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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식의 집에 인민군 부대가 들어왔다. 모란강 통신대대 제2소대라고 했다. 소대장을 포함해서 18명이었다. 소대장과 다른 한 사람만 이북 출신이고 나머지는 모두 충청도 한 마을에서 지원한 의용군들이었다. 경성전기학교 출신이라는 연락병은 불과 열여섯 살이었다. 소대장은 교양이 없어 보였다. 그런데도 그는 틈나는 대로 독보회라는 이상한 이름의 교양강좌를 자주 열었다.

강의는 주로 마당에서 열렸다. 소대장의 말소리는 힘찼지만 내용은 단순하고 부실했다. 경각성, 창발성 등의 문자만 나열할 뿐 강의에는 일관된 주제가 없었다. 그래도 매번 "알았나?" 하고 물으면 모두가 지체 없이 "예!" 하고 대답했다. 강의하는 소대장보다 오히려 수강생인 대원들의 지적 수준이 높아 보였다.

그 중 한 사람 고등교육을 받은 이가 있었다. 그는 말씨가 은근하고 태도도 정중했다. 소대장은 그에게 가 무엇인가를 자주 상의했다. 알고 보니 그는 당원이었다.

대원들은 인민군이 마을에 진주하자 한꺼번에 의용군으로 지원했다고 했다. 지원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품으로 보아서는 기율도 엄정했고 기술 교육도 어느 정도 되어 있는 듯했다. 집에서 한문을 배우고 많이 읽었다는 한 병사는 김성식의 방에 있는 한문책들을 보고는 아주 좋아했다. 김성식은 은근히 그의 말을 유도해 전황을 물었다.

"아직도 산중에는 국군들이 많이 남아 있어서 진지를 다지며 대공신호도 올립니다. 우리는 안양에서 그들에게 포위되어 하마터면 죽을 뻔했습니다."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벌어지려 하는 판인데 당원이 들어와 눈짓을 하자 그는 얼른 방에서 나갔다.

주야장천 유성기만 듣는 인민군 소대장

소대장은 유성기에 기갈이 난 사람 같았다. 대문으로 들어오면서부터 그는 유성기 먼저 찾았었다.

"댁에 유성기 있습니까?"

김성식은 있다고 한 것을 후회할 정도였다. 소대장은 밤낮으로 유성기를 들었다. 몇 개 안 되는 유성기판을 돌리고 또 돌리며 되풀이해서 들었다. 그것도 성이 차지 않는지 대원들을 시켜 마을을 뒤져 소리판이라고 명색 붙은 것이면 무엇이든지 얻어오라고 했다. 별의별 유행가와 요상한 만담까지 그는 전혀 물리지 않는지 주야장천 유성기를 들었다. 그는 갈수록 신명이 오르는지 거듭거듭 유성기 소리를 들었다.

"그 역시 전쟁에 지쳐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게 보아 주니 유성기는 그의 탈출 통로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룻밤만 자고 떠난다던 인민군은 사흘째 되도록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김성식은 빈둥빈둥 노는 모습을 그들에게 보일 수도 없어 학교에 나간다고 속이고 산으로 올라갔다. 그는 이두오의 움막으로 건너가 가마니에 누웠다. 그는 주머니에 질러 가지고 간 주먹밥을 이두오와 나눠 먹었다.

"지난 번 말한 불확정성의 원리니 양자역학이니 하는 것들은 대체 무엇을 뜻하는지 나는 통 모르겠어."
"쉽게 말해 운명이나 섭리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르겠다는 거야. 그것을 왜 과학이 건드리는지."
"자연의 원소가 불안정하다는 것을 물리학이 증명하고 있는 겁니다."

"그걸 증명할 수 있다는 것인가?"
"모든 물질의 원소는 고정된 입자가 아니라 떨리는 파동이라는 새로운 이론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어떻게 떨리느냐에 따라 입자의 성격이 달라지는 것뿐이라는 것이지요."
"물질의 기본이, 그러니까 물질의 조합인 자연이나 우주에도 예정된 운명은 없는 것이다?"
"맞습니다."

"그럼 우리 민족도 앞으로 어떻게 될지 정해져 있는 바는 없다?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인가?"
"그렇습니다. 모든 경우에 확률이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이 양자역학입니다."
"그럼 우리나라가 강대국이 될 가망성도 있다는 건가?"
"당연합니다. 확률이 있으니까요."

"새로운 논리인 것만은 틀림없군."
"원자탄 개발이 끝난 지금, 서양의 학계에서는 불확정성의 원리와 양자역학이 대유행입니다."

