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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소는 무얼 먹고 살까?"

 

피난 길 이틀 만에 봉이가 한 말이었다. 제 갈 길이 바빠 미처 생각도 못한 어른들의 박정함을 어린 봉이가 깨우쳐 준 것이었다. 염소는 새끼를 낳은 지 20일밖에는 되지 않았다. 어미를 잡아먹으려니 새끼가 가엾고, 새끼를 먹으려니 그 짓도 차마 할 노릇이 아니어서, 염소들에게 먹을 걸 모아서 마련해 주고 길을 떠난 것이었다. 봉이는 그 염소가 먹을 게 떨어지면 어떻게 될지를 걱정하고 있는 것이었다.

 

함박눈이 하염없이 내리고 있었다. 어제 한강의 부교를 건널 때에는 달빛이 교교하더니, 오늘은 낮때부터 내리기 시작한 눈송이가 주먹 만하게 굵어져 있었다. 흔들리는 트럭 위에서 그들 일가족은 서로의 얼굴들을 근심스레 보고 있었다. 그들은 수원에 도착해 초라한 음식점 부엌 바닥에 거적을 깔고 밤을 지새웠다.

 

경부가도에는 다음 날에도 눈이 내렸다. 트럭 위에 높다랗게 실린 짐 위에서 정숙과 아이들은 누비이불로 몸을 감싸고 있었고, 김성식은 외투 자락으로 눈보라를 막았다. 하지만 김성식은 상심하지 않고 있었다. 피난도 하지 못하는 사람이 태반이었다. 그리고 기차 꼭대기에 주렁주렁 매달려 가는 사람도 많았다. 자신의 처지는 그래도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피난길에 들리는 소문들 

 

별의별 흉흉한 이야기들이 피난민들의 입에서 입으로 퍼지고 있었다.

 

-기차 지붕에 올라탄 여인이 아이들을 줄로 묶어 차고 있었는데 엄마가 그만 졸다가 떨어져서 아이들까지 함께 죽었대요.

 

-어떤 부인은 달리는 기차 지붕 위에서 해산을 했대요. 엄동설한의 냉기로 판단력이 흐려진 산모는 아기를 놓아 버리면서 자기는 의식을 잃었대요.

 

-어떤 엄마가 아이에게 젖을 먹이려고 꽁꽁 언 손으로 가슴을 열고 아기를 내려다봤는데 이미 아기는 싸늘히 식어 죽어 있더래요. 그것을 보자 그 자리에서 미쳐 버렸대요.

 

다음 날 김성식 일가는 조치원에서 밤을 보냈다. 그는 예산에 가 있는 이두오 생각이 잠시 스쳤다. 그들은 영동에서 하루를 더 묵고 다음 날 대구에 들어갔다. 그는 아버지를 찾아뵈었다. 그의 아버지는 병석에 누워 있었다.

 

아버지는 눈물을 쏟으며 아들의 손을 부여잡았다. 그는 아버지와 함께 하룻밤을 보냈다. 아버지는 영동 노근리에서 미군의 총에 맞아 얼굴이 반쯤이나 날아간 사촌 조카 구학 형제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아침이 되어 병든 아버지를 두고 떠나야 하는 김성식은 앞을 가리는 눈물 때문에 제대로 신발조차 찾아 신지 못했다.

 

마침내 그들은 바다가 보이는 남쪽 끝 부산에 닿았다. 손발은 꽁꽁 얼었고 얼굴에는 땟물이 흘렀다. 그들 일가는 당장 하룻밤을 의지할 데가 없었다. 부산 거리는 피난민들로 복작댔다. 일가는 낯선 거리를 밤늦도록 헤매었지만 여관방 하나를 얻을 수가 없었다. 통행금지 시간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김성식은 그리 잘 알지도 못하는 이석태의 집에 가 하루 밤을 구걸했다. 이석태 부부는 의외로 그들을 살갑게 맞아들였다.

 

다음 날 김성식은 영문도 모르게 얼굴이 부어올랐다. 심한 붓기로 눈을 바로 뜰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병원에 들렀더니 피부병이 한고비에 이르렀으니 내버려두면 가라앉을 거라고 했다. 의사는 마지못해 칼슘 주사를 한 대 놓아줄 뿐이었다.

 

정숙이 목이의 노트를 가져와 김성식에게 보여 주었다. 한글을 깨우친 목이는 자기가 한 착한 일을 매일 한두 가지씩 적었다. 목이는 벌써 42개를 적어 놓고 있었다. 목이가 글을 쓸 때 봉이는 형의 얼굴에 바짝 입을 대고 후후하고 입김을 불어댄다. 입 냄새를 풍기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목이는 화내지 않고 슬며시 몸을 돌려 묵묵히 자기 일을 계속했다.

 

김성식은 목이가 적어 놓은 '착한 일' 중에서 몇 개를 추려 보았다.

 

1.봉이와 싸우지 않는다.,, 7.누나 말을 잘 듣는다.,, 14. 동생 과자를 욕심내지 않는다.,,   21.봉투 접기를 잘한다.,, 28.시계를 잘 알아본다.,, 35.손을 잘 씻는다.

 

정숙이 손가락으로 노트를 짚으며 말했다.

