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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리나행 기차는 8시에 떠나가네

 

11월은 내게 영원히 기억 속에 남으리

내 기억 속에 남으리 카테리나행 기차는

영원히 내게 남으리

 

함께 나눈 시간들은 밀물처럼 멀어지고

이제는 밤이 되어도 당신은 오지 못하리

당신은 오지 못하리 비밀을 품은 당신은

영원히 오지 못하리

 

기차는 멀리 떠나고 역에 홀로 남았네

가슴 속에 이 아픔을 남긴 채 앉아만 있네

남긴채 앉아만 있네 가슴 속에 이 아픔을

남긴 채 앉아만 있네.'

 

마음의 물기가 메말라 가던 어느 날

 

조수미가 부르는 '기차는 8시에 떠나가네' 곡을 듣는다. 애수어린 음률... 그리움, 안타까움... 쓸쓸함... 이별... 가슴 아리게 애달픈 음악이다. 참 오랜만이다. 소설가 신경숙의 낡은 소설을 손에 들어보는 것이. 요즘 내 마음의 물기가 너무 메말라 있었던가. 내 메말라가는 가슴 속에서 모래알이 서걱거리는 것 같은 건조함이 느껴지는 것은.

 

오랜만에 소설을 손에 들었다. 오래된 책, 제목만 불러보아도 왠지 그리움 같은 것이, 아스라이 멀어져간 추억 속의 어떤 장면이 떠오르는 것처럼, 무의식 깊이 가라앉아 있던 일련의 기억들이 안개 속에서 뚜벅뚜벅 걸어 나올 것 같은 예감을 하며 책을 집어 들었다. 딱히 기차에 얽힌 추억이 없다 할지라도 제목만 보고도 한번쯤 자신의 추억 속에 이런 장면이 있었는지 떠올려 볼 것도 같다.

 

기차는 7시에 떠나네

 

신경숙의 장편소설 <기차는 7시에 떠나네>(문학과지성사)는 '테오도라키스'의 곡에서 제목을 따온 것으로, 서른다섯, '몸속의 습기가 메말라가는 나이, 만남도 이별도 새롭지 않고 처음 만나는 사람조차 언젠가 한번은 본 듯한 느낌이 드는 나이', 이십대 초반 때의 기억을 잃어버린 채 김하진으로 살아가던 한 여자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 떠나는 여정을 그리고 있다.

 

"어떻게 하자는 게 아니에요. 부슬부슬 내리는 비를 맞고 있는 것처럼요. 내 의식에 깔려있는 이 좌절감의 정체를 알고 싶어서 그래요. 그러지 않고서는 생생하게 살 수 없을 것만 같아서요."

 

"느끼고 싶어요. 차가운 것은 차갑게, 뜨거운 것을 뜨겁게, 내게 주어진 시간을 투명하게 느끼며 살고 싶어요. 언제부턴가 마치 남의 인생을 들여다보듯이 살고 있는 것만 같아요."

 

내면적인 문체와 소설을 다 읽고나서도 긴 여운이 남는 신경숙의 소설들, 이 장편소설에서도 그랬다. 묵직한 감동과 깊은 여운을 남겨서 괜시리 오래오래 슬퍼지기까지 하는 그이의 소설들. 하도 오래 돼서 기억조차 잘 나지 않는 <깊은 슬픔>이나 그녀의 소설들에서 느꼈던 우수를 이 소설에서도 느낄 수 있다.

 

<기차는 7시에 떠나네>에서 주인공 '나'는 마치 고동 속의 알맹이를 다 파내어버리고 집게가 대신 고동껍질 속에 들어가 살고 있는 것처럼, 자신이 아닌 타인의 삶을 살고 있는 것 같은 결핍과 상실을 앓으며 자기의 과거를 찾아가는 과정을 애잔하게 그리고 있다.

 

군부가 집권하던 암울한 시대(80년대)에 지하운동가를 사랑하던 주인공 '나'는 공단의 '노을 다방'에서 금요일마다 그를 기다린다. 그가 오면 디제이에게 '기차는 7시에 떠나가네'곡을 신청해 듣는다. 매번 디제이는 '7시'가 아니라 '8시'라고 상기시켜 주지만 신청할 때마다 '7시'라고 해 신청한다.

 

'기차는 7시에 떠나가네'가 흘러나오는 날이면 그들(동지)은 그 방에서 만난다. 주인공 '나'는 늘 불안한 모습을 하고서 집중도 되지 않는 두꺼운 책을 들고 앉아서 7시에 애인이 나타나기를 기다린다. 기차역에서 기약도 없이 기다리는 그리스의 한 여인처럼...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잡혔고, 고문당하다가 아이를 잃고 만다.

 

현재 속의 주인공 '나'의 직업은 성우이다. 이 소설 속에 한결같이 흐르는 것은 어떤 결핍감이고 상실감이다. 뭔가 훼손된 모습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아버지는 그토록 다정했던 어머니의 돌연한 죽음으로 인해 사향노루를 키우며 마음 달래며 살고, 언니의 딸 '미란'은 친구와 애인의 배신으로 인한 충격으로 일시적으로 기억을 상실한다.

 

'나'가 찾아가는 과거로의 여행에서 다시 만난 옛 애인 '은기'와 그의 아내 역시 인생의 젊은 날의 아픈 상처를 안고 훼손된 삶을 살아간다. 암울한 시대에 얻은 충격과 고통은 그 시절의 인생들을 훼손시켰고, 훼손된 삶 속에서 제각기 그 무엇인가를 보듬고 살아가는 인물들.