대포 소리가 날로 가까워지면서 김성식의 가슴도 부풀어 올랐다. 하지만 인민공화국은 대한민국처럼 서울을 허망하게 내 주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렇다면 서울에서 격렬한 시가전이 벌어질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대한민국 군대를 기다리는 심정을 품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히 굶어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라든가 아니면 자유에의 그리움이라든가 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한층 미묘하고 복잡한 감정들이 얽혀 있기 때문이었다. 거기에는 직업 유지와 가족 부양이라는 현실적인 이유도 개재되어 있었다.

인천 상륙은 분명해진 사실이었다. 대포 소리로 보아 유엔군은 최소 김포 정도에는 이르렀을 것 같았다. 미군이 영등포에 들어왔다는 소문도 들리고 있었다. 배고픈 사람들이 지어낸 말이겠지만, 유엔군과 미군은 굶주리고 있는 사람들에게 밀가루 한 포씩을 배급했다는 풍설도 떠돌았다.

괴나리봇짐에 삽 한 자루의 의용군들

김성식의 집에 있는 인민군들의 표정에는 당황하는 기색이 엿보였다. 그들은 저희들끼리 대포 소리의 거리를 놓고 구구한 공론들을 주고받고 있었다. 사십 리라고도 했고 오십 리라고 10리를 얹어 말하는 병사도 있었다. 당원이 나서 적어도 백 리는 된다고 하자, 모두들 입을 다물었지만, 그것을 믿는 표정들은 아니었다. 소대장은 한 술 더 떴다.

"백 리고 십 리고 간에 이건 다 연습하는 소린데 뭘 더 말할 게 있어?"

하지만 인민군 병사들에게는 출동 대기 명령이 떨어졌다. 그들은 총기를 분해 소제하고 통신 기구를 정비했다. 그러고는 옷 보따리를 둘러메고 삽 한 자루씩을 손에 쥐었다. 그들에게는 배낭은 물론 천가방도 없었다. 말 그대로 괴나리봇짐 하나를 달랑 묶은 피난민 행색이었다. 소대장만은 가죽 가방을 들고 있었다. 그는 자기의 가방을 연락병의 등에 지웠다.

그는 한동안 생각에 잠기더니, 정숙에게 대청 벽에 걸린 란도셀(어린이 배낭 가방)을 줄 수 없느냐고 물었다. 정숙은 란도셀의 주인인 봉이를 타일러 승낙을 얻어냈다. 그는 란도셀에 연필이나 종이 같은 용품을 넣고 옆구리에 찼다.

란도셀을 얻은 그는 기분이 매우 좋아 보였다. 그는 란도셀 대신 삽 네 자루를 주겠다고 말했다. 김성식은 값을 받고 싶지는 않다고 했다. 하지만 소대장은 부하를 시켜 삽 네 자루를 기어이 광에 넣도록 했다. 민간인의 물건을 징발하면 반드시 보상을 해 줘야 한다는 지침이라도 내려져 있는 듯했다.

갑자기 미군의 비행기가 북악 상공에 나타났다. 인민군들은 급히 처마 아래로 몸을 숨기고 움직이지 않았다. 비행기가 가자 소대장은 대원들에게 말했다.

"1차 목표지는 마포이지만 그곳에 가서 또 어디로 출동할는지 명령을 기다려야 한다."

그들은 북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일선으로 싸우러 나가는 모양이었다. 김성식은 왈칵 그들이 가여워졌다. 아무리 보아도 동생이나 조카처럼 여겨지는 소년들이었다. 그들은 괴나리봇짐에 총 한 자루와 삽 한 자루씩을 가지고 미군의 기계화 부대에 맞서야 할 터였다.

하지만 그들은 아는지 모르는지 너무도 태연하고 순진해 보였다. 그들이 며칠도 안 되어 미군의 대포밥이나 될 것을 생각하니 김성식은 뜨거워지는 눈시울을 막을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마당에 도열하여 군가를 합창했다.

높이 들어라 붉은 깃발을/ 그 밑에서 굳게 맹세해/ 비겁한 자야 갈려면 가라/ 우리들은 붉은기를 지키리라

소대장은 지휘를 하며 음정이 틀린 곳을 지적하더니, 다시 한 번 큰 소리로 부르게 했다. 봉이와 목이가 신이 나는 듯 눈을 빛내가며 좋아했다.


#의용군#유성기#김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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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과 평론을 주로 쓰며 '인간'에 초점을 맞추는 글쓰기를 추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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