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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5월23일. 역사는 앞으로 이 날의 일을 어떻게 기록할까? 노무현 전 대통령이 검찰의 강도 높은 조사를 받아 오다가 스스로 절벽에 투신한 한국 사회의 비극에 대해 말이다.

 

오늘의 비극적인 역사를 제대로 기억하기 위해선 지금 현재를 사는 이들이 생생히 살아 있어야 한다. 산다는 것은 현재를 제대로 기록하고, 오래도록 잊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야 미래의 주역들이 오늘날과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테니 말이다.

 

그렇기에 나는 쓰라린 마음으로 쓴다. 대한민국 서민 대통령의 슬픈 서거에 대해.

 

죽어서 사는길 택한 '서민 대통령'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한 가운데 24일 오전 경남 김해시 봉하마을회관 앞에 마련된 임시분향소를 찾은 한 추모객이 헌화를 마친 뒤 눈물을 훔치고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한 가운데 24일 오전 경남 김해시 봉하마을회관 앞에 마련된 임시분향소를 찾은 한 추모객이 헌화를 마친 뒤 눈물을 훔치고 있다. ⓒ 사진공동취재단

5월 23일 새벽, 한 국가의 수장이었던 노무현 전 대통령은 가파른 절벽 위에 섰다. 당시 그는 삶과 죽음을 놓고 깊은 고뇌에 빠졌을 것이다. 어쩌면 머릿 속에서 수많은 인생역정을 떠올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상고출신인 그가 사법시험에 합격한 것은 '개천에서 용났다'는 말이 딱 어울릴 정도로 부와 행복을 보장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당시 노무현 전 대통령은 주어진 행복을 포기하고 인권변호사로 활동하겠다는 결단을 내린다. 급기야 1987년 최루탄에 맞아 숨진 노동자 이석규씨와 관련되어 구속을 당한 고통마저 감내한다.

 

암울했던 80년대에 민주화를 위해 발벗고 나선 인권 변호사는 결코 쉽지 않는 길. 하지만 노무현 전 대통령은 험하디 험한 그 길을 택했다. 그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아마도 인권 변호사 시절 그의 곁에는 지켜야할 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기득권층에 억눌려 사는 서민들 말이다.

 

서민을 위한다는 그 신념은 정치인이 된 이후에도 변하지 않았다. 1988년 5공 청문회 때는 강도 높은 질문으로, 권력에 의해 민주화의 욕구를 억눌렸던 서민들의 마음의 울분을 씻어주었다. 도덕성을 바탕으로한 그의 신념은 국민들의 전폭적 지지를 얻어 대한민국 16대 대통령의 자리에 오르게 만든다. 그의 운명은 숨가쁘게, 그리고 드라마틱하게 전개되었다.

 

하지만 대통령이 된 후, 그의 삶은 순탄치 못했다. 진보 진영에서, 그의 반대편에 섰던 보수 진영에서도 사랑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의 말은 언론에 의해 확대 재생산 되기 일쑤였고 폄하되어 깎아 내려지곤 했다. 이런 일련의 상황은 노무현 전 대통령을 국민들과 멀어지게 만드는 단초를 제공했다.

 

말년의 낮은 지지율은 그가 국민들한테도 사랑받지 못한다는 것을 방증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노무현 전 대통령이 이룬 업적은 괄목할만 했다. '행정수도이전' '정치개혁' '한미관계' '자주국방' '개성공단' '경제성장' 등의 정책은 대한민국을 좀더 튼실하게 만들었음에 틀림없었다.

 

퇴임 후, 그의 소망은 그의 고향에서 편안히 사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작은 소망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검찰에 의해 '포괄적 뇌물 수수 의혹'을 받고 가족과 측근들이 강도 높은 수사를 받았던 것이다. 측근 중 더러는 구속되었고, 가족 중 더러도 강도 높은 조사를 받아야 했다. 고통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일부 언론에 의해 매일 매일 확인되지 않는 사실들이 악의적으로 보도됐다.

 

그렇기에 '서민 대통령'이라 불리던 노무현 전 대통령의 도덕성의 심장은 보이지 않는 칼에 의해 무자비하게 도려내지고 있었다. 한 평생 지켜온 신념이 비난받는 상황에서 결국 그는 극단적 선택을 했다. 새벽녘 유서를 남기고 어린 시절부터 자주 오간 봉화산에 오른 것이다.

 

한참을 걸어 봉화산 절벽 위에 선 노무현 전 대통령, 거기서 그는 자신의 굴곡 많은 인생을 생각하며 이른 새벽 써나간 유서의 문장을 떠올렸을지 모른다.

 

'너무 슬퍼하지 마라.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는가. 미안해 하지 마라.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 운명이다.' 라는 그 절박한 문장을.

 

죽음을 앞두고 운명이라는 단어를 스스럼없이 써내는 모습은, 희망이 넘치던 재임 시절의 그와는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  얼마나 힘겨웠고 비통했을까, 그가 겪었을 정신적 고통을 감히 짐작해 본다. 

 

이런 상황에서 그는 어쩌면 간절히 바랬을지 모른다. 결백하다는 자신의 말을 믿어줄 국민들을, 하지만 등돌린 여론은 싸늘했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진정성을 믿어주는 국민은 소수였다. 청렴하게 살고 싶어했던 그의 신념은 내적 고충에 휩싸였을 것이다.

 

"갈수 없는 길과 가야 하는 길은 포개져 있었다. 죽어서 살 것인가, 살아서 죽을 것인가? 죽어서 아름다울 것인가, 살아서 더러울 것인가?"

                                                                                      <소설 남한산성중에서>

 

그는 이런 상황이 억울했을 수도 안타까웠을 수도 있다. 하지만 담대하게 모든 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였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선택은 죽음이었다. 그의 인생역정을 알고 있는 이들에겐 최고의 대통령이었던 노무현 전 대통령은 향년 63세의 나이로 굴곡진 생을 마감했다. 서민 대통령이라 불렸던 그는 살아서 죽는 길이 아닌, 죽어서 사는 길을 택한 것이다. 그 사소한 차이는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어쩌면 신념을 숭고하게 생각하는 마음가짐에서 나오는 것은 아닐까 싶다.

 

 

 

 


#노무현#서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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