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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식은 은혜병원의 일이 궁금해서 정숙에게 물었다.

"간호사 오현자와 박광태의 딸 미애는 어찌 되었는지 아나?"
"잘 모르겠어요."

김성식은 은혜병원으로 직접 가 보았다. 오현자 혼자서 병원을 지키고 있었다. 그는 여맹에도 적극적이던 오현자가 걱정되었다.

"오 간호사, 인천 상륙은 한 모양인데 앞으로 어쩔 작정인가?"

오현자는 뜻밖에도 무사태평이었다.

"호호. 선생님은 참 순진하셔요. 인천 상륙이고 영등포 진입이고 다 거짓말이랍니다. 그저께 인천에 다녀온 사람이 있는데, 적은 모조리 총에 맞거나 물에 빠져서 지금 인천은 평온하답니다."

"오 간호사, 그 인천을 다녀왔다는 사람이 한 달 전에는 대구를 다녀왔다고 한 사람 맞지?"
"네. 보고 온 사람 말을 믿어야지요."

"이번 기회에 북에 있는 애인을 만나러 가면 어떨까?"
"그이는 지금 낙동강에 있대요. 나는 여기 있다가 적이 남해 바닷물로 다 빠지면 그때 만나야지요. 이제 대구와 부산도 다 해방되었답니다."

"누가 그런 말을 하던가?"
"벽보도 나붙고 또 여맹에서도 축하 행렬을 준비하고 있는 걸요?"

"저 대포 소리를 들으면서도?"
"다 연습하는 거라잖아요."

"미애 양은 아버지 따라 갔나?"
"미애는 남이건 북이건 그 움막 청년 있는 곳에 남겠대요. 주먹밥 싸들고 움막으로 갔을 거예요. 에이, 미애도 참 안 됐어요. 그 이두오란 사람이 미애를 좀 좋아해 주면 좋으련만…. 그렇게 타이르고 깨우쳐 주어도 막무가내예요."

병원을 나서는 김성식은 만감이 교차했다. 오현자건 박미애건 둘 다 착한 처녀들인데, 둘 다 자신들의 힘으로는 제어할 수 없는 무엇에 홀려 있다는 점은 마찬가지라고 생각 들었다.

마을에는 흉흉한 소문이 잇달았다. 지서 옆에서 유치원을 하던 심현성이 죽었다고 했다. 심현성은 집에 있다 끌려 나와서 개울가에서 총살되었다고 했다. 빨치산이 내려 와서 유치원을 빌려달라는 것을 거절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의 부인이 따라가 막으려다가 총을 맞아서 한쪽 볼이 깨어졌다고 했다. 아이들은 모두 어리다고 했다.

심현성의 시체는 거적때기에 덮여 있다고 했다. 그는 일본에서 임업학교를 다녔다고 했는데, 언제나 말수가 적었고, 늘 정원에서 채소나 과일나무를 손질하던 사람이었다. 서울 시내에서는 학살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는 소문이 들렸다. 김성식은 얼마 전 이병도의 집에서 호박죽을 먹을 때 김상기 선생이 했던 말이 적중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내 방향에서는 포성뿐 아니라 연기가 치솟고 있었다. 저녁 때 산에 올라가 보니, 빨간 불길이 짚동처럼 하늘로 길길이 오르는 것이 보였다. 동대문이나 을지로 근처인 듯싶었다. 비행기는 24시간 폭격을 퍼붓고 있었다. 이제 서울 시내는 모두 초토화되고 있는 듯했다. 김성식은 장안에 있는 숭례문, 경복궁 등의 문화재들을 생각했다.

이미 인민군 수뇌부들은 모두 도망치고 졸병들이 남아 시간을 끌며 버티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김성식의 짐작은 정확한 것이었다. 그 시간 정릉에서 멀지 않은 미아리고개에는 무수한 차량들이 불을 끈 채 이동하고 있었다. 벌써 며칠째 계속되어 온 행렬이었다. 소형 군용 차량이 먼저였고, 천막을 씌운 대형 화물차량이 뒤를 이었다.

돈암동에서 길음교로 이어지는 미아리고개는 서울의 관문과 다름없었다. 그 고개는 병자호란 때 청나라 사람(되놈)들이 몰려 넘어온 고개라고 해서 되넘이고개라는 이름이 쓰이기도 했다. 불과 석 달 전 검은 위용을 부리며 미아리고개를 넘어온 전차들은 이제 후퇴 대열에는 끼지 않았다. 거의 파괴되었기 때문이었다.

