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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만을 위한 연주였습니다.

"시골마을이니까 어울리는 '목포의 눈물'을 연주하겠습니다."

부드러우면서도 구성지며 강단진 가락에 가슴이 뿌뜻해집니다.

이렇게 고국에 돌아올 때마다  날 위한 곡을 연주해주는 제자가 있다니 참 복 받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선생님, 꾸짖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규
 규
ⓒ 김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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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는 공부 같은 것 하지 않겠다고, 그냥 안마만 하고 살아갈 거라고 도망다녔습니다. 

나는 안마는 최후에 선택해도 늦지 않으니 네가 좋아하는 음악을 하기 위해서라도 대학진학은 꼭 필요하다고 언성을 높이고 쫓아다녔고 관악지도 선생님과 합동작전으로 그 아이 음대 보내기 작전을 펼쳤습니다. 관악지도 김 선생은 규에게 무료로 클라리넷 지도를 받을 수 있는 선생님을 소개시켜 주었고 결국 규는 나머지 시간동안 열심히 연주하여 음악전공을 할 수 있는 학과를 갔습니다.

진학 후에 내게 작은 상자에 담긴 속옷을 선물했는데, 참으로 날 울린 문구가 적혀 있었습니다. '선생님, 꾸짖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말이에요. 난 한 편으로 그 애에게 화를 많이 낸 것에 대한 자책감이 있었는데, 그 한마디에 마음 한구석에 자리잡고 있던 응어리가 모두 풀렸습니다. 그리고 내가 그 아이를 포기하지 않고 나무랐던 행위들이 옳았다는 생각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선생님이란, 마냥 좋은 존재일 수만은 없습니다. 당시에 아이가 싫어할지라도 그 아이의 미래에 도움이 될 만한 진정한 교육을 했다면 아이는 언제고 그걸 깨달으리라 믿습니다.

규는 세상을 볼 수 없는 시각장애인이지만 밝고 즐겁게 음악활동을 하며 주변에 작은 파장을 주어 결국 많은 이들의 도움으로 독일로 유학가서 공부하고 있는 중입니다. 작년에 왔을 때는 학교 옆 음식점에서 나와 내 딸을 위한 연주를 해 주었는데, 올해는 시골로 이사온 우리집까지 와서 그동안 기량을 늘린 클라리넷 연주 가락을 들려준 것이니 내가 어찌 감격스럽지 않겠습니까?

연주에 덧붙여 내 어깨를 더욱 무겁게 하는 말도 해 주었습니다. "선생님과 스승님의 차이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선생님은 가르쳐주시는 분이시라면 스승님은 한 차원 더 넘어서 존경하게 되는 선생님인데, 내게 선생님은 스승님입니다"라고 말입니다. 정말 부족한 내가 이런 말을 들어도 될까 생각하니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가능성이 많은 아이 '옥', 그러나...

옥
 옥
ⓒ 김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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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은 쇼 그랜이라는 희귀병 진단을 받고 자퇴를 하게 된 옥이를 규와 함께 초청했습니다. 지금 어두운 현실에 절망하는 옥이에게 어두운 터널을 굳세게 헤치고 가고 있는 규의 이야기를 들으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서였습니다.

옥이는 일반중학교를 졸업하고 시각장애특수학교인 우리 학교 고등부에 입학한 아이였습니다. 난 당시 옥의 담임으로 항상 깊은 관심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옥이는 너무나 많은 가능성을 지닌 아이였기 때문입니다. 입학 후 처음 본 모의고사에서 모든 과목에서 1등급에서 3등급까지 속했기 때문입니다.

특수학교에서 고1 때 이런 실력이라면 열심히 하면 자신이 원하는 최고의 대학을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옥이는 장래 음악치료사가 꿈이라며 여러가지 포부를 이야기했습니다. 그래서 당시 규가 잠시 귀국했을 때 재량활동시간을 이용하여 학급으로 초빙하여 음악에 대한 것을 듣게 만들었는데 여러 아이들 중에서도 중점을 두었던 아이가 바로 옥이였습니다.

