 실바람에 툭툭 털고 있는 솔숲 속으로 들어서자 갑자기 에어컨 바람을 쐬는 것처럼 온 몸과 마음이 시원해진다. 

관천대, 조선 후기 숙종 14년, 서기 1688년에 세워

창경궁 관천대 계단 한가운데 '올라가지 마세요'란 글씨가 지키미처럼 놓여 있다
창경궁 관천대계단 한가운데 '올라가지 마세요'란 글씨가 지키미처럼 놓여 있다 ⓒ 이종찬

"본감(本監)이 하나는 경복궁 영추문 안에 있고, 하나는 북부 광화방에 있었는데 거기에 관천대가 있었다. 중간에 전쟁을 만나 창경궁의 금호문 밖과 경희궁의 개양문 밖에 고쳐 세웠다. 흔히 첨성대라 부른다. 숙종 무진년(1688)에 영감사 남구만(南九萬)이 몸소 터를 살펴 관가를 처음 세우니 이것이 금호문 밖의 본감이다"-<서운관지> 몇 토막

시원한 솔숲에 서서 한동안 한숨을 몇 번 크게 몰아쉰 뒤 저만치 진초록 숲 한가운데 마치 임금님 가마처럼 우뚝 서 있는 관천대(서울 종로구 와룡동 2-1)로 다시 걸어간다. 관천대는 천체 위치를 관측하는 천문기구인 간의(簡儀, 조선시대 천체 운행과 현상을 관측하던 기구)를 놓았던 돌로 만든 대(臺)이다.

서울문화재 자료에 따르면 관천대는 돌을 쌓아 대를 만들고 돌난간을 둘러 평방석(平方石)을 올려놓았는데, 천체를 관측할 때에는 그 위에 소간의를 설치해 소간의대라고도 한다. 경복궁에 있는 이 관천대는 조선 후기 숙종 14년, 서기 1688년에 만들어진 것이다. 하지만 사적 296호인 관상감 관천대는 조선 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어림짐작된다.

관천대 가까이 다가가자 경주에 있는 첨성대와는 그 모습이 전혀 다르다. 그저 사각 진 돌벽을 3m정도 높이로 쌓고 그 위 평평한 네 귀에 석물이 있고, 그 한가운데 벅수처럼 생긴 커다란 돌이 왼쪽에 직사각형 작은 돌 하나를 끼고 있다. 그 앞에는 관천대로 올라가는 6개 돌계단이 있는데 계단 한가운데 '올라가지 마세요'란 글씨가 지키미처럼 놓여 있다.  

이 관천대와 관상감에 따른 기록은 <서운관지>(書雲觀志)에 자세하게 나와 있다. <서운관지>란 조선 정조 때 성주덕이 서운관의 기록을 모아 엮은 책으로 조선 순조 18년, 서기 1818년에 나왔다. 이 책은 천문·지리·역수(曆數)·점주(占籌)·측후(測候)·각루(刻漏) 등에 따른 발달과 그에 관한 제도의 연혁을 기록한 4권 2책의 인본(印本)이다.

소간의는 없고 석대만 남아 있는 경복궁 관천대

창경궁 관천대 관상감의 관원들은 이 관측대에서 하늘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을 끊임없이 관측했다
창경궁 관천대관상감의 관원들은 이 관측대에서 하늘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을 끊임없이 관측했다 ⓒ 이종찬

"창경궁 안에 있는 이 천문관측소는 높이 3m, 가로 2.9, 세로 2.3m 정도의 화강암 석대(石臺) 위에 조선시대 기본적인 천체 관측 기기의 하나인 간의를 설치하고 천체의 위치를 관측하였다고 한다. 지금은 간의는 없고 석대만 남아 있는데, 당시에는 관측소를 소간의대, 또는 첨성대라고도 불렀다"-문화재청

문화재청 자료에는 "관상감의 관원들은 이 관측대에서 하늘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을 끊임없이 관측했다"고 적혀 있다. 이 자료에는 경복궁 관천대는 "17세기 천문 관측대로서 거의 완전한 모습으로 남아 있다는 점에서 귀중하며, 관상감에 세워졌던 조선 초기의 또 하나의 관천대와 함께 조선시대 천문대 양식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유물"이라고 나와 있다.