미아리고개를 걸어서 넘어야 했던 사람들은 주로 납북자들이었다. 전쟁이 끝난 후 <단장의 미아리고개>라는 가요가 유행하게 되리라는 것을 그때의 김성식으로서는 알 턱이 없었다.

미아리 눈물고개 님이 넘던 이별고개/ 화약연기 앞을 가려 눈 못 뜨고 헤메일 때/ 당신은 철삿줄로 두 손 꽁꽁 묶인 채로/ 뒤돌아보고 또 돌아보고 맨발로 절며절며/ 끌려가신 이 고개여 한 많은 미아리고개

쓸 만한 사람은 다 북으로 가고...

저녁 무렵 큰 보따리를 짊어진 사람이 김성식의 집에 찾아왔다. 그는 콧수염 때문에 나이가 지긋해 보였다. 김성식은 얼굴을 자세히 보고서야 그가 중학 때의 친구 김춘득임을 알아보았다. 그는 어린 시절 김성식과 한 방에서 자주 뒹굴었던 아주 가까운 친구였다. 그는 독은기라는 예명으로 세상에 알려져 있는 영화배우이기도 했다. 그는 본래 의식이나 이념이 분명한 친구는 아니었다. 그러나 많은 예술인이 좌경화하는 통에 그도 묻어서 그리 된 것 같았다.

많은 이들이 일제의 전시동원체제에 시달리다가 8·15 해방을 맞아 한껏 기대에 부풀었던 차에, 남조선의 문화정책이란 것이 하도 빈곤하여 실망한 것도 사실이었다. 이에 대한 반발로 이북에 호감을 갖게 된 면도 있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대부분의 문화예술인들을 놓쳐버렸다. 이북은 활발하게 선전공작을 벌여 수많은 문화예술인들을 좌로 기울게 했다.

"평양까지만 가면 교양 받으러 가 있는 우리 딸 춘심이가 있으니까…."

말끝을 흐리는 이 중년 배우는 이제 북으로 떠나지 않으면 안 되게 된 성싶었다. 그는 몇 해 동안 폐병을 앓은 병자였다. 마냥 허약해 보이는 그가 큰 보따리까지 지고 수백 리 밤길을 어찌 헤쳐 나가랴 싶었다. 김성식은 그에게 보태줄 노자는 물론이고 돈 될 만한 물건조차 없는 것이 못내 안타까웠다.

자꾸만 줄어드는 문화예술인과 기술자들, 몇 십 년을 길러야 하는 그들을 다 놓쳐 버리고 대한민국은 어떻게 살림을 꾸려갈 수 있을 것인지? 글줄이나 쓰고 그림 폭이나 그리던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쓸 만한 사람들은 대부분 북으로 갔다. 학계에서도 발랄한 신예들은 어김없이 북을 택했다.

떠나는 그들이 공산주의자나 사회주의자라면 모르되, 대부분 양심적으로 중립을 지키는 사람들마저 대한민국은 그들을 성토하여 설 땅을 앗아 버렸다. 물론 무턱대고 간 그들에게도 잘못은 있을 것이다. 남의 떡이 더 커 보이는 심리도 있었을 터였다.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고 이상을 추구하는 것은 순수한 사람들이 갖는 맹점 중의 하나일 것이다. 그런데다 이북의 선전공작이 강력했고 또 좋은 미끼로 낚았던 점도 무시 못했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떠난 사람을 비난할 수 있는 밑굽이라도 있는가? 그들에게 일할 분위기를 제공하기는커녕 근거 없이 그들의 인권을 짓밟고 그들의 양심을 불온시하지 않았던가? 요컨대 대한민국은 그들의 등을 떠밀어서 38선 너머로 보낸 것이 아니던가?

김성식이 아는 김춘득은 선량하고 예술적인 사람이었다. 그처럼 병고와 생활난을 겪고, 감시를 받으며 체포와 고문의 위협에 직면하면 떠나지 않을 사람이 도대체 어디 있겠는가? 겨우 한 끼 식사를 그나마 푸짐히도 대접하지 못하고 친구를 보낸 김성식은 쓸쓸하고 허탈한 심정을 가누기가 어려웠다.


#미아리고개#납북자#인천상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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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과 평론을 주로 쓰며 '인간'에 초점을 맞추는 글쓰기를 추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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