 

모두, 삶의 어느 한 부분, 어쩌면 많은 부분을 훼손당한 채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어찌, 소설 속의 인물들뿐이랴. 우리네 삶 도한 결핍과 상실, 상실의 아픔과 쓸쓸함을 얼마쯤은 껴안고 살아가는 것을... 그 훼손된 삶을 조각보처럼 기워 가며 살아가는 것...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 훼손된 삶을 깁다

 

미로 찾기를 하듯, 짙은 안개 속을 걸어가며 안개가 걷혀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끝임 없이 배회하듯, 긴장하며 신경숙의 소설 '기차는 7시에 떠나네'의 미로 속에 독자들은 빨려 들어간다. 격렬한 감정의 동요나 숨가쁨도 없이, 더듬더듬 말더듬이처럼 오히려 더 잦아드는 마음, 착 가라앉는 마음과 물기 젖은 마음으로 소설 속에 깊이 침잠하게 만든다.

 

소설을 따라 가면서 독자들은 자기의 추억, 그 사람만이 가진 기억의 편린들과 상실의 시대를 추억하며 옛 추억의 편린들을 따라 간다. 망각해 버렸거나 깊은 추억의 저장고에 너무 오래 묻어두었던 제각각의 기억을 불러올리며, 소설 속으로, 그리고 자신의 추억 속으로 빠져 들어간다.

 

"닳아진 조각보처럼 그와 여자가 낳아 기르고 있는 아이를 보는 순간, 어떤 기억들이 부분부분 솟아나기도 하고, 산만하게 흩어져 있던 목소리들이 기워지기 시작했다."

 

소설의 말미, 이 대목에서 '나'의 아픈 문제들이 서서히 기워지고 훼손되고 잃어버린 기억이 오롯이 되살아나는 장면이다. 조카 미란에게,

 

"잊으려고 하지 말아라. 생각을 많이 하렴. 아픈 일일수록 그렇게 해야 해. 생각하지 않으려고 하면 잊을 수도 없지. 무슨 일에든 바닥이 있지 않겠니. 언젠가는 발이 거기에 닿겠지. 그때, 탁 차고 솟아오르는 거야."

 

작가소개

'1963년 1월 전라북도 정읍에서 태어난 신경숙은 초등학교 6학년 때야 겨우 전기가 들어올 정도의 시골에서 농부의 딸로 태어나 열다섯 살에 서울로 올라와 구로공단 근처에서 전기회사에 다니며 서른일곱 가구가 다닥다닥 붙어사는 '닭장집'에서 큰오빠, 작은오빠, 외사촌누이와 함께 방에서 살았다고 한다.

 

공장에 다니며 영등포여고 산업체 특별학급에 다니다 최홍이 선생을 만나 문학수업을 시작하게 된다. 컨베이벨트 아래 소설을 펼쳐놓고 보면서 좋아하는 작품들을 첫 장부터 끝까지 모조리 베껴쓰는 것이 그이의 수업방식이었다.

 

그후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를 졸업, 1985년 <문예중앙>에 중편소설 <겨울우화>로 신인문학상을 받으며 등단하였다. 그리 주목받는 작가는 아니었으나, 1988년 <문예중앙> 신인상에 당선된 첫 창작집 <겨울우화>를 냈고 방송국 음악프로그램 구성작가로 일하기도 하다가 1993년 장편소설 <풍금이 있던 자리>를 출간해 주목을 받았다.

 

<강물이 될 때까지>,<풍금이 있던자리>, <오래전 집을 떠날 때>, <딸기밭>, 장편소설 <깊은 슬픔>, <외딴방>, <기차는 7시에 떠나네> 등 작가 특유의 문체로 슬프고도 아름답게 형상화하여 1990년대를 대표하는 작가로 자리잡았다.'

라고 말했던 주인공 '나'는 정작, 본인은 고통스러웠던 기억을 망각해 버리려고 한 그 마음이 20대의 기억을 잃어버렸고, 직면하고자 하는 마음이 들었을 때 자기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 나섰던 것이다. 그리고 뒤늦게 훼손된 인생의 그 어느 한 부분을 찾아 기웠던 것이다.

 

훼손된 삶을 기워도 조각조각 붙은 삶은 오롯이 원래의 모습을 갖추지 못하더라도 그 아픔조차도 인정하며 고개 끄덕일 수 있는 것, 그렇게 살아낼 수 있는 것. 상처를 딛고 새로 출발할 수 있는 것... 괜찮다고... 나쁘지 않은 삶을 살고 있다고 믿는 것... 그것을 말하고 싶었을까.

 

비 오는 날의 축축함 같은, 비 냄새라도 맡는 것 같은 착 가라앉은 마음으로 소설 속 여행을 떠난다. 신경숙의 소설 <기차는 7시에 떠나네>를 읽으면서 오랜만에 내 가슴에 물기가 흐른다. 내가 지나온 20대... 아픈 추억들이, 오래된 수술 자국이 비 오는 날이면 쿡쿡 아파오듯이 그 시절의 아픔이 떠올라 가슴이 먹먹해진다. 옛 생각하며 소설을 읽었다.


기차는 7시에 떠나네

신경숙 지음, 문학과지성사(1999)


#신경숙#기차는7시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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