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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겉그림 신지혜·최지영의 〈시네마 레터〉
책겉그림신지혜·최지영의 〈시네마 레터〉 ⓒ 루비박스

지나 온 시절 나는 꽤 많은 편지를 썼다. 고등학교 때의 펜팔을 비롯해 군에서 위문편지를 받고서 쓴 답장도 그렇고, 대학교 다닐 때 연애할 상대를 찾아 쓴 편지들도 그렇다. 그때마다 좋은 책의 내용을 가져다 쓰기도 했고, 나 스스로 멋진 말들을 지어내느라 진땀을 흘리기도 했다.

 

내 기억 속에 떠오르는 수신자들은 누가 있었나? 중학교 때의 친구 여학생, 군인인 나를 좋아했던 그 여고생, 대학교 때 같은 동아리의 그 친구. 그들은 모두 내가 쓴 편지를 곧잘 받아주고 답장도 해주었다. 물론 주소지는 그때마다 달랐다. 전남 신안군 읍내리, 경기도 여주, 전남 진도가 주요 주소지였다.

 

편지는 그렇듯 쓰는 사람이 있어야 하고, 또 받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받는 사람이 없다면 쓰는 사람도 존재하지 않는다. 대상자가 없는 편지가 어떻게 존재하겠는가? 이는 주소지도 마찬가지다. 그렇지만 신지혜·최지영의 〈시네마 레터〉는 영화 속 그 누군가가 또 다른 누군가에게 보내는 듯한 형식을 빌어 편지를 써 보내고 있다.

 

"영화 속 무수한 주인공들이 내게 말을 걸어오고 때론 내가 그들에게 말을 걸던 경험들. 말하자면 이런 것들이다. 〈러브레터〉의 죽은 후지이 이츠키는 첫 사랑과 꼭 닮았기에 히로코를 사랑한 걸까? 홍콩에서 뉴욕까지, 7년만에 소군과 재회한 〈첨밀밀〉의 이유는 과연 어떤 심정이었을까? 〈아이 엠 샘〉의 샘은 생애 단 한 번, 장애가 없는 기적 같은 순간을 맞이한다면 어떤 말을 하고 싶을까?" (영화가 말을 걸다, 영화에 말을 걸다)

 

영화 〈글래디 에이터〉는 그야말로 강인한 남성 영화다. 폭군 코모두스 황제와 맞서는 로마 최고의 남자, 로마 최고의 검투사 막시무스의 활약상이 강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나 또한 스케일이 큰 그 영화를 긴장감 속에서 흥미진진하게 본 바 있다. 그런데 만약 막시무스의 부인이 그의 남편에게 편지를 써 보낸다면 어떤 내용을 담을까?

 

독자들이야 여러 생각들을 해 볼 수 있지만, 이 책은 오직 소박한 꿈만을 그려내고 있다. 로마 최고의 남성과 살고 있다는, 그런 행복한 생활은 일찌감치 접고 있다. 막시무스는 그만큼 아내보다는 로마를 위해 온 정열을 불태우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아내가 편지를 쓴다면 아마도 고향에 내려와 밀밭 속에서 사랑을 속삭이며 사는, 밀레의 만종과 같은 그리움을 담아내지 않았겠나 하고 생각하는 것이다.

 

박두만 형사가 내뱉은 "밥은 먹고 다니냐?"가 화제를 모았던 〈살인의 추억〉도 꽤 흥미진진했다. 화성연쇄살인이라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약 그 형사가 〈다이하드〉의 존 맥클레인 형사에게 편지를 써 보낸다면 또 무슨 내용을 쓸 수 있을까?

 

이 책에서는 변함없이 발로 뛰는 존 맥클레인 형사의 자세가 부럽고, 또 한편으로 사무치는 그리움으로 남는다며 편지를 써 보내고 있다. 왜 일까? 박두만 형사가 그렇게도 열정을 다해 발로 뛰면서 용의자를 색출해 냈는데, 결국 피해자에 묻은 범인의 DNA가 용의자의 것과 일치하지 않다고 했다. 그에 따른 허탈감이 너무 큰 탓에 그 마음을 달래보려려는 뜻에서, 아마도 그런 편지를 쓰지 않았겠냐 하는 것이다.

 

그 누구보다도 열심히 일하던 페덱스의 직원 척이 무인도에 떨어진 〈캐스트 어웨이〉에서는 또 무슨 편지가 어울릴까? 그 영화를 통해서는 배구공 윌슨이 척에게 편지를 써 보내고 있는 것으로 주제를 삼고 있다. 충분히 공감이 간다. 인적 하나 없는 쓸쓸한 무인도에서 척이 배구공에게 윌슨이라는 이름을 붙여가며 대화하는 장면을 영화 속에서 그려주었기 때문이다.

 

"척. 지금은 잘 살고 있나? 구조는 받았겠지? 사랑하는 켈리와도 만났는지 궁금하네 그려. 난 여전히 바다 위를 떠돌아다니고 있다네. 어쩌면 이러다 쓰레기로 영영 버려질지 몰라도 상관없다네. 난 이미 최고의 친구와 최고의 삶을 산 멋진 배구공인걸."(139쪽)

 

총 39편의 줄거리와 함께, 각각의 편지를 써 보내고 있는 이 책을 통해 나도 그들에게 편지를 써 보내고 싶다는 생각이 문뜩 들었다. 때로는 허풍을 떠는 듯 하면서도 깊은 의미를 던져 주고 있고, 냉냉한 거리감을 주는 듯하면서도 깊은 사랑고백을 하고 있는 이 편지들을 통해 나도 영화 속 주인공이나 또 다른 누군가에게 내 이름으로 된 편지를 써 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시네마 레터 - 영화 속 누군가가 누군가에게 보내는 편지

신지혜.최지영 지음, 루비박스(2009)


#영화 속 편지#신지혜·최지영 〈시네마 레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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