창경궁 관천대는 화강암 석대(石臺) 위에 돌난간이 둘려 있고, 돌계단으로 올라가게 되어 있다. 대의 한 가운데에는 다시 돌대가 놓여 있어, 그 위에 소간의(小簡儀)를 설치할 수 있게 되어 있다. 하지만 지금 이 관천대에는 소간의는 없고 석대만 덩그러니 남아 있다. 높이 3m, 가로 2.9, 세로 2.3m.

서울문화재 자료에는 "관천대 위에 설치한 소간의는 적도를 기준으로 천체들의 자리를 관측하는 천문관측기구인 간의(簡儀)를 작으면서도 편리하게 만든 것으로 적도환, 백각환, 4유환으로 이루어진 3개의 환이 있었다"며 "그 구조는 받침대에 기둥을 세워 3개의 환을 끼운 뒤 일정한 각도로 유지하면 4유환은 북극과 맞고 적도환은 하늘 복판과 맞으며 수직으로 세우면 4유환은 입유환이 되었다"고 적혀 있다.

관천대에서 천문을 관측하는 방법은 먼저 동으로 만든 받침대에 파놓은 홈에 물을 붓고 수평상태를 잡은 뒤 지북침으로 남북 방향을 잡는다. 그리고 규형(구리를 부어 만들고 둘레에 방위를 기록한 기구)으로 천체를 겨누고 적도환의 눈금을 읽으면 해당한 천체의 적도자리표를 알 수 있게 되어 있다.

이제 우리 모두 이 세상을 꼼꼼히 살피는 관측대가 되어야

창경궁 관천대 대의 한 가운데에는 다시 돌대가 놓여 있어, 그 위에 소간의(小簡儀)를 설치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창경궁 관천대대의 한 가운데에는 다시 돌대가 놓여 있어, 그 위에 소간의(小簡儀)를 설치할 수 있게 되어 있다 ⓒ 이종찬

창경궁 관천대 이제 우리 모두 이 세상을 꼼꼼히 살피는 관측대가 되어야
창경궁 관천대이제 우리 모두 이 세상을 꼼꼼히 살피는 관측대가 되어야 ⓒ 이종찬

관천대를 이리저리 꼼꼼하게 살피며 한 바퀴 빙 둘러보고 있는데 저만치 까치 한 마리 관천대로 들어오는 길목에 살포시 내려앉는다. 사람들 발길이 많이 닿지 않아서 그럴까. 아니면 길목이 진초록 숲에 늘 그늘져 있었기 때문일까. 까치 한 마리 연초록 이끼가 촘촘촘 끼어 있는 길목을 톡톡 튀며 무언가를 콕콕콕 쪼고 있다. 

관천대를 되돌아보며 나그네가 까치 가까이 다가서자 포르르 날아올라 관천대 위에 살포시 앉아 나그네를 바라보며 깍깍깍 몇 번 운다. 마치 나그네에게 관천대에서 천문을 관측하지도 않고 왜 그냥 가느냐고 조롱하는 투다. 아니, 관천대까지 와서 왜 노 전 대통령 혼백이 어디 있는지 살펴보지도 않고 가느냐고 원망하는 것 같기도 하다.

까치야! 설령 관천대에 올라선다 해도 천체 위치를 관측하는 소간의도 없고, 소간의가 있다 해도 천문을 살필 줄 모르는 나그네 더러 어쩌란 말이냐. 게다가 지금은 살을 콕콕콕 찌르는 따가운 땡볕이 쏟아지는 대낮이지 않느냐. 이 벌건 대낮에 어찌 하늘에 떠있는 별들을, 어찌 우리들 가슴에 영원한 별이 된 노 전 대통령 혼백을 살펴볼 수 있겠느냐.

조선시대 천문을 살피며 일 년 농사와 기후, 나라의 길흉화복을 점쳤다는 관천대. 나그네는 그날 관천대에서 까치 한 마리를 통해 노 전 대통령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이 더럽고도 아니꼬운 세상을 꼼꼼히 관측했다. 관측대를 먼발치로 다시 한번 바라보며 나그네 스스로 이 세상의 관측대가 되기로 굳게 마음먹었다.

덧붙이는 글 | ☞ 가는 길/서울-안국역 4번 출구-경희대 시내 한방병원 방향-창경궁-관천대
<유포터>에도 보냅니다



#창경궁 관천대#조선시대 첨성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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