그러나 옥이는 이런 나의 바람에도 불구하고 나날이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했습니다. 저시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보이지 않는다고 하고, 또 잘 들리지 않는다고 하고, 피곤해서 보건실에 가서 쉰다고 하는 것들이 꼬옥 부러 딴청을 피우는 것 같이 느껴진 적도 많았습니다.

당연히 일반학교에서 특수학교로 전학을 오니 정서적으로 적응을 하지 못하는 것 같다고 그리들 생각했습니다. 처음에는 나 또한 그리 생각했으나 조금 지나서 난 아이의 말을 100% 믿어주었습니다. 그것이 정서적인 문제이든 어떻든 아이는 괴로우니까 호소하는 것이므로 당연히 어루만져주어야 된다는 생각이었죠.

옥이는 지속적으로 서울과 광주를 오가며 병원을 다닌 끝에 결국 희귀병 판정을 받은 것이지요. 그 아이의 체력의 한계는 세 시간이라나요, 가끔씩 귀도 안 들리고, 잘 보이지 않고, 오만 데가 다 아프고…. 결국 자퇴를 하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정말 마음이 아팠습니다.

"이런데도 넌 네가 가장 최악이라고 말할 수 있겠니?"

그런 옥이에게 규는 말했습니다.

"야, 그래도 넌 나보다 나아. 난 어릴 때부터 보지 못했기 때문에 상상력에 한계가 있어. 그런데 넌 지금까지 보고 있으며, 또 앞으로 시력을 모두 잃는데도 상상력의 날개가 나보다 넓어.

내가 제일 궁금했던 것이 어떤 것들이었는지 아니? 도대체 붉으락푸르락은 무슨 색일까? 도대체 누룽지의 누르스름한 색은 또 어떤 색일까? 적어도 넌 이런 궁금증은 없잖니? 그리고 지금까지 본 것을 바탕으로 눈을 감아도 다 알 수 있잖아. 그러나 난 한계가 있어. 따라 갈 수 없는 한계 말이야. 이런데도 넌 네가 가장 최악이라고 말할 수 있겠니?

내가 아는 친구는 근이양증으로 일어날 수도 없어. 말을 하면 알아먹는다는 표시로 눈만 깜박이는 친구인데, 가까스로 앉혀 놓으면 정말 움직이기 어려운 손가락들을 움직여 하루 종일 자판을 찍는데, 겨우 A4 용지 한 장도 못 찍는데, 그래도 얼마나 행복해하고 뿌뜻해하는지 몰라. 넌 이 친구보다는 낫잖아. 아직도 넌 가진 것이 너무 많잖니? 힘 내.

내가 말이야, 독일 갔을 때, 정말 어려웠어. 독일 점자를 익히기 위해 삼일 동안 한 시간만  자고 읽고 쓰고 읽고 쓰고 반복한 끝에 독일 점자를 이해하게 되었어. 다들 나름대로 다 어려움 겪고 살아나가는 거야. "

선배인 규는 옥에게 많은 힘을 실어주고 떠났습니다.

집으로 돌아간 옥에게서 문자가 왔습니다.

"선생님, 오늘 고마웠어요. 힘내서 열심히 살게요."

시각장애 내 제자들을 통해서 난 많은 것을 배우고 느끼게 됩니다.

참된 스승의 사랑은 달콤한 말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날카로운 말, 아픈 말에도 있음을 스스로 알아채는 제자가 있었으니 그동안 내 맘 속의 앙금이 되어 남아 있었던 제자에 대한 미안함이 모두 씻어졌습니다.

규와 옥이는 앞으로 나보다 더 큰 나무가 되어 모두 쉴 수 있는 그늘을 드리울 것입니다. 내가 존경할 수 있는 사람이 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며 이들을 기다릴 것입니다. 또 귀국하여 나를 위한 연주를 해 줄 규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입가에 미소가 지어집니다.


태그:#스승의 날, #시각장애 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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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시각장애 특수학교에 근무하고 있습니다. 동료 선생님의 소개로 간간이 오마이 뉴스를 애독하고 있습니다. 바쁜 일과 중 저의 미숙하고 소박한 글이나마 올릴 수 있는 기회가 되어 좋습니다. 제가 글을 올리면 전국의 네티즌들이 모두 본다는 것을 생각하면 무서운 생각도 듭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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