 

"오늘 쓴 거 두 개를 마저 보세요."

 

41.식전에 거지처럼 주인댁에 가지 않는다. 42. 우거지를 잘 먹는다.

 

김성식은 얼굴이 화끈거렸다.

 

아이들이 즐겨 부르는 노래들이 이상해지고 있었다.

 

새 새 새/ 아침 바람 찬 바람에/ 울고 가는 저 기러기/ 무얼 하러 가나/ 새끼 치러 간다./ 몇 마리 쳤나/ 세 마리 쳤다./ 너 한 마리 갖고/ 나 한 마리 갖고/지져 먹고 볶아 먹고/ 짱, 껜, 뽀!

 

누가 부르기 시작한 노래인지는 몰라도 이 노래는 모르는 아이가 없는 듯했다. 세 살짜리 막내 봉이도 이 노래만 나오면 신명을 내며 우쭐거렸다. 왜 하필 기러기 새끼를 나눠 가져서 지져 먹고 볶아 먹겠다는 아이디어를 갖는 것일까?

 

다음으로 아이들이 자주 부르는 노래는 군가였다.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 

 

그들 부부는 아이들을 데리고 송정에 구경 나갔다. 김성식은 바다가 보이는 산마루턱 움막 앞에 앉아 잠깐 쉬기로 했다. 지나가던 청년 하나가 김성식에게 다가와 신분증명서를 내 보였다. 그를 검문 검색하는 경찰이나 군인쯤으로 오인한 것이었다.

 

김성식은 한참이나 웃었다. 검문은 도심지에서만 하는 줄 알았는데 후미진 산골일수록 더욱 심한 것 같았다. 그들은 행인을 아무나 붙잡아 시민증이나 도민증을 보자고 했다. 수상한 사람은 몸을 수색하기도 했다. 가방을 든 경우라면 예외 없이 검문 대상이 되고는 했다.

 

지금 남창 어디에 다알리라 뿌리를 묻어야...

 

며칠 후 얼굴의 붓기는 빠졌지만 이번에는 까닭 모를 열이 올랐다. 하지만 그는 법대 강의에 나갔다. 남하한 후 처음 있는 강의라서 꼭 참석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강의실은 법원 앞 법률 사무소의 방 한 칸을 빌려 마련된 것이었다.

 

20여 명의 학생이 모여 툇마루까지 넘쳤고 학생들은 눈에 빛을 내며 진지하게 수강했다. 김성식은 몸이 아픈 것도 모르고 강의에 열중했다. 교실 구석에는 한 여학생이 데려온 아기가 태평하게 낮잠을 자고 있었다. 그는 학생들을 격려하고 싶었다.

 

"가열한 현실에서도 면학 분위기를 가질 수 있는 것을 천행으로 여깁니다. 벌써 백만 단위의 인명이 희생되었고 부모 형제가 갈려 총부리를 겨누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잘 곳도 마땅치 않고 먹을 것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비통한 현실에 짓눌리지 말고 젊은 학도로서의 긍지를 가져야 합니다. 이성적인 눈으로 세상을 보기 바랍니다."

 

학생들에게 힘을 주려고 한 말인데 의도와는 반대로 그들은 불현듯 숙연해졌다. 이윽고 이 구석 저 구석에서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김성식도 목이 메어 말을 계속할 수가 없었다.

 

그는 학생들에게 들려주려고 했던 말을 그 날 밤 일기에 대신 적었다.

 

민족 공전의 위기에 직면하여 마음이 암담해지지만 우리 겨레의 생명력은 강인하다고 나는 믿습니다. 고구려가 멸망한 후에도 발해의 헤게모니는 고구려의 유신들이 잡았고, 고려 중기 이후 몽고의 세력에 밀려 국토가 자비령과 철령 이남으로 줄어들었지만, 우리 동포는 중국 심양 근처로 진출하여 삶의 터전을 다졌으며, 망운의 조선 말년에도 우리 민족은 북간도에 나아가 신 거류지를 개척했습니다.

 

일제의 가혹한 착취와 탄압 중에도 우리 겨레 수십만은 현해탄을 건너 나가 살았고, 북으로는 만주 벌판에 백만이 넘는 동포가 뻗어나갔습니다. 물론 일제의 힘에 밀려서 쪽박을 차고 나간 것이지만, 그들은 자멸하지 않고 생생히 버텼습니다. 우리는 그 생명력을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어떠한 고난이라도 헤쳐 나갈 수 있다는 것을 역사는 분명히 증언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늦지 않았습니다. 지금 남창 밑 어디에라도 다알리아 뿌리를 묻어야 합니다. 그 뿌리에서는 봄이 되면 정녕코 새 움이 돋아날 것입니다. 다알리아 뿌리는 긴긴 겨울 밤 켜켜이 얼어붙은 땅속에서 은밀하지만 치열하게 미동할 것입니다. 때가 되어 순이 트고 굵은 줄기로 자라나서 청초하고 그윽한 꽃을 소담스럽게 피우는 날을 기약하면서... 

덧붙이는 글 | 사학자 김성칠 선생의 일기 <역사 앞에서>를 참조한 부분입니다.


#14후퇴#다알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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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과 평론을 주로 쓰며 '인간'에 초점을 맞추는 글쓰기를